제 8장
내로남불 (1)
정우의 개인 집무실은 단출했다. 기본 적인 사무용품만 배치되어 있었다. 물 론 반드시 필요한 용품은 구비해놓았다. 단조로우며 기본에 가장 충실하다.
정우의 기본 성향과 일맥상통하고 있 었다. 쓰임새에 따라서 화려함과 단조 로움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효율성을 강조했다.
“돌아가는 정황은?”
“단주께서 예상하신 대로 빈틈없이 맞아 들어가고 있습니다.”
일본에 가기 전에 혹막에 일거리를 하나 맡겨놓았다. 차즘 상황이 무르익 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서둘러선 안 되 었다.
“의심은?”
“팽가의 정보력이 남궁세가에 편중되
고 있으니, 우릴 의심하진 못할 겁니 다.”
하북팽가는 거대한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내적으 로 가주가 부상을 입었고, 후계자 경쟁 이 치열했다. 외부적으론 남궁세가의 압박이 심해지고 있다.
내우외환의 위기를 겪고 있는 와중, 금강문과 연루된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었다. 한데 이 모든 사달의 원인이 남 궁세가가 아닌 정우였던 것이다.
“충격이 컸나보군.”
“흑룡성주의 무공수위가 예측한 것
이상이었습니다.”
흑룡성주 진대악, 능히 일대의 패주가 될 무력을 소유한 절세고수다. 홀로 팽 가의 가주를 상대하고 강시까지 처리했 다. 또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놓는 주도면밀한 자이기도 하다. 그를 놓쳤 다는 점이 팽가로서는 부담이 될 수밖 에 없다.
‘주군의 계략^ 소름이 돋는다.’
박찬균은 팽가의 가주를 조사하면서, 그가 얼마나 냉철한 자인지를 파악했다. 하지만 그런 팽 가주조차 주군의 손바 닥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최강의 무력 을 상쇄하는 사기적인 두뇌다. 가히 완 전무결한 존재다.
‘충성해야 한다, 벗어날 수 없어.’
누구도 주군의 그물 안에 들어오면 빠져나가지 못한다. 말 그대로 들어오 는 건 제 맘이지만, 나가는 건 주군의 맘이었다. 웬만하면 들어오지 않는 편 이 낫고, 들어왔으면 얌전히 굴복해야 했다.
“거래는 유명무실해졌겠군.”
“그렇습니다.”
하북팽가의 주력은 전부 본가로 돌아 간 상태다. 한국 내에 금강문이 내어준 지부는 껍데기만 남아 있었다. 본가가 위험한 지경이니, 한국 지부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팽가로서는 손해만 보고 철수한 꼴이 된다.
“어찌할까요?”
“좋은 패니, 간수 잘해야겠지.”
유명무실해졌다고 해도 팽가의 이름 으로 내놓은 지부다. 후일 요긴하게 쓰 일 수 있으니 관리해야 했다. 동물과 달 리 인간에게 이름은 중요하다. 하물며 단체가 되었을 때 이름은 더 중요한 명 분이 된다.
“팽 가주의 선택은 번합니다. 반한정
서가 팽배해진 이때에 주변의 도움을 받기란 어려울 겁니다. 하물며 남궁세 가와 손을 잡은 세력이 있다고 의심하 고 있습니다.”
“그걸론 부족해.”
팽가가 금강문과 손을 잡았다는 소문 이 돌고는 있지만, 그뿐이다. 중국인들 은 통제당한 삶에 익숙하다. 정부에서 먹잇감을 던져주기만 하면, 중화사상에 도취되어 무도한 행동을 대수롭지 않게 한다. 그럼에도 정작 강한 상대 앞에서 는 꼬랑지를 내리곤 했다. 그 예로 미국 은 건드리지 않았다. 여전히 미국은 세 계 제일의 수출국이자 수입국이다. 세 계 소비시장의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었 다. 미국과 척을 진다면 중국도 무사하 지 못한다.
“소문을 더 키우겠습니다.”
“그보다는 남궁세가에게 적당한 미끼 를 던져주는 게 낫겠지.”
남궁세가와 하북팽가는 오대세가의 일원임에도 호시탐탐 서로를 노리고 견 제했다. 개와 고양이처럼 물고 물리는 관계가 지속되었다. 여기에 사천당가, 제갈세가, 황보세가의 이해관계가 복잡 하게 엮여 있었다. 어느 한쪽에 유리하 지 않도록 균형을 유지하는 이유는 힘 이 한쪽으로 쏠리는 걸 경계하기 때문 이다.
“그들은 오대세가가 무너지기를 바라 진 않을 겁니다.”
정파를 구성하는 큰 틀 안에 오대세 가와 구파일방이 포함된다. 오대세가 내부에서 힘겨루기가 벌어지더라도, 크 게 번지기를 바라진 않을 거다. 원인은 구파일방과의 균형추가 흔들렸을 때의 파장이 크기 때문이다.
“그것도 온전한 힘이 있을 때나 그렇 지. 내부적인 문제와 명분이 주어진다 면?”
“과연 그렇습니다.”
박창균은 감탄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목표물을 판에 놓고 어떤 식 으로 운용을 해야 최상의 결과를 도출 해내는지 마치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찾아간다. 따로 놓고 보았을 때는 맞춰 지지 않던 퍼즐이 두 개, 세 개 결합을 하자 완전한 전략이 되었다. 실로 소름 돋게 만드는 암계의 귀신이었다.
‘도대체 뭘 하고 살아야 이런 괴물이 될수 있는 거지?’
주군의 실체를 확인할수록 박창균은
두려움을 느꼈다. 천재는 일반인의 잣 대로 제지 못한다고 하는데, 주군은 그 마저도 넘어섰다.
“일본은 어떻지?”
“굉장히 신중합니다. 아마 당분간은 조용할 듯싶습니다.”
네즈미가 내부의 문제는 일단락되었 다. 변형된 오성망혼진이 자리를 잡아 감에 따라 네즈미가는 가주와 신녀를 중심으로 힘을 결집시켰다. 정우와 금 강문주의 난동으로 과거에 비해 규모는 작아졌을지 몰라도 전력은 약화되지 않 았다.
‘드러난 발톱은 다 잘라놓아야 해.’
정우는 한 번이라도 발톱을 드러낸 자들은 또다시 드러낸다고 봤다. 찍어 누를 수 있을 때 완벽히 무너뜨려야 했 다. 하북팽가와 네즈미가는 목적을 관 철하기 위한 도구이자 수단이었다. 그 로 인해 전멸을 당한다 해도 상관하지 않았다.
‘도구는 쓰다가 망가지면 버리면 그만 이지.’
애정을 가진 소장품인 흑금단, 백금단, 실드와는 차별화했다.
“실수하면 알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최선을 다해 주 군의 명을 완수하겠나이다.”
“그래야지, 가봐.”
“가보겠습니다.”
박창균에게 신증을 기하라고 당부한 후, 금강문주를 찾았다. 문주는 현재 바 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는 중이다. 그 옆으로 촬영 스태프가 늘어서서 금강문 주의 일상을 찍었다. 강 피디의 활화산 같은 열정이 전해져 왔다.
정우는 총관실로 방향을 틀었다. 김 총관은 돌아가는 정황을 알고 있어야 했다. 총관실에 들어서니 부총관과 논 의가 한창이었다. 금강문에서 제일 바 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다웠다.
“오늘도 열일 하시네요.”
“일거리를 늘려준 장본인이면서, 뻔뻔 함이 천하무적이구나.”
“나이가 들수록 일을 해야 한다고 들 었습니다.”
“너 좋을 때 쓰라고 하는 말 아니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몸과 마음에 병이 든다. 그럴 때 일수록 자신이 잘하는 것을 찾아야 했 다. 하지만 젊어서 고민을 하지 않으면 나이 들어서 찾기가 더 어렵다. 문제는 현재의 젊은 청춘들이 하루 살기에도 바쁘다는 점이다. 시간이 있어야 새로 운 걸 찾고 노후대비를 하지. 청춘과 열 정을 다 소비하고 나면 남는 게 없기에 마냥 노력하라고만 할 수도 없다.
김 총관과 혹금단주의 티격태격을 물 끄러미 바라보며 상념에 젖는 부총관이 다. 그녀로서는 겪어보지 못했던 광경 이다.
‘알다가도 모를 분이라니까.’
이유정은 혹금단주를 처음 봤을 당시 가 상기되었다. 그땐 무서워서 어떻게 제안을 했는지도 몰랐다. 그도 그럴 것 이 도해문을 무너뜨린 장본인이었다. 젊은 나이에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 있 는데다가 사위를 압도하는 카리스마까 지 갖추었다.
처음에는 굉장히 까다롭고 힘들 줄만 알았다. 한데 막상 함께해본 그녀는 누 구보다 혹금단주를 신뢰했다.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적재적소에 사람을 쓰는 법을 알고 있었다. 바르고 공정하며, 합리적인 이성의 소유자였다.
“부총관.”
“아, 예.”
“뭘 그렇게 생각해?”
“아니에요.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얘기들 나누세요.”
부총관은 필요한 걸 챙기고, 자리를 정리한 후 총관실을 나갔다. 누가 시키 지 않아도 그녀는 금강문의 대소사를 완벽하게 관리해오고 있었다. 차후, 금 강문의 총관 자리를 꿰찰 능력을 갖추 었다.
“후계자 수업은 잘되고 있나 보네요.”
“네가 주워 오기는 했어도, 내 능력을 이어받을 아이니 함부로 대하면 안 된 다.”
‘총관님을 대하듯 하겠습니다.
“?절대 안 돼!”
나를 대하듯 대한다. 듣기 좋은 말처 럼 들리지만, 김 총관은 격렬히 반대했 다. 정우에게 있어 총관은 부려먹기 딱 좋은 대상이다. 결국 부총관도 막 부려 먹겠다는 심보다. 문제는 마냥 반대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행여나 마음 에 안 들어서 정우가 계약 해지를 요구 하면 그땐 엄청난 곤란을 겪게 된다. 금 강문의 대소사를 관리하는 총관의 직위 도, 정우의 가치에 비하면 부족함이 컸 다.
“오늘은 또 왜 온 거냐?”
“또라니요, 저 되게 섭섭합니다.”
“네가 섭섭하면 나는 어떨 것 같으 냐?”
“전에는 손자 같다면서요.”
“너 같은 손자 둔 적 없다, 이놈아!”
김 총관은 정우의 가치를 높게 본다. 금강문에 없어서는 안 되는 반드시 필 요한 인재임에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정우 같은 손자는 사양하고 싶 다. 속에 능구렁이를 무한대로 품고 있 는 손자를 상기해봐라, 귀여울 수 있나. 또한 손자라고 해도 하루 종일 돌보라 고 한다면 사양31다. 이 나이가 되면 손 자 돌보는 것도 귀찮다. 보름에 한 번 정도 볼 때가 딱 좋다.
“준비는 잘되어가고 있는 거죠.”
“판을 완전히 갈아엎을 심산이더냐.”
“새 술은 새 잔에 담0}야 보기 좋잖아 요.”
“헌 술이 얌전히 당하겠느냐.”
인간은 욕망의 동물이다. 가지지 못할 걸 열망하며, 가지고 나면 더 큰 욕망을 불태운다. 그런 인간이 가지고 있는 걸 순순히 내놓으려고 하겠는가. 자기 삶 에 만족하며 사는 소시민과 달리 그들 은 권력의 정점에 있었다. 권력은 친혈 육과도 나누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 격 렬히 저항하며 흑색선전과 네거티브가 난무하게 될 것이다.
“털면 누가 더 손해날지 아시면서 왜 그러세요.”
“네가 얼마나 무서운 놈인지 알고는 있는거냐?”
“무섭다니요, 정도를 걷고 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뻔뻔해지는구나.”
정도란 올바른 길을 뜻한다. 올곧게 정도를 걸어간다면 탈이 나지 않는다. 문제는 세상이 정도만을 따르지 않는다 는 점이다. 불의와 부조리가 판을 치는 현실 속에서 홀로 정도를 걷는다고 가 정을 해봐라. 답은 뻔히 나온다.
“그동안 조사한 목록이에요.”
“어쩌려고?”
“괜찮은 사람들이에요. 융통성도 있 고.”
“너한테나 그렇겠지.”
각 도와 시에서 문제가 없는 자들로 만 선별을 했다. 그렇다고 청렴함만을 보진 않았다. 군주론을 보면 거짓말에 능한 군주가 무능한 군주보다 낫다고 했다. 능력을 겸비하면서도 불의에 저 항할 줄 아는 자들이다. 이를 선별하기 위해서 5년의 시간을 소비했다. 이제야 비로소 완성된 목록이다. 이들이야말로 세상을 바꿀 원동력이 되리라 본다.
드륵!
금강문주가 문을 열고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상석에 앉아 있었던 총관은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총관실의 대빵은 본 인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금강문주도 딱히 상석에 앉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앉는 자리가 있는 것으로 만족했다. 어 쩌면 이것이야말로 금강문주의 가장 큰 장점일지도 모른다. 주변의 눈치를 보 지 않고, 소신을 밀어붙이는 추진력을 가지고 있었다.
“촬영은 어때요?”
“그냥 하던 대로만 하라는데, 이게 과 연 재밌는 건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아. 강 피디가 네 말대로 그렇게 뛰어난 사 람이냐?”
강 피디는 히트 제조기라는 말이 붙 을 만큼 유명하다. 방송국에서도 서로 모셔가려고 애를 쓴다. 능력 없는 자를 쓸 만큼 방송국이 허술하진 않았다.
“전과는 포맷이 좀 다른가 보네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찍은 걸 본
것도 아니고. 이건 100프로 망해. 아니 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금강문주는 편하게 촬영을 해서 좋기 는 하지만, 시청률이 나올 것 같지 않았 다. 그냥 일상을 홀러가는 대로 찍어놓 았으니, 인간극장을 찍는 줄 알았다.
“잘되면 진짜로 장을 지질 건가요?”
“지질 수 있으면.”
“확실히 간단치 않겠네요.”
보통 사람이야 팔팔 끓는 장에 손을 넣으면 화상을 심하게 입을 테지만, 금 강문주는 용암에서 수영을 해도 멀쩡한 육체를 소유하고 있었다. 소신을 보이 는 행동 같아도 실제로는 지질 생각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정우는 방송에 대해서는 신경을 껐다. 강 피디의 능력이면 최소 평타는 나올 거라 본다. 이미지가 나빠지지만 않아 도 성공적이었다.
“팽가의 사정이 예상보다 더 심각한 모양이에요.”
“뭐라고!”
이호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언제부터 팽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 다고, 반응이 상당히 생소했다. 딱히 팽 가에 대한 우호적인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되놈을 입에 달고 사시는 분치 고는 지나치게 격한 행동이다.
“?그럼 내 카드는?”
“사태가 심각해지면 정지시킬지도 모 르죠.”
풍족한 삶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이호극은 격렬히 분노했다.
백지 카드를 긁고 다닐 때마다 살아 있음을 확인했었던 짧은 시간이 아까웠 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잘 긁고 다닐 걸 그랬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시간을 아껴 가며 긁어주어야 했다. 그것이 카드 사 용자의 미덕, 연체는 팽가의 몫이다.
빚 무서운 줄 모르고 쓰고 싶은 이호 극의 대찬 호기가 충만하다. 카드를 정 지시키는 자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는 불굴의 의지가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