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장
뒤끝은 없다 ⑴
사방신 길드의 수뇌부 회의가 끝나고 돌아온 현무 길드의 길드장, 수왕 이영 환은 피곤한 기색이었다. 무문연합에서 정식으로 항의가 들어왔다. 일본 무가 와 손을 잡고 무림대회를 방해한 일에 대한 대가를 요구한 것이다.
‘머리 잘 썼군.’
무문연합이 일본무가에 대해서 대외 적으로 밝히고 강하게 압박하며 무리한 요구를 해왔다면, 협상은 시도하지도 않았다. 가지고 있는 걸 반 이상 내놓으 면 길드의 유지가 어렵게 된다. 게다가 유니크연합과 길드연합의 길드도 가만 히 있지 않을 게 뻔하다.
사방신 길드는 사분오열되어 공중분 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무문연합은 대외적으로 일본 무가를 언급하지 않았 으며, 사건의 규모에 비해 무리한 요구 조건은 아니었다.
‘골치 아프네.’
무문연합은 사방신 길드가 가진 권한 의 4분지 1을 원했다. 절반 이상보다는 훨씬 줄어든 요구 조건이었다. 무엇보 다 요구 조건을 사방신 길드에 맡겼다. 이 정도는 무문연합에서도 많은 부분 양보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이는 단편적인 구도일 분이다.
협상 조건을 사방신 길드에게 전적으 로 맡긴 이상, 내부적으로 협상이 필요 했다. 길드는 무문처럼 결속력이 높지 않았다. 같은 소속의 길드도 이럴진대, 어느 길드가 손실을 더 떠안으려고 하 겠는가. 요구 조건이 줄어들면서도 그 안에서 또 치열한 설전이 이어졌다.
‘노림수가 분명한데도, 답이 안 나오 게 하다니.’
무문연합은 협상 시일을 길게 잡았다. 사방신 길드 내부적으로 충분히 협상을 하도록 말미를 제공한 것이다. 무문연 합의 조건을 들었을 때는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는데, 시간을 줌으로써 내부결 속력이 무너지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협상을 하는 동안 대외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기 어렵게 되었다. 무문연합은 무림대회를 기반으로 세력 을 확장하고 있는 시기에 상대적으로 차이가 더 벌어지고 있었다.
‘스스로 족쇄를 채운 격이군.’
이제 와 협상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 릇이었다. 무문연합에서 작성한 계약서 에 길드의 이름으로 사인을 했다. 이마 저도 위반해버리면 유니크 전체의 공분 을 사게 된다.
‘무문의 고리타분한 노인네들의 머리 에서 나오기 어려운 수인데, 누구지?’
무문의 경직성과 융통성 없는 성향은
예로부터 알아주었다. 특히 나이가 든 무인일수록 본인의 주장을 꺾지 않으려 고한다.
이번에는 머리를 쓴 정도를 벗어나, 고도의 견제전략을 사용했다. 당장의 복수에 연연하는 무인의 성향과는 거리 가 멀었다. 아무래도 무문연합은 세대 교체를 이루면서 젊은 무인을 적재적소 에 기용하기 시작한 듯하다.
-마스터.
“무슨 일이야?”
-유진그룹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피곤하니까, 돌려보내.”
-마스터를 보지 않고서는 가지 않겠 답니다.
“누군데?”
-유호진입니다.
귀찮은 기색이 완연한 이영환이지만, 유진그룹과의 사이를 감안해서 들어오 라고 했다. 무문연합의 요구 조건을 들 어주고 나면, 재정상태가 경직될 수밖 에 없다. 짜증은 나도 오랫동안 유진그 룹과 협력 관계를 맺어오면서 막대한 자금을 융통받았다. 아예 무시할 수만 은 없는 현실이다.
드륵!
유호진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일전에 엉망진창으로 얻어터진 후, 병 원 신세를 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건 만. 멀쩡하게 나타난 걸 보면 최상급 속 성 치료사를 동원한 모양이다. 하긴 돈 이 있는데 치료가 늦어진다는 건 상상 하기 힘들다. 요즘 시대는 불치병도 특 이 속성 능력자의 도움을 받으면 치료 가 가능해졌다. 예전보다 돈이면 못 할 게 없어진 세상이 되고 있었다.
“어째서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 겁니 까‘?”
유호진의 말투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놈이 버젓이 잘 살고 있다는 소식 을 들어야 했다. 그날의 사건으로 재계 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는 바람에 얼 굴을 들고 다니기도 어렵게 됐다. 사건 의 원흉이 발 뻗고 편히 잔다는 소식에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나한테 따지는 것이냐?”
이영환의 심기 불편함이 고스란히 담 겼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가 돈 좀 있다고 까불고 있었다. 유진그룹과 협약을 맺고 있으나, 그분이다. 돈이 많 다고 해서 칼이 들어가지 않는 것도 아 니니까.
오싹!
문을 열고 들어와서 입을 놀릴 때까 지만 해도 기세등등했던 유호진은 육신 을 옥죄는 기세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이 비록 의뢰인이기는 하나, 상대 는 한국 길드의 축을 이루는 현무 길드 의 길드마스터다.
“그……런 뜻이 아니라, 의뢰를 했음 에도 소식이 없어서 답답한 마음에 찾 아온 겁니다.”
“네가 유진그룹의 후계자인 걸 다행 으로 여겨야 할 거야. 내 앞에서 그딴 시답지 않은 투정을 부린 놈은 다들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까.”
이영환은 직설적으로 답해주었다. 까 불다가 황천길 가고 싶지 않으면 적당 히 대접을 해줄 때 받아먹으라고. 유진 그룹의 회장도 자신을 함부로 대하진 못했다. 하물며 이제 막 핏기가 가신 애 송이가 천지분간 못 하고 날뛰는 걸 용 납할 만큼 도량이 넓지 않다. 그럴 마음 도 없고. 가뜩이나 기분이 좋지 않은데 기름을 부은 격이라, 감정적으로도 격 했다.
꿀꺽!
오금이 저려 왔다.
유호진은 위압감에 짓눌리면서도 오 기가 발동했다. 길드의 마스터라고 해 도 그룹에 고용된 고용인이었다. 주인 을 이렇게까지 홀대하다니, 후일 반드 시 후회하게 해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은 그와 척을 져선 안 된다는 걸 깨달았 다.
“제가 성급한 마음에 결례를 범했습 니다. 자중하겠습니다.”
“거래는 거래, 곧 원하는 답을 얻을 테니 기다리고 있어. 너도 알다시피 곧 바로 일을 진행시키면 유진이나 우리나 수사 대상에 오를 수밖에 없어.”
이영환은 유호진의 속내를 간파했음 에도 별말 하지 않았다. 주변에서 떠받 들기만 한 애송이가 굴욕을 당하고도 사과를 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사과는 사과고, 유호진은 길드에 찾아 온 목적을 밝혔다.
“그 정도론 제 분이 풀리지 않습니 다.”
“뭘 더 원하지?”
“놈의 모든 걸 부숴야겠습니다.”
“당사자도 아닐 텐데, 심하군.”
실상 유호진을 엉망진창으로 망가뜨
린 대상은 대한그룹의 금지옥엽 유하라 다. 복수를 하려면 유하라에게 하는 게 맞다. 따지고 보면 가만히 있다가 봉변 을 당하게 된 셈, 목표물이 된 하정우는 억울할 수밖에 없다.
이영환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살아가다 보면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 들투성이다. 그것이 약자의 삶이다. 강 한 자의 노리개로 살다가 쓸모가 다하 면 버려지는. 역사는 언제나 그래왔다.
“그래야 당사자를 얻을 수 있으니까 요.”
“집요하군, 그건 마음에 든다.”
개망신을 당하고도 목적을 잃지 않는 유호진의 집요함이었다.
“계약 외의 추가사항은 더 돈이 든다 는건알고 있겠지?”
“50억을 드리죠.”
“화통하군, 원하는 대로 해주지.”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거래를 마친 유호진은 돌아섰다.
그의 두 눈이 독기로 가득했다. 아직 까지도 그날의 악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유하라 옆에서 낄 낄거렸던 하정우가. 괴롭히는 시어머니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밉듯. 하정 우의 비웃음이 밤마다 나타나 악몽을 선사했다.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도록 해주 마.’
세계 경기가 주춤하면서 국내의 성장 세도 주춤하고 있었다. 경기 성장률이 1%내외를 찍고 있는 와중이고, 미래 예 측도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그런 반면 하이퍼 팩토리의 성장세는 눈부셨다. 신에너지의 축을 이루는 배 터리를 개발해서 300%의 고도성장을 했기에 이후에는 보합세를 유지할 거란 전망이었다.
그런 경제 연구소의 기업평가를 비웃 듯, 하이퍼 팩토리는 새로운 사업을 개 발해 배 이상의 성장을 계속하고 있었 다. 20대 기업의 말미에 들어갈 만큼의 매출을 올렸다. 수익적인 측면에서 놓 고 보면 10대 기업에 들어갈 수준이다.
하이퍼 팩토리의 고도성장의 원동력 은 리차드 공학 연구소가 있기에 가능 했다. 특히 에너지 스톤을 이용한 배터 리 사업은 서양의 마도공학을 뛰어넘었 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로 놀라운 성과 이며 이변이었다.
우리나라는 마법 분야의 연구가 서양 에 비해서 양은 물론 질에서도 부족하 다. 당연히 마도공학에 관해서는 뒤처 질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갖추었다. 일각 에서는 서양의 마도공학을 따라잡으려 면 최소 10년 이상을 장기적으로 투자 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하나 마도공학 연구에 들어가는 시간 대비 투자비용이 커 국회에 보류 중이 며 회의적이었다. 단기간 내에 성과를 내야만 하는 우리나라의 부정적인 특수 성이 작용하고 있었다.
리차드 공학 연구소는 일각의 부정적
인 평가를 뒤집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리고 속속 내놓고 있는 마도공학 제품 이 돌풍을 일으킬 준비를 마치고 있었 다.
“오늘도 바브시네요.”
“그게 누구 때문일 거 같으냐?”
“혹시?”
“이놈이 날 놀려!”
정우는 리차드 교수를 찾았다.
연구소에 박아놓고 한동안 찾지 않았 더니 노인네가 쌓인 게 많은 모양^다. 그러나 딱히 미안하지는 않았다. 마법 사는 혼자 조용히 연구하는 걸 좋아하 는 외골수적인 족속들이다. 특히 본인 의 연구에 관해서는 소유욕이 강해 어 지간해서는 알려주지 않는 특성이 있 다.
“여느 때보다 팔팔하신데 엄살이 심 하네요.”
“너도 늙으면 말년이 괴로울 거다.”
“오래도록 함께하셔야지요. 제가 열정 적으로 도와드리겠습니다.”
“이 징그러운 녀석, 네 아비의 심정이 이해가 가는구나!”
하이퍼 팩토리에서 아버지의 유일한 술친구가 리차드 교수다.
두 분 다 사람을 쉽게 사귀는 편은 아 니신데, 같은 마음, 즉 동질감을 공유해 서인지 몰라도 쉽게 친해졌다.
술자리에서만큼은 정우의 뒷담화를 깔 수 있었다. 아들이자 제자의 뒷담화 를 까면서 친해진 걸 보면, 뒷담화는 만 고불면의 진리였다. 사실 다른 사람을 만나서 그런 말을 해봤자, 아무도 공감 해주지 않는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정 우의 이미지는 나쁘지 않았다. 또한 제 자이자 아들을 험담해봤자, 제 얼굴에 침을 뱉는 격이었다.
“교수님과 아버지 때문에 불로장생할
거 같습니다.”
“……난 아니다.”
홈칫 놀란 리차드 교수의 말투가 살 짝 떨렸다.
갑자기 한국 속담인 낮말은 새가 듣 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이 떠오르 고 지랄이었다. 한편으로 찰나에 모든 책임을 하 사장에게 넘겨버렸다. 술친 구로서의 우정이 제자의 말 한 마디에 박살나는 참혹한 현실이었다.
“요즘 들어 귀가 아주 가렵더라고요.”
“귀신같은 녀석.”
“뭐, 어때요. 없는 자리에서는 나라님
도 욕한다는데.”
“그러는 넌 대놓고 패지 않느냐.”
이 망할 놈의 제자는 수틀리면 대통 령이고 뭐고,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팰 녀석이었다. 뒤에서가 아닌 앞에서 도 패는 뻔뻔함과 당당함으로 무장했다. 문제는 그럴 만한 능력이 차고 넘친다 는 점이다. 당하는 입장에선 화가 나도 어찌할 수 없는 절망감만 맛보게 된다.
“일본 출장은 잘 해결된 게냐?”
“당연하죠.”
“하긴 안되는게 이상하지.”
리차드 교수는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이놈이 시작한 일치고 되지 않은 적이 없다. 뭐든지 원하는 대로 만들어내는 신통방통한 녀석이었다. 안 되면 되게 하라, 무식한 발언이 통하게 만들었다.
“저도 사람입니다. 때론 실수도 하고 허점도 많습니다.”
“넌 사람 아니니까, 방귀도 뀌지 마 라.”
네즈미가의 일은 유우신과 시즈나에 게 일임했다. 같이 오겠다고 육탄전을 펼치며 달라붙는 시즈나를 패대기치느 라 고생을 좀 했었다. 신이라는 놈이 살 기 위해 지 몸 아니라고 신녀를 바친 것 이다. 생산적인 활동으로 유대가 깊어 지는 인간의 심리를 이용한 잡신(雜神) 의 발버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