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네즈미가의 신녀 (1)
대외적으로 네즈미가의 심처는 가주 실로 알려졌다. 그러나 실상은 좀 다르 다. 이중삼중으로 보안이 되어 있는 장 소가 따로 있었다.
그곳이 신녀의 거처, 신녀각(信女閣)이 다.
네즈미가는 가주의 의도대로 움직인 다고 보지만, 역대로 가문의 대사(大事) 는 신녀의 예언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 의미를 되새겨보아야 한다. 네즈미가의 본질은 신녀의 예언에 있었다. 그 의지 를 실천하는 자가 네즈미가의 가주다.
그 말은 신녀를 잃으면 네즈미가의 혼(魂)을 잃는다는 뜻이 된다. 그렇기에 대대로 신녀각은 본가의 심처에 자리하 게 되었다.
“이 흐름은.”
결계의 흐름을 읽어낸 여인.
신녀각의 주인.
네즈미가의 당대 신녀, 시즈나다.
범상치 않은 결계의 흐름은 네즈미가 의 역사를 위협하고 있었다. 대대로 신 녀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나서지 않도 록 되어 있으나, 지금은 달랐다. 네즈미 가는 누란의 위험에 직면하고 있었다. 신녀로서 가문의 위기를 모른 척할 수 는 없는 노릇이다.
“구검은 본 신녀의 의지를 받들라.”
시즈나는 즉시 옥녀구검(玉女九劍)을 불렀다.
사삭!
선녀를 닮은 9명의 아름다운 여인이 부름과 동시에 깃털처럼 날아와 신녀의 앞에 부복했다. 영화에 나오는 전통적 인 등장신이다.
“부르셨습니까?”
“가주를 뵈러 갈 테니, 준비해.” 옥녀구검은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녀들은 신녀의 검으로 선택을 받은 여인들이다. 어렸을 때부터 신녀의 명 을 절대적으로 따르도록 교육받았다. 신녀가 죽으라고 하면 죽음도 마다하지 않았다.
‘오성망혼진이 분명해.’
시즈나는 결계가 펼쳐지자마자 흐름 을분석했다.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현실임에도 오성망혼진이 분명하기에 놀람은 컸다. 시간을 두고 기다린 이유는 가주께서 나섰기 때문이다. 본가의 신녀로서 가 주의 의사에 반목해선 안 되었다. 하지 만 오성망혼진은 해체되지 않고 견고해 지고 있었다. 시간이 더 흐른다면 가문 전체가 영향을 받아 상상도 못 할 참사 가 벌어질 것이다.
‘내가 나서야 할 때야.’
가주의 명이 있어야만 움직일 수 있 음에도 시즈나는 결단을 내렸다.
가문을 위한 일, 가주는 그 다음이었 다. 한편으로 예언을 무시한 가주의 선 택에 한숨이 흘렀다. 위험을 자초한 격 이 되었다. 그러나 이미 결정이 났고 선 택은 이루어졌다. 이제 와 되돌린다 한 들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7]자.’’
“예, 신녀님.”
시즈나와 옥녀구검은 방문을 나와 가 주가 계신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 성망혼진만 해결되면 남은 일은 가주의 몫이다.
한데 신녀각을 나서고 얼마 되지 않 아 멈춰 서야 했다.
“이런 일이!”
눈앞에 펼쳐진 참혹한 광경, 피로 물 들어버린 지옥도를 방불케 한다. 사방 으로 선혈이 튀었고, 찢겨진 고깃덩어 리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졌다.
원형을 잃어버린 참혹한 시체는 신녀 각을 지키고 있는 가문의 무사들이다.
저벅.
자세히 듣지 않으면 모를 발을 내딛 는 소리.
시즈나는 간과하지 못했다.
쿵쿵쿵!
그녀에게는 그 어떤 발걸음 소리보다 크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뇌리를 강타 하는 마왕의 걸음걸이처럼, 오싹한 한 기를 몰고 왔다. 벚꽃이 피는 시기임에 도 얼어버린 혹한의 지대를 연상케 한 다.
부르르!
시즈나는 몸의 떨림을 추스르며 대상 을 찾았다.
돌아서자 두 눈이 마주했다.
씨익!
상큼한 미소를 짓는 젊은 사내.
그는 이 집안의 식솔처럼 너무도 자 연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이 질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네즈미가를 거부하는, 아니 짓밟으려는. 아무런 기 세를 흘리지 않으면서도 분위기를 형성 하는, 그야말로 흉악한 포식자.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그런 종류의 두 려움을 선사했다.
“당신이군요.”
“신녀라더니, 감이 좋군.”
“악마를 몰라볼 신녀는 없을걸요.”
“뭐, 틀린 말은 아니지.”
본인들 마음대로 악마로 규정하는 선 입견일 수도 있으나, 정우는 딱히 부정 하지 않았다. 인간은 양면성을 지닌 존 재다. 무조건 선하지도, 무조건 악하지 도 않았다. 그리고 오늘은 악마라 불려 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주변에 낭자한 선혈에 시즈나의 아름 다운 얼굴이 구겨졌다.
“당신 정도면 굳이 죽일 필요는 없지 않나요.”
“굳이 살릴 필요도 없지.”
정우는 불나방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발톱을 내밀면 사정을 둔 적이 없다. 그 것이 설령 미물에 불과할지라도.
“사람의 목숨을 장난으로 여기는군 요.”
“그러는 너희들은?”
“우린 당신과 달라요.”
신녀가 무사들의 죽음을 탓하자, 정우 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하면)로(맨스)남(이하면)불(륜)이 라고 했던가, 적반하장의 극치다. 만약 무림대회를 통한 네즈미가의 암계를 파 악하지 못했다면 과연 어떤 사태가 벌 어졌을까? 수많은 사람이 광기에 젖어 목숨을 잃었을 테지.
“먼저 장난을 친 주제에 나를 탓하다 니, 세상 참 편하게들 사는 것 같아.”
“그래서 똑같은 짓을 하겠다는 건가 요‘?”
설령 그렇다 해도 살육으로 되갚는 행위는 정당하지 않다는, 아름다우신 신녀다운 발상이었다. 그러면 당신들도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의미를 내포한 다.
큭
정우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개소 리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자신을 잘못 봐도 한참을 잘못 봤다.
“똑같이 갚아주면 안 되지. 그걸론 성 이 차지 않거든.”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로군요.” 시즈나는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저자에게선 그 어떤 살의나 광기도 전해지지 않는다. 마치 평소와 다르지 않은 분위기다. 그래서 더더욱 무섭게 다가온다. 이대로 저자를 방치하면 네 즈미가의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암흑 그 자체였다.
-네즈미가, 풍전등화.
며칠 전부터 신성(神聖)이 강력한 예 지를 보내왔었다. 가문의 생사가 갈릴 중대한 위험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를 가주에게도 수차례나 경고했다.
시즈나는 저자에게서 풍기는 위험한 기운이 본가를 뒤덮고 있음을 느꼈다.
“본가를 위해서 당신을 막겠어요.”
“좀 전엔 꽤 거슬렸거든. 지금이 훨씬 좋아. 그러니 인간인 주제에 신을 사칭 하진 말라고.”
신내림을 받았다고 해서, 신이 되지는 않는다.
정우는 신을 숭배하는 성향과 거리가
멀다. 인간이 굳이 신이 될 필요도 없고. 설령 신의 뜻이라 할지라도, 방해가 된 다면 가만두지 않는다.
“당신은 오늘의 악행을 반드시 후회 하게 될 거예요.”
“어차피 돌이키기에는 늦었잖아. 날 회개시킬 생각은 하지 말라고, 불신지 옥 따윈 믿지 않으니까.”
시즈나의 눈빛이 투명한 유리알처럼 차갑게 빛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신녀라 부르기에 층분한 선의가 담겨 있었다면, 지금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 가라앉은 기 세만큼이나, 공간의 변화가 무쌍하다.
파팟
신녀의 의지를 받은 옥녀구검이 원형 의 검진을 그리며 정우를 막아섰다.
겉으로는 그저 아름다운 춤사위로 보 이기만 한다. 그러나 그 안에 서려 있는 기의 흐름은 무시무시하다. 옥녀구검은 단순히 신녀를 수호하기 위한 검이 아 닌, 네즈미가 최강의 검객이었다.
-자신검류(子神劍類) 멸살식, 파쇄(破 碎).
가공할 기세가 실린 9개의 검이 어느 새 수없이 많은 검영(劍影}을 만들어내 었다. 검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가는 즉 시, 믹서에 갈아버린 고깃덩어리처럼 분쇄시킨다.
쏴아아앙!
고막을 괴롭히는 검의 기이한 파장이 공간을 장악하기에 일단 펼쳐지면 빠져 나갈 수 없도록 강제했다.
.아공간 오픈, 전생 소환.
칼을 잡은 정우의 입가에 미소가 맺 힌다.
“그럼.”
수많은 검의 그림자를 향해 물러서기 는커녕 달려든다.
“미친!”
자신검류의 전승자인 옥녀구검은 모 두 강기를 구사할 내력을 지닌 초극의 검객이었다. 하물며 합격을 이룬 상태 다. 검진 안으로 비집고 들어올 생각을 하다니,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퍼퍼퍼펑!
도와 검이 부딪치며 과격한 파장을 일으켰다.
검영이 터져나갈 때마다 생성된 폭발 의 파편이 방향을 무시하고 퍼져나가며 전각을 베어내고 부수었다. 이어서 단 단함이 상대적으로 발휘되고 있는 놀라 운 광경이 펼쳐진다.
추아아앙!
교차할 때마다 기파가 터져나온다.
대지에 10미터에 달하는 구덩이를 완 성하며 거죽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가루가 되어 홑어져 내린 돌가루와 흙 먼지가 혼합되어 희부연 먼지를 형성했 다.
“어떻게?”
“알면서 왜 그래.”
옥녀구검은 믿어지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 폭발적으로 늘어난 칼의 그림자가 검의 그림자를 일일이 받아내 고 분쇄시켰다. 마치 거울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방어 였다.
“그래도 이건 좀 의왼데.”
정우는 단순히 똑같은 수준의 도초를 펼치지 않았다.
교차하는 순간, 옥녀구검의 동요를 읽 어내고 빈틈을 찔렀다. 심장을 노리고 도격을 부렸건만 튕겨져 나왔다.
“특이한 속성을지녔군.”
옥녀구검은 물론 대결을 지켜보고 있 던 신녀마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단 한 번의 겨룸으로 상대의 속성까지 읽 어내다니, 실로 범상치 않은 통찰력이 다. 하지만 무엇보다 대단한 건 저 측정 불가해의 영역에 다다른 강함이었다.
‘어디서 이런 괴물이, 절대 살려둬선 안 될 자야.’
옥녀구검의 합공을 막아낼 자는 네즈 미가 내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었다. 하물며 합공을 이토록 간단히 막아낼 자는 가주를 제외하고는 없다. 그렇다 면 저자의 강함이 가주에 필적한다는 의미가 되었다.
“한눈팔면 곤란하지, 대결이 끝나지 않았다고.”
정우의 목표는 옥녀구검이 아닌, 신녀 다. 애초에 옥녀구검과 오랜 시간 겨룰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저들이 가 진 특이 속성은 제법 까다로웠다. 이런 식으로 도격을 막아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뭐, 너무 쉬워도 김새지.”
대결에 홍이 돋은 정우의 기세도 변 화를 이룬다.
우우웅!
칼과 하나가 된, 도신합일(刀身合一>을 가볍게 이루었다. 전생이 청아한 도명 (刀鳴)을 토해내며 운율을 완성했다.
아름답지만 서늘한 앙상블.
사사삭!
현현보를 밟았다.
정우의 신형이 공간, 공간에 잔상을 남긴다. 9개의 잔상은 저마다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이를 단순한 잔상으로 치부한다면 목숨을 보장하기 힘들 것이 다.
채채채채챙!
잔상에서 전광석화와 같은 도격이 뿜 어졌다.
대경실색한 옥녀구검이 재발리 막아‘ 섰다. 검과 도가 맞물리며 시끄러운 쇠 의 울림과 거센 파격을 만들어내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잔상의 도격은 속도를 가속시키며 파 괴력을 늘려갔다.
마치 이래도 막을 수 있느냐고 시험 을 하듯.
쩌어어엉!
이중의 무형도강, 도(刀)안에 또 다른 무형의 도(刀}를 실어 중첩시킨다. 이와 함께 기경(氣硬)을 발산시켜 상대방의 검에 충격을 준다.
주춤!
칼로 이룬, 일종의 내가중수법의 전사
경.
충격을 받은 옥녀구검의 칠검이 비틀 거렸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정우는 도 세를 집중시켰다. 막아서는 걸 용납하 지 않을 거대한 흐름이 형성되었다.
파아아앙!
천지를 개벽할 웅대한 파괴력이 활화 산처럼 분출되어 방향을 가리지 않고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일대를 소란스 럽게 울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건물 을 와해시켜 버렸다.
파스스스!
제어되지 않은 파편에 닿기만 해도
분해되는 무지막지한 광경이 펼쳐졌다. 소요에 휩쓸린 생명체는 어이없이 소멸 되었다. 파괴력은 겹겹의 원을 그리며 분화구를 완성했다. 일본 특유의 감성 이 담긴 신녀각이 폐허로 변하는 데 오 래 걸리지 않았다. 신녀각 주변에 핀 벚 꽃이 찢겨지며 공허하게 휘날린다.
소요가 채 끝나기도 전, 정우와 옥녀 구검이 조우했다.
“하나가 아니라 둘, 아니 셋인가?”
정우는 옥녀구검의 속성이 단순하지 않음을 직시했다.
무형도강을 막아낸 수법은 호신강기
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일종의 자연발생적인 보호막 같았다. 하나 홀 로 펼친 속성으로 막아내기는 어렵다. 어쩌면 하나가 아닌 둘 이상의 속성이 결합하여 완성된 형태일 수 있었다.
“내력 소모도 거의 없고.”
지속적이면서도 소모가 되지 않는다. 실제로 호신강기는 막대한 내력을 소모 시킨다. 공격이 최고의 방어라는 이유 가 여기에 있었다. 반면에 옥녀구검의 호신강기는 내력을 소모시키지 않는다.
“패시브 스킬 같은 거군.”
지속스킬과 같은 종류의 속성. 어쩐지
연이어 쉴 틈 없이 살인적인 공격을 퍼 붓고 있는데도 막아서고 있었다.
“방어와 회복, 홉수를 결합했나 보 군.”
3명이 방어, 3명이 회복, 3명이 충격 을 홉수한다. 9명이 모여 완전한 형태의 검격을 이루고 있었다. 쉴드와 비슷하 면서도 좀 달랐다. 이들은 3명이 전체 방어력을 높여주고 있었다. 그러니 1명 의 방어가 아닌 9명이 동시에 방어를 한 격이 된다.
“당신 정말 무서운 자군요.”
신녀는 실체의 진실을 꿰뚫어 보는
사내의 날카로운 통찰력과 신속한 대응 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자가 한국에 있을 거라고는……. 어쩌면 총관 의 실패가 이자와 관련이 있을지 몰랐 다.
“당신이 본가의 대업을 방해했군요.”
“맞아. 그러니 이제부터 본문의 대업 을 막아보라고.”
너희만 대업이냐, 나도 대업이다.
정우의 응수에 시즈나는 미간을 찌푸 렸다. 막을 수 있으면 막으라는 자신감 이면에 수많은 살생을 대업으로 포장해 버렸다. 그럼에도 반박하기 어려웠다.
본가의 대업도 수많은 피를 봐야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