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장 차도염장지계 (5)
꼬박꼬박 대답은 하는 정우의 건성건성 에 유호진은 짜증이 치밀었다. 애초의 계 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남자란 족속은 집안을 건드리면 자존심이 상해서 감정을 드러내는데, 이 자식은 그런 기미조차 보 이지 않는다. 오히려 작금의 관계를 보다 더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버러지 같은 자식이 아닐 수 없었다. 더더욱 하라 와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 꼈다. 이대로 포기에는 그녀가 너무나 아 깝다. 그녀에게 어울리는사람은 자신이었 다
“그녀의 상대로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그럼요. 저만한사람도 없지요.”
“주제를 망각해도 유분수지, 스스로를 안다면 물러서는 게 그녀를 위하는 일이 네.”
“망각을 하든, 주제 파악을 못하든, 개 인의 자윱니다. 오늘 처음 본 분이 무슨 자격으로 물러서라 마라 하는 겁니까?”
“그녀의 팬으로서 걱정이 돼서 하는 소 리다”
걱정돼서 살림 차리게?
유호진은 물러서지 않고 정우를 닦달했 다. 관심을 보이지 않기에 말투가 사납게 변하면서 거세지고 있었다.
“여기.”
하라가 음식을 가지고 돌아오는 걸 본 유호진은 급히 말투를 바꾸었다. 그녀 앞 에서는 젠틀한 이미지를 취했다. 결혼을 반대할 때 자기 자식에게는 좋은 부모이고 싶은 것처럼. 이상하게 남의 자식은 함부 로 대하는 꼴사나운 부모들이 많다. 제 자 식이나 단속할 것이지.
“저 사람이 너한테서 꺼지라는데.”
“뭐?”
“내 깜냥이 너하고는 어울리지 않는다 더라”
“뭐라고?”
유호진은 말문이 막혔다. 설마 방금 한 말을 배알도 없이 고자질을 할 줄은 예상 못 한 것이다. 그것도 각색을 더해서, 표현 도 저급했다. 모두가 들으라고 대놓고 말 을 했기에 다른 이들의 시선까지도 집중시 켰다.
“오해가있는?…!”
“이런 꼴 보려고 너와 사귄 건가, 자괴 감이든다”
유호진의 해명을 뒤로 하고, 정우가 먼 저 자기 할 말을 꺼내들었다. 딱히 자괴감 이 들지는 않지만 살을 붙여 주고 있었다. 없는 사실도 아니고. 좀 전의 대화를 녹음 까지 해놓았다. 정중한듯하지만, 비꼬는 뉘앙스가 철철 풍긴다 부글부글!
하라는 속이 상했다.
별것도 아닌 잡것이 남의 남자 친구를 헐뜯고 있었다. 하물며 자신을 생각해서 굉장한 인내심을 발휘했다 평소의 정우였 다면 유호진의 눈 코 입은 자리를 이탈해 버렸을 것이다. 고마운 줄 모르고, 끝까지 아닌 척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그러니 더더욱 얄미울 수밖에
“이봐요, 당신이 뭔데 우리 정우한테 그 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 거죠? 팬 이라면서 그래도 되는 건가요?”
“하라 양 당신처럼 고귀한 분이 이토록 하찮은 대접을 받는 걸 용납할 수 없어서 그런 겁니다?”
“요즘 세상에 귀천이 어디 있다고 그래
요. 그러니 이만 신경 끄시죠!”
유호진도 화가 치밀었다
설마 이렇게까지 격하게 나올 거라고 는 예상하지 못했다. 설령 말이 좀 심하더 라도, 그녀를 도와주기 위해서다. 대한그 룹의 금지옥엽이 심부름이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 회장이 안다면 실망이 클 것이 다 씨익!
하라를 앞에 세운 정우는 다툼을 즐겼 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구경이 남의 집 불구경과싸움이라고 하지 않던가. 제3 자의 관점에서 여자 친구를 응원했다.
‘이 자식이!’
정우의 태도에 유호진은 머리뚜껑이 열 리는 기분이었다. 자기 스스로는 아무것 도 하지 못하는 주제에 여자를 앞세워 호 가호위(孤假虎威)하고 있었다. 배알이 꼴리 지 않는다는 거짓말이었다. 저런 하찮은 놈에게 빠져 허우적대는 유하라에 대한 감정도 싸늘하게 식었다. 비천한 놈과 어 울린다면 비천한 년에 불과했다.
‘이연놈들이 감히!’
정우의 웃는 얼굴이 유호진의 시선을 잡아챘다
하라는 냉철했다. 보지도 않고 말만 듣 고 판단하진 않는다. 상대방의 생각을 읽 어내기 위해 신안을 발동했다
유호진도 공략 목표를 잃진 않았다. 하 라와 싸워봤자 여러모로 불리했다. 그럴 바에는 정우를 짓밟아 놓는 게 이득이다.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개처럼 비굴하게 처 맞는 광경을 봐야 했다.
“이 일은 너와 나의 일이다. 여자 뒤꽁 무니에 숨어서 모른 체할 심산인가?”
“저는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습니다. 회장님하고도 약속을 했고요.”
유호진은 뒤에 선 자들에게 눈짓을 보 냈다.
그들은 일반 경호원 차림을 하고 있지
만, 실제는 현무길드에 소속된 유니크다. 유진그룹은 현무길드와 협약을 맺고 있었 다. 두 사람은 길드 내에서도 실력자에 속 했다. 어지간한 유니크는 적수가 되지 않 는다
‘이자가, 정말!’
하라는 기도 안 찼다. 유호진이 대체 뭘 믿고 이렇게까지 나대는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다. 겉으로 보기에만 얌전할 분이 지, 정우는 포식자다 건드리지 않아도 자 체적으로 터지기도 하는 화약고인데, 그 앞에서 부싯돌을 켜고 있었다. 무엇보다 사람을 깔보며 내려다보는, 차별적인 시선 이 고까웠다. 저런 자와는 엮이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들이 뭐라도 되는 양 거들먹 거리는 행위가 역겹다.
“지금 뭐하자는 거죠?”
“저자는 나에게 모욕감을 줬습니다 그 러니 하라 양은 비켜 서 주시지요. 아니면 꽤나 곤란한상황이 발생하게 될 겁니다”
스스로 와서 모욕을 받고, 그 모욕을 풀겠다니.
하라는 기도 안 차는 적반하장을 경험 하고 있었다. 재벌 후계에 대한 좋지 않은 여론의 시선이 왜 그런지를 적나라하게 보 여주는 장면이다. 자기들의 생각과 조금이 라도 틀리면, 상대를 깔아뭉개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다. 이는 일우그룹의 채현우 와다르지 않았다.
“모욕이라니요, 지금 억지를 부리겠다 는 건가요? 계속 이렇게 나오면 대한그룹 과 척을 지게 될 거란 걸 명심하세요!”
“끝까지 저런 놈을 감싸겠다는 거요? 실망이군!”
“놈이라니요, 말조심하세요!”
“자기 위치를 망각하지 마라”
유호진도 이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 다. 재계 후계자간의 파티였다. 이 안에서 사고를 치면 본인에게도 치명타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저 얄미운 놈을 손보지 않 으면 편히 잠을 자지 못할 것 같았다.
얌얌얌.
하라와 유호진이 싸우든 말든, 정우는 식사에 열중했다. 와인을 마시며 여유로 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저놈대체 뭐야?’
‘방송에서도 이상하더니.’
‘컨셉 아니고.’
‘진짜돌아이네!’
언성이 커지면서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 들은 하라와 호진의 대치상황보다, 남의 집 불구경을 하고 있는 정우에게 시선이 더 쏠렸다. 호진의 평소 성향을 알고 있는 부류는 대충 인과를 파악했다. 유진그룹 의 후계자로서 여자를 후리는 데는 정평 이 나 있었다. 그런 호진에게 있어 하라는 새로운 먹잇감이었다. 그룹 내에서도 대한 그룹과 혈연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눈치였 기에 더더욱 탐이 날수밖에.
‘재밌겠네.’
‘누가이기든 상관없지.’
‘저놈은 나도 맘에 안들어!’
‘부럽기는하다 하라짆아’
참석한 자들은 하라와 호진의 다툼을 말리진 않았다. 그보다는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았다. 싸우 든 말든, 자신들에게 피해만 오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더욱이 대한그룹과 유진그룹 이 다투게 되면 자신들로서는 나쁘지 않 았다. 적당히 줄을 대며 소모전만 해도 이 득이라는 계산이 바탕에 깔렸다.
‘실물로보니 별로네.’
‘남자나 꿰는 여우같은 년!’
‘콱망가져 버려라!’
‘얼굴아니면 별거 없지.’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했던가.
겉으론 안절부절못하며 걱정하는 눈빛 들이다. 그러나 속은 남자들보다 더 잔인 하고, 살벌했다. 하라만 없어지면 연회장 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꿈도 야무진 망 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자기 여자조차지키지 않을셈이더냐!”
오물오물
정우는 피식거리며 식사를 할 뿐이다. 주제파악이 아직 되지 않았네. 하라가 비 록 전투형 유니크는 아니더라도, 상위 등 급이다. 화나게 하면 곤란한 사람은 유호 진이다. 신경 건드리지 않는 편이 이롭다.
“계속하겠다는 건기요?”
“저런 비겁한 자식을 옹호하겠다는 거
요?”
하라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이렇 게까지 말이 안 통하는 위인이 있을 줄은 몰랐다. 상대도 상대 나름이었다. 정우를 자극하는 건 둘째 치고, 지나친 무례였다. 도대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이런 마음을 먹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선을 넘지 마세요, 그러면 더 이상은 참지 않겠어요.”
“넘으면 어쩔 거지?”
유호진은 현무길드의 장진호, 장진구 형제를 믿었다. 그들은 백호 길드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는 유니크다. 특히 그들의 속성인 기억조작과 공간 결계는 아주 유 용했다. 속성만 잘 사용하면 탁 트인 공간 에서도 유린이 가능하다. 종종 써 먹었고, 여태 아무런 탈도 없었다. 같이 즐기기도 했었고.
멈칫!
장진호, 장진구 형제가 막 속성을 발휘 해 공간을 차단하려고 할 때였다. 그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육신의 통제가 엇나갔다. 영혼이 의지를 배반했다
‘?…이럴수가!’
‘?…상위 유니크!’
하라가 유니크라는 사실은 대외적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마인드컨트롤 능력자일
줄은 몰랐다 하물며 그들은 유니크 6급 이었다. 6급 유니크의 정신을 통제하다니, 일반적인 상식을 불허했다.
- 일루젼.
부창부수(婦唱夫隨).
여자가 주장하면 남자는 따른다. 부창 부수(夫唱婦隨)에 대한 요즘 시대의 의견을 적극 반영했다. 정우는 말리지 않고 거들 었다. 환상마법으로 통제된 공간에 전혀 다른, 시각적 효과를 완성했다
‘엄청난데.’
하라를 열 받게 한대가는 컸다.
“?…뭐야?”
유호진은 당황했다. 장씨 형제가 자신 의 두 팔을 우악스럽게 잡았기 때문이다. 빠져나가려고 하지만, 요지부동이다.
“너…… 무슨 짓을 ?… 컥!”
유호진은 육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특별 한 장치를 해놓은 아이템을 착용하고 있 었다. 그러나 육신을 보호하는 데만 적용 이 되었다. 하라와 같은 마인드컨트롤 속 성 능력자에게는 무용지물이다.
“뭣 같은 놈이 우리 정우한테 뭐라고 한 거야! 죽어, 새끼야!”
남자도 자기 여자 욕하면 열 받지만, 여 자도 자기 남자 욕하면 열 받는다 좋게 말 로 했을 때 그냥 갔으면 서로 피곤하지 않 았을 텐데, 하라의 싸대기가 유호진의 양 뺨을 인정사정없이 두드렸다. 손이 매서웠 다. 채찍처럼 뺨에 쫙쫙감긴다 흥부의 싸 대기를 갈기고, 맞은 편 뺨까지 노리는 놀 부마누라처럼.
“하라파이팅!”
한 성질 하네, 그래! 그렇게 성질 낼 때 는 내야화병 안 생긴다고.
정우는 정성껏 응원을 했다. 남자는 여 자하기 나름이라지만, 여자도 남자하기 나 름이었다. 요조숙녀인 척해도 자신과 10 년을 같이 했다. 초록은 동색이라는 말이 왜 나왔겠는가. 사랑하면 서로 닮기 마련 이다.
쫘악 쫘악!
살?풀이를 하듯, 호진을 시원하게 뭉개 놓은 하라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래선 안 되었었다 괜한 짓을 했다는 후 회가 밀려왔다. 저 망할 남친이 자꾸 성질 을 긁어 대기에 참다못 해 폭발하고 말았 다. 말려도 시원찮을 판에, 판을 깔아 주 기까지 했다 후후후
정우가 해맑게 웃고 있었다.
너도 나와 동류라는. 유 회장이 알면
아주좋아할 대형 사고다
“사고쳤네.”
“ 망할!”
약점 제대로 잡혔다.
하라는 잡혀 살 기구한 운명을 강하게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