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무화(武花) (4)
“그 녀석은 어디 갔지?”
“여유가 넘치는군. 뭐, 알아도 상관은 없겠지. 마법사는 피곤하다며 자러 들어 갔다”
“?…뭐가 어쩌고저째!”
“마법사는 내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벌었
을분이다”
진영화는 마법사의 영악함에 치가 떨려 왔다
지금까지 마법사의 손바닥 안에서 놀 아난 꼴이다. 그런데 결계를 뚫었다고 회 심의 미소까지 지었으니, 얼굴이 달。}오를 만했다.
‘망할놈 똥통에 빠져 익사할놈!’
오늘 운세가 지독히 사나웠다. 조카의 뒤를 캐다가 된통 걸린 꼴이다. 자칫 문파 간의 다툼으로 번질 우려가 있었다. 무문 연합에 대한 시선이 좋지 않은 지금, 무림 대회를 반전의 기회로 삼으려고 대대적인 홍보를 하는 중이다.
‘문주가 알면 날 죽이려고 할 텐데.’
문제는더 있다
금강문주는 오늘의 일을 알면 더 좋아 할지 모른다. 얼씨구나 달려들 테고, 전면 전올 펼쳐야 할 수도 있었다. 금강문이 두 렵지는 않으나, 진영화에겐 여러 모로 짜 증나는 현실이었다. 어떤 선택을 해도 불 리하긴 매한가지다.
“여기서 물러서면 어쩔 거지?”
“오늘 일이 영상과 함께 만천하에 공개 되겠지. 알다시피 사람들은 가십거리를 아주 좋아하지, 물고, 뜯고, 씹고 남아나 지 않을걸.”
“ 영상이라고?”
“담벼락에 설치된 카메라만 있다고 생 각한건 아니겠지?”
“?…물론이지.”
일이 아주 더럽게 꼬이고 있었다. 변장 을 풀지 않았다고 해도, 신룡문의 절기를 유감없이 결계에 뿌려댔다. 영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누군지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 앞에서 아니라고 발뺌을 해 봤자 무의미 했다
“신룡문의 무화가 하이퍼 팩토리의 기 밀문서를 빼돌린 산업스파이가 되어 있을 테고.”
“그런 되도 않는 거짓말을 믿을 것 같 아!”
“믿고 안 믿고는 두고 보면 알겠지.”
“무문연합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본문 올 음해하겠다는 거야?”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몰라도 순진하 진 않군.”
진영화가 둔한 성격이기는 해도, 눈치 가 없지는 않았다. 일문의 장로를 단순히 무력만 보고 봅지는 않는다. 만약 오늘의 일이 외부로 새어 나가게 된다면, 신룡문 은 엄청난 타격을 받을 것이다. 도해문과 같은 취급을 받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여 러모로 상황이 억울하게 되었다 변명해봤 자통하지 않을 게 번히 예상되었다 후후
웃고 있는 혹금단주를 보자, 진영화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어쩌면 이 상황을 유 도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너 설마‘?”
“오해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군. 당신의 조카는 제 발로 찾아욌으니까”
“아니라면 마법사가 어떻게 본문의 무 공을 가르친 거지?”
“눈썰미가좋거든, 이를테면 굳이 진의
를 살피지 않아도 원류를 찾아가는 눈을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되겠지. 본문도 꽤 도 움을 받고 있거든.”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구 나.”
“과정은 중요하지 않아, 오해를 한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니까:”
진영화는 제 발등을 찍었음을 직시했 다. 마법사에게 가르침을 받은 상황만 보 고, 오해를 하고 설레발을 친 건 본인이었 다. 더욱이 수단이 잘못되었다. 확인만 하 면 된다는 안일한 마음이 발목을 잡고 말 았다.
빠드득!
화가 치민다. 애송이라 치부한 녀석에게 된통 당하고 말았다. 맘 같아서는 깽판을 치고 싶으나, 주도권은 흑금단주에게 있었 다. 저놈만 처리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보 는 눈이 너무 많아서 손올 쓰기가 망설여 졌다.
‘그렇다 치고, 이 새끼 계속 반말이네. 그리고 뭐, 나이를 먹어!’
진영화로서는 근래에 처음 들어보는 망 언이었다 반백년이 되어가는 와중에도 여 전히 동안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아파트 반상회에 가면 항상 미모를 자랑하건만.
살짝 과장하면 20살이라고 해도 믿을 주 름 없는 백옥 같은 피부를 지녔다.
“원하는 게 뭐야?”
“어째서 그리 생각하지?”
“아니라면 진작움직였겠지.”
“머리는 달고 사는군.”
“너 자꾸 반말로 지껄일래? 어른한테 그러면 나중에 지옥 간다:”
“당신 말대로 지옥을 가더라도 나중의 일이지.”
정우는 그딴 건 신경 쓰지 않았다 저승 사자나 염라대왕도 상대가 될 거란 기대 는 하지 않는다. 데려갈 수 있으면 데려가 봐라. 그날로 저승사자는 염라대왕과 더 불어 명부에 이름을 올려야 할 것이다. 지 옥이라 해도 방해하면 부셔버리면 그만이 었다 하고자 한다면 언제든 이 두 손으로 이루었다.
하아아.
낭패한 기색이 역력한 진영화다. 뭘 어 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사 면초가란 이럴 때 쓰는 말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무화가 20년만 젊었으면 나를 능가했을 거라더군.”
“어디서 들었는지 몰라도, 꽤나 정통한
소문이구나. 그런데 왜?”
“궁금하더군, 과연 그 말이 사실인지를 말이야”
“잠깐! 이런 개 같은 상황을 만든 이유 가 고작 나하고 붙어 보려고 한 거야?”
“고작이라니, 무인에게 싸움보다 중요 한게 더 있나?”
“?…미친놈!”
진영화는 혹금단주의 계략에 소름이 돋았었다. 나이를 떠나, 상황을 주도적으 로 끌고 나간 과정은 칭찬을 해도 부족하 지 않았다. 본문의 무인이었다면 상을 주 어도 아깝지 않다. 해서 만만하게 보지 않 았건만, 제일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혹금단주는 금강문의 무인이다 금강문 의 기조가 무엇인가? 닥치고 싸움이었다. 흑금단주가 비록 금강문주가 다르게 머리 가 잘 돌아가기는 해도, 모든 건 싸움을 위한 명분이었던 것이다. 막 들이대는 스 타일의 금강문주와 다른 종류의 돌아이였 다
“그문주에 그문도구나.”
“그래서 문주님을존경하지.”
진영화는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감당하기 벅찬 치밀하고 주도면밀한 계 략이 숨어 있는 줄 알았다 자신을 이용해 서 신룡문에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을 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싸우기 위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란다. 굳이 이 러지 않아도 대련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상대해 줄 수 있건만, 사람을 곤욕스럽게 만들었다.
팔릴 대로 팔렸다고 해야 하나.
‘1차원적인 두뇌는문주님하고, 빼박이 군.’
금강문주는 돌려서 생각하지 않는다. 숨은 뜻 같은 걸 찾지 않은 부류다. 굳이 찾으려고 머리 싸매며 고생을 할 바에는 주먹부터 뻗고 본다 그러니 문주 앞에선 중의적 표현 따위는 쓰지 않는 편이 이롭 다. 괜히 이빨 잘 까다가 다 털리는 수가 있었다.
“이렇게 된 마당에 내가 왜 네놈하고 싸 워야 하는것이냐?”
“튕기시겠다. 들리는 소문하고는 다르 군.”
“나를 뭐로 보고, 이유도 없이 싸우지 는 않아”
“그런 분께서 남의 집은 아무렇지 않게 막 넘는군.”
진영화는 재차 깨달았다
말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이놈 도 그렇고, 마법사도 그렇고. 화를 돋우는 건 매한가지다. 삼 일 내내 불닭볶음면만 삼시세끼 처먹은 기분을 만끽하게 해주었 다. 속이 쓰리다못해아프다.
‘캅사이신 탕에 빠져 뒈질 놈 같으니라 고!’
진영화는 혹금단주의 꿰임에 넘어가 싸 우고 싶진 않았다. 싸움을 마다하는 성격 은 아닐지라도. 이용당하는 기분은 더러 웠다. 하물며 어린놈의 함정에 빠져 허우 적대기까지 했는데, 끌려 다니고 싶진 않 았다. 화룡점정(ffi龍點情)이라는 말처럼 마 지막 피날레를 장식하지 못하면 과정은 의미가 없어지는 법이다. 놈과는 절대 싸 우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녀는 손을 풀었다.
“지지고 볶든 네 맘대로 해.”
“날 이기면 없었던 걸로 해 줄 용의가 있었는데, 싫다면 하는수 없지.”
혹금단주가 미련 없이 돌아서려고 하 자 진영화의 손이 번개처럼 뻗어 나왔다. 극성에 도달한 절정의 금나수법, 신룡포 박수(神龍捕 M 手)가 혹금단주의 팔을 잡아 챘다? 확실히 손은 눈보다 빨랐다.
착
정우는 자신의 팔을 잡은 진영화를 보 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네가 잡지 않고 배 길 것 같으냐 라는 의미가 담겼다. 마치 잡 을 줄 알았다는 뉘앙스가 철철 넘친다. 그 러나 미소와 달리 입은 반대였다.
“이거 놓으시죠, 진장로님.”
“..2*
좀 전까지만 해도 건방지게 반말올 찍 찍 던지던 놈이 갑자기 존대를 하고 있었 다 예우 차원과는 다르다. 서로 갈길 가자 는 그 모습이 어찌나 얄미운지, 정말로 한 대 치고 싶어졌다. 살면서 이토록 얄미운 놈들은 처음이었다.
“하자, 싸우면 될거아냐”
“싫다면서요.”
“?…(이 개자식을)…… 우리나라엔 삼세번 이란 아름다운 미풍양속이 있지 않느냐.”
“전 무식하고 미친놈이라 그런 고풍스 러운 양식 따윈 모릅니다.”
와 이놈쪼잔하네!
잊지 않고 기억해서 끄집어내고 있었다. 진영화는 후회막심이었다. 차라리 그냥 싸 웠으면 사정을 하진 않아도 되었다. 원래 부터 꿀리고 들어가야 하는데, 더 꿀리고 말았다. 잡고 싶지 않은 팔을 잡음으로써 주도권 싸움은 게임오버였다.
“원하는 게 뭐야? 다들어주면 될 거 아
냐?”
“제가 알기로 진 장로께선 문파에 아무 런 힘이 없는 걸로압니다만.”
정곡을 찔렸는지, 진영화의 언성이 커 졌다. 가장 아픈 부위를 제대로 저격당했 을 때의 반응과 같았다. 울컥! 하는데 진 심! 한 대 칠 번했다. 부르르 떨리는 주먹 이 인내심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누가 그런 유언비어를 퍼뜨렸어. 본문 은 나 아니면 안 돌아가거든!”
“그렇게까지 대단한 분인 줄은 몰랐습 니다”
이 망할 놈■이 하다하다 빈정거리기까
지
화를 폭발시켜 주는 데는 대종사의 반 열에 올라섰다. 금강문의 무인과는 상종 하지 말라는 문주의 당부가 이제야 실감 이 갔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화병을 부 추겼다. 이놈들과 대화를 하고 있자니, 평 소 건강했던 육신에 암이 걸릴 것 같다.
‘강 대주가 경계해야 한다고 하더니, 상 종못할놈이었어!’
그녀는 몰랐다. 오늘이 평생 그녀의 발 목을 잡아끄는 족쇄가 되리라고는. 만약 알았다면 사정하지 않고, 차라리 그냥 떠 났을 것이다. 괜히 정우의 팔을 잡는 바람 에 조건만 늘어나고 말았다
“이왕이면 쌍방조건을 걸고 하시죠.”
“날 아주 물로 봤구나, 좀 전의 내가 전 부라고 판단했다면 큰 오산이야!”
승산이 있지 않고서야, 유리한 상황에 서 쌍방 조건을 걸진 않는다. 조건이 더 많 아지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한 수 위 임을 주장하고 있었다. 깔보지 않고서는 꺼내기 힘든발언이었다.
빠직.
진영화로서는 당연히 자존심이 상할 수 밖에 없었다 좀 전의 상황이야, 누구든 걸 려들 수 있었다 반면에 작금의 현실은 무 인의 자긍심을 건드리는 행위였다. 도저히 참아주기 어려웠다. 무공을 익힌 무인으 로서 단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명감을 불태웠다
“바로시작하시죠.”
“후회하게 될 거다.”
진영화의 이가는 소리가 결계 안올 소 름돋게 했다. 처녀가 한을 품으로 오뉴월 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하나, 아줌마가 화 나면 서리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줌마파 워의 무시무시한 기세가 매섭게 회오리친 다 후아아앙
그럼 뭐하나?
혹금단의 누구도 무화의 분노를 두려워 하지 않았다. 본인 딴에는 후회하게 만들 어 주겠다고 선전포고를 하나, 실상 이용 당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단주가 어 떤 사람인데, 저딴 허세가 통할까
“자리 만들어라”
“예, 부단주.”
혹금단은 마치 정해진 일을 하는 베테 랑근로자처럼, 결계를 강화했다. 이 안에 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빨리 잊는 편이 정 신건강에 이로웠다. 봐봤자, 희생양만 더 늘어나는 꼴이었다.
“남녀일언중천금이라고 했지요, 아마.”
“이제와 남녀평등을 외쳐봤자 의미 없 거든!”
하긴, 의미 없는 일이긴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