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팽가풍운 (5)
“가문으로 위협하시겠다. 뭐, 인정해. 팽가는 대단한 가문이야 한데, 지금 당장 네 목숨을 구해주진 않을 거다. 왜냐고? 내가 이 거리에선 거의 무적이나 다름없 어. 설마 아무 이유 없이 거리를 좁혔다고 생각하진 않을 테지, 팽가의 대공자?”
정우와 팽세운의 거리는 6m가량이다. 대화를 흐}기에는 먼 거리지만, 무인에게는 가까운 거리였다. 그리고 말했다. 이 거리 에서는 무적이라고. 무인으로서의 역량을 간접적으로 과시했다고 볼 수 있다
‘봅아야한다, 나는 가문의 대공자다!’
팽세운은 이런 치욕을 받고 가만히 있 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몸을 옥죄는 혹금 단주의 공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의 육 신에서 풍겨 나오는 살의는 거짓이 아님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적으로 승산 이 많지 않았다. 목숨보다 자존심을 택하 느냐 일생의 고비였다 스륵!
힘을 주었던 손아귀를 풀었다. 그러면 서 팽세운은 한 발 물러섰다. 분노했던 두 눈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오늘은 물러서지:’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겠다는 건가.”
정우는 끈질겼다. 사람을 보고 덤벼야 한다. 시작을 하면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서 놔두지 않는다. 벗어나고 싶으면 자존 심을 구겨야 할 것이다.
“변명하진 않겠다”
“그런다고 순순히 보내줄 거 같아?”
“아니면 날 죽여라”
팽세운은 제공권마저 내려놓으며 무방 비가 되었다. 할 수 있으면 죽여 보라며 역 으로 도발까지 했다
“쳇! 김샜네.”
정우도 더 나아가진 않았다 사방에 깔 려 있는 시선은 물론, cctv도 있었다 무방 비인 팽세운을 죽이면 팽가에서도 가만있 지 않을 것이다
‘참을성은 있군.’
팽세운을 죽일 생각이었으면 말을 길게 늘이지 않았다. 단칼에 목을 베어 버리면 끝나는 일이다. 팽세운의 성향을 시험해 보기 위해 도발했을 뿐이다. 이렇게까지 성질을 긁었는데도, 현실을 인정하고 받 아들이는 성향이라면 확실히 팽세기보다 는 자질이 뛰어났다. 사흑문과의 전투에 서 팽세기가 공을 세웠다고는 해도 현재로 써는 정실부인의 자식인 팽세운이 좀 더 유리한 편이다.
“다음에는 오늘처럼 되지 않을 거다”
“기대하겠습니다”
정우의 말투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싸 움을 걸 때와 평상시 변화의 격차가 어마 어마했다. 건드리지만 않으면 위험한 상황 은 발생하지 않을 거란 협박이기도 하다. 얌전히 지낼 테니 너도 얌전히 있으면 된 다는 식이라, 팽세운의 속을 한 번 더 긁 어주는 효과를 제공했다.
휘
매섭게 돌아선 팽세운의 얼굴에는 악 마상이 그려져 있었다. 살면서 오늘과 같 은 굴욕은 처음이었다. 설령 상대가 초명 학과 남천명을 제압한 강자라 해도, 자신 은 가주가 될 몸이다. 굴욕을 절대 잊지 않을것이다
‘내 반드시 가주가 되고 말 테다. 방해 가 된다면 설령 혈육이라도 가만두지 않 을 것이다.’
팽세운의 불타오르는 의욕에 정우는
히죽였다. 어차피 양립하기 어려운 관계다. 팽 가주에게도 의사 표현을 해놓은 상황 이라, 팽세운과는 대립 관계가 될 운명이 다
‘남의 집 골육상잔은 지켜보는 맛이 있 지.’
정우는 팽세기가 순탄하게 팽가의 주인 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온실 속의 화초 는 아무리 강해도, 엄연히 한계가 존재했 다. 밟히고, 또 밟히며 자란 야생의 잡초 를이기지 못한다
‘멍석을 깔아줘도 못하면 필요 없는 존
재일뿐이지.’
정우는 팽세기의 분전을 기대하고 있었
다
아마 오늘 이후로 팽세운은 어떻게 해 서든 팽세기를 모략하거나 죽이기 위해 애 를쓸 테고. 팽세기는살기 위해서라도 최 선을 다해야 했다. 이렇듯 정우는 수하의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나만한 주인도 없지.’
수하들의 능력 향상을 위한 정우의 배 려였다
정우는 몸져누워 끙끙 앓고 있는 이극
을병문안했다
빈손은 아니다 총관이 준 카드를 긁었 다. 과일과 음료수를 기본 베이스로 깔았 다. 남의 카드라고 쓰는 데 주저함이 없기 는 했다. 카드 쓰는 맛이 쏠쏠하다. 긁으 면서 영수증은 됐다고 했다. 아무 데나 막 버려 도용의 우려를 키웠다
‘카드는 역시 남의 카드야’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고 했다. 보 이스피싱의 대국에 왔으니 그에 합당한 마 인드를 갖추어주었다. 문화의 상대적인 관 점을 인정했다.
침상에 누워 있는 이극은 온몸이 붕대
로 감싸여 있었다. 얼굴만 겨우 내밀고 있 는 상태다. 밥도 제 손으로 먹지 못해 떠먹 여 주어야 했다. 손가락 마디의 관절을 정 성스럽게 부숴준 결과였다. 제법 신경을 썼기에 치료는 가능했다 정우가 안부를 물었다
“몸은좀 어떻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는 혹금단주를 보고 있자니, 이극은 침상에서 벌떡 일어 날 뻔했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당사자가 태연하게 몸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혹 여 자신이 잘못한 게 있는지 살피고, 증거 인멸을 노리는 것처럼.
‘앓느니 죽지.’
화딱지가 나서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 음이 굴뚝같으나 어쩌랴, 이미 한 배를 탔 다. 내리고 싶다고 해서 내릴 수도 없는 처 지다. 그랬다가는 가주에게 살아남지 못 했다
‘실로 경이로운 타격술이 아니던가:
인간의 육체를 정확히 알고 있다 해도, 이토록 완벽하게 잘 부수기는 어렵다. 조 금이라도 빗나갔다면 이극은 내일 뜨는 해를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뻔했다 그래서 더 혹금단주의 능력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주의 의심을 지웠다는 사실만 으로도 충분히 대단했다.
‘기절해 있는 동안 혈검을 죽였을 줄이 야’
혹금단주에 대한 원한으로 이를 갈던 남천명이었다. 절치부심한 혈검의 검은 그 어떤 이보다 날카로웠다. 그런 혈검을 단 일 합에 저세상으로 보내 버린 혹금단주 의 무력에 경탄이 홀러나왔다.
“당분간은 다리를 절어야 하겠지만, 걱 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삼공자가 가주가 되면 낫게 해 드리겠습니다.”
듣기에는 위로 같다
내면은 좀다르?다
팽세기를 가주 위에 올려놓지 못하면 평생 다리를 절며 살 수도 있다는 의미다. 화가 날 만한 상황이기는 하나, 이극은 현 실을 받아들였다. 그의 말대로 팽세기가 가주가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 한다. 가주만 된다면야 작금의 고통은 얼 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하나, 앞으로 가야 할 길이 가깝지만은 않았다. 가주는 여전히 건재했다. 그의 세 수 60에 불과하다. 100세 시대에 살고 있 으며 무인의 수명은 더 길다. 금분세수를 하지 않는 이상 긴 시간일 수도 있었다.
“가주는대공자와 다릅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어딘 가에 빈틈이 있겠지요.”
이극은 눈치가 빨랐다. 흑금단주는 이 해관계가 확실한 자였다. 서로 주고받을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는 묻고 있었다. 그 간 가주의 명올 도맡아 처리했던 자신에 게. 동지로서 비밀을 공유하자는 토렌토 와 같은 마음이다
“하고싶은 말을 하시오.”
“어딥니까?”
“나도 짐작만할뿐입니다”
“짐작한 바라도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
다:’
이극은 가주의 의도를 알고 있다. 그러 나 이번 프로젝트는 확실하지 않았다. 접 근 자체도 어려울뿐더러, 알려고 했다가는 가주의 눈밖에 날수도 있었다
“가주는 의심이 많습니다. 자신의 눈 밖에서 벌어진 일올 믿지 않습니다. 그러 니 모든 비밀은 이 세가 안에 있을 겁니 다”
“등잔 밑이 어두웠군요.”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설령 안다고 해 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세가의 심처일 확률이 크다. 그 안으로
접근이 가능한 부류는 가주의 허락 하에 있는 자이며, 수는 5명을 넘지 않았다
“층분합니다. 뭘 만드는지 짐작이 가기 도하고요.”
“짐작을 한다니요?”
“왜 이러실까, 자꾸 이러면 동업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극은 마른침을 삼켰다. 혹금단주는 속을 들여다보듯 말하고 있었다. 숨긴다고 될 일이 아님을 직시했다
“알려지면 꽤나 곤란하겠지요.”
“곤란하기는 하겠지만, 그것만으론 안
됩니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단주는 정말로 무서운 사람이군요.”
“하지만 신의는 어기지 않습니다. 먼저 배신하지 않는한.”
이극은 충성을 맹세한 가주에게 배신 당했다. 단 한 번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고 개처럼 일했던 자신을 대파멸진과 함께 버 렸다. 아이러니한 현실은 그 실수의 주역 이 눈앞에 있는 흑금단주라는 사실이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아군이 되는 순간이 었다.
“그럼 몸조리 잘하고 계십시오. 아, 팽
세운이 이를 갈고 있을 겁니다.”
“그건 또 무슨소립니까?”
언제부터인가 말만 하면 핵폭탄을 안겨 주었다. 이극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 인 간의 마인드를 감당하기가 버겁다
“저를 찾아왔더군요.”
“혹시.”
“ 맞습니다”
설마 하면서 물어본 이극은 골이 지끈 거렸다. 대공자가 죽은 이상 팽세운에게 도 기회가 왔다. 그간 야심을 드러내지 않 으면서 세력을 모으려고 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소가주 가 되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게 분명하다.
그렇기에 골치 아프게 되었다. 이럴 때 일수록 삼공자에 대한 견제가 들어오지 않도록 해야 했다; 가주가 건재한 이상 당 장 소가주를 선택하지는 않을 텐데. 왜 일 을 사서 만들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 는다
“어째서 자중하지 않은 것이오?”
“팽세천도 아니고, 팽세운조차 이겨내 지 못하면 가주가 된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싶다 면 그만한 자격은 있어야 합니다.”
이극은 반박하지 못했다. 지극히 타당
하고 합리적이었다. 대공자가 아니라면 삼 공자도충분히 자웅을 겨룰수 있다. 그러 나 세력 싸움에서 밀릴 가능성이 컸다. 이 를 보완하려면 지금부터라도 세를 불려야 한다.
‘쉬지를못하게 흐W.’
표면적으론 팽세기를 몰아붙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달랐다. 팽세기를 올려 놓지 못하면 이극은 살아남지 못한다. 최 선을 다해야만 하는 동기 부여는 확실하 게되었다
‘반드시 이루고 말 테다. 무슨 수를 써
서라도’
이극의 활활 타오르는 열의를 보자, 정 우는 만족했다. 기회를 얻은 이극과 팽세 운의 싸움이 참으로 볼 만할 것이다.
‘팽 가주는관망할테고.’
팽 가주는 자기 살을 깎아 먹는 골육상 잔에도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사자는 새 끼를 벼랑으로 몰아 살아남는 자식을 키 운다는 말이 있다. 팽세천과 달리 팽세운 과 팽세기는 경쟁을 벌이지 않았다. 둘 다 아직은 어린 용도 아닌 도마뱀에 불과했 다.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며 능력을 검증 한 자식에게 소가주의 지위를 줄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한밤중.
달이 구름에 가려 어둠이 짙다.
사사삭!
어둠을 뚫어내는 또 다른 어둠이 있었 다 그는한줄기 바람이 되어 심처를 향해 파고들었다. 사방의 눈을 피하는 흐름은 모래에 스며드는 물과 같았다. 실로 절묘 한 잠영술이 아닐 수 없었다 능히 궁극에 이른 잠영술이라 할 만했다 그림자는문 앞에 멈춰 섰다.
■언락(Unlock)
마법의 무시무시한 기능이었다. 어떤
문이든 마법을 사용하면 열 수가 있었다. 문을 살짝 열고 닫은 후에 안으로 들어갔 다
‘지하에 이런 구조를 만들어 놓다니, 대 단하군.’
최소 지하 8층의 깊이었다. 지하에 또 하나의 세가가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세 가를 지을 때부터 이런 구조가 아니라 점 차 넓혀 갔다는 점도 대단하다. 비밀을 유 지하기 위해 수십 년의 시간을 들여 완성 하였을 것이다 지하는 밝았다 놀라운 점은 빛의 사각
이 없다는 것이다
어둠과 시야각을 활용했던 정우는 방 법을 바꾸었다. 투명화 마법을 걸어 육신 을 감추고, 주변과의 동화를 극대화했다. 무공과 마법이 하나가 되어 보다 완벽한 은닉이 되었다.
1층에서 7층까지 내려왔다. 마지막 1층 이 남았는데, 여기까지다. 침투하려고 한 다면 가능하겠지만, 혼적이 남게 되는 구 조였다
‘이것만 해도되겠지.’
팽가의 치부를 완벽하게 드러내면 안 된다 그럼 곤란하다. 어느 정도 팽 가주를 혼들어 놓을 수 있을 정도만 흘려야 한다.
그리되면 누구도 믿지 않는 사태가 발생하 게 될 것이다
‘시간이 누구 편일지 궁금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