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음모중첩 ⑴
식사와 동시에 술판이 벌어졌다
금강문주가 주도하는 술판이다. 남자 들은 각오를 해야 했다. 남녀노소를 가리 지 않는 이호극의 술판은 호기와 객기가 난무하는 가운데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왕년에 술 좀 마셨다고 자부해봐 야좋은꼴못본다.
“본격적으로마셔 봅시다.”
..…본격?”
이호극은 현재 많이 배려하고 있었다. 남의 집에 와서 예의를 지키고 있다 주장 했다 그도 그럴 것。], 본인은 대접으로 마 시면서 상대방에겐 맥주잔올 주었다. 처 음에는 모인 남자들도 대접으로 마실 수 있다고 했지만, 세 잔 마시고 나서부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술판의 싱거움에 이호극은 아쉬움이 컸다. 주도의 기본은 주고받음인데, 일방 통행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정우야 네가와야지.”
“저는 미성년자입니다”
며칠 전에 같이 100L의 술독을 아작 냈으면서, 손사래를 치면 믿을 놈 없기 마 련이다.
이호극에게도 요 근래 들어본 말 중 가 장 웃겼다. 짜식이! 배꼽 떨어지는 소리를 잘도 하고 있었다. 개그까지 섭렵하려는 것이냐
“지나가는 개는 개소리라도 하지, 네가 그런 말올 해도 되는 거냐”
“근거 없는소립니다”
정우는술판에 끼지 않았다. 이호극과
쌍벽을 이루는 주량을 자랑하나, 부모님 앞에서 할 짓은 아니었다 남자들이 술판을 벌일 때, 여자들은 다 과에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정우는자리에 앉아서 대화에 끼었다
“고모는 아까부터 왜 말이 없어요.”
“몸이좀 안좋아서.”
정우의 파상공세를 당한 고모는 실어 증에 걸린 사람처럼, 기운이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함부로 말을 했다가는 또 다시 공격당히기 십상이었다 정우가 약점 을 쥐고 있어서 합죽이가 되었다.
‘주먹만 안들었지, 거의 빈사상태로 처
맞았나 보네.’
하라는 정우 고모의 빈사지경에 유치 원 시절의 공남주가 떠올랐다. 활기차고 말 많았던 공남주가 현실적인 도시여인이 된 계기가 바로 정우였다. 과거에 비해 입 이 무거워지면서 말 걸기도 어려웠다. 최 근 통화에서도 열 마디를 넘지 않았었다.
-남주처럼 갈군 거야?
-나 그런 사람아니다
-너그런 사람이야
-욕심 부리지 말라고 정중히 타일렀을
분이야
-정중히는 개불, 이 팩트폭행자야!
하라는 정우의 갈굼 수법을 잘 알고 있 었다 이 자식은 절대 없는 말을 지어내지 않는다. 현실의 팩트를 끌고 와서 갈구기 에 반박은 불가능하다. 받아치려고 해도 정우의 정보력을 벗어나기도 힘들다 정보 수집능력이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데다가, 억하심정을 가지면 피곤한 건 당사자다.
-사실대로 말을 해도 욕을 먹는구나:
-그러게 적당히 해야지. 넌 진짜중간이 없어!
-그 애매모호함이 오히려 불행을 자초 하는 거다.
-세상사 혼자 살 건 아니잖아 그러다가
고모가 연락 끊으면 넌 좋겠어?
-홈, 정 그렇다면고려해 볼게.
고모의 활동중단이 거슬리기는 해도 대화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는 말 이 왜 나왔겠는가. 김 여사와 성 여사, 그 리고 끝판 대장 할머니까지 있으니 수다의 르네상스를 꽃 피웠다. 요즘에 이슈가 되 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끌어 가다 보니, 자연히 대화의 중심에 정우와 하라가 있 었다.
정우는 하-셀럽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으며, 하라는 원체 유명했으니 당연했 다. 유 회장의 방문으로둘 사이가 보다 더 확실해졌다. 집들이까지 왔으면 상견례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살림은 언제 차릴 거니, 정우야?”
“10년 후에도 변하지 않는다면요.”
할머니의 짓궂은 질문에도 정우는 얼굴 색 하나 변하지 않고 숨기지 않고 밝혔다. 효린이와 약속을 한 시간이기도 하다. 10 년 후에도 정우의 나이는 30살을 넘지 않 았다. 하라도 벌써부터 결혼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연예인으로서 활동도 바 쁘고, 한창 전성기다. 사랑도 중요하지만 일도 중요했다
“좀늦는거아니니?”
“30살도 빨라요, 요즘은 다들 서른 중 반에 하잖아요.”
어른들은 멋모를 때 일찍 결혼하라는 말을 하신다. 그래야 이것저것 따지지 않 는다고.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현명한 선택하고는 거리가 멀다. 20대에 결혼해 서 행복한 가정을 꾸린다면 더할 나위 없 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 그리 호락호락한 가.
특히 가정이 생기면 개인의 삶이 보장 받기 어렵다. 결혼은 서로의 희생이 뒷받 침이 되어야만 한다. 희생을 받아들일 인 성과 용기가 필요하다. 과연 그 어린 나이 에 그만한 인성과 재력을 갖출 수 있는 사 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또한 근래엔 결혼이 늦어지고 있다. 근 본적인 이유는 현실이다. 자기 먹고살 기 반도 마련되지 않는데, 덜컥 결혼을 한다 면 과연 행복할 수 있올까?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돈이 없으 면 그만큼삶이 힘들고, 분쟁이 생긴다
“결혼이 인생의 전부도 아니고. 삶을 더 즐겨봐야죠. 어머니.”
“요즘 같은 시대에 꼭 결혼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결혼에 대한 본능은 남자가 더 강하다. 삶이 윤택할수록 결혼을 하고 싶어 한다. 반면 여자는 돈이 있으면 굳이 결혼을 하 지 않아도 된다 혼자서도 삶을 즐길 수 있 는 반면, 남자는 홀로 늙어갈수록 인생이 처량해지는 편이다. 취집이라고 인터넷에 서 떠들어도 비율을 보면 답은 나와 있다:
“여자 인생 뒤웅박 팔자라고, 좋은 사 람 찾기도 어렵고요.”
“진짜 그래요. 겉멋만 들었지, 속은 빈 껍데기고요.”
정우는 여자 위주로 흘러가는 대화 속 에 있었다 객관적인 시선에서 볼 때, 여자 들이 말하는좋은사람은잘생기고, 배려 해주고, 돈도 많아야 했다 하지만 현실에 서 그런 사람은 극소수였다. 대부분의 남 자는 저 중에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다행 이었다
‘여자만 탓할 일도아니지.’
남자도 호불호가 분명하다. 나이의 많 고 적음과 상관없이 여자에게 바라는 건 외모니까. 인성은 그다음이었다. 여자들 의 성형을 무조건적으로 비판해선 안 되 는 이유다. 이것에 반기를 들고 진정한 사 랑을찾을수 있다면 박수를 쳐 주어야한 다
‘외모를 신경 쓰지 않는다라 자신 없는 데.’
정우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성인군 자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여자의 외모는 물론 성격도 보고, 배경도 봤다 그것이 나 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본인의 능력이 된다면충분히골라봐야했다
‘남 탓할 처지가 아니구나:
강천에게 여자의 외모와 배경을 따진다 고 타박했으면서, 정작 정우도 사내의 본 성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내마음은변치 않아’
하라는 10년 후에도 변하지 않을 확신
이 있었다. 정우에 대한 마음은 확고했다 막말로 정우만한 사내를 찾기도 어렵다. 유치원 때부터 점찍었건만 탐하는 여자들 이 많아 걱정이 되었다. 차라리 지금 당장 결혼을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들기도 했다. 그러니 장래의 시어머니 한테 점수를 따 놓을 필요는 있었다.
“어머니! 전 결혼하면 여기 들어와서 살 거예요. 요리도 배우고 있고요.”
“요즘 애들 같지 않게 참해, 어쩜 이렇 게 말도 예브게 할까 그런데 괜찮겠어?”
“저는 가족이 많은 게 좋아요.”
하라의 애교에 김 여사가좋아죽는다
그러나 정우는 단칼에 하라의 말을 잘 라 내었다.
“저는 결혼하면 독립할 겁니다:”
“정우야 난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그리고 결혼 후 명절 에오지 않아도돼.”
“그게 무슨 말이야?”
“각자집에가자는말이지.”
명절에 본가에 와서 고생을 자초할 필 요는 없다고 봤다. 그리고 정우도 처가로 가서 불편한 자리에 있고 싶지는 않았다. 각자의 집으로 가서 편안히 명절을 보내고 돌아오는 편이 효율적이었다. 애써서 심력 낭비하고, 고생을 자초할 이유는 없지 않 은가. 명절 날 덕담이라도 하면 좋겠지만 다들 돈 학력, 직업, 결혼을 비롯해 원치 않은소릴 한다
“그게 무슨가족이야?”
“결혼하면 너와 나만 가족이지.”
김 여사에겐 하라가 며느리이자 가족이 지만 하라에게 김 여사는 솔직히 남이 아 닌가. 그건 반대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 다. 괜히 고부간에 갈등을유발시키는 소 재가 될 뿐이다 차라리 시작부터 선을분 명히 그어 놓고, 둘 만의 행복을 찾는 편이 낫다 정우의 현실적인 결혼관에 수다로 꽃 을 피우던 공간이 급 경색되었다 요즘 시 대의 결혼관하고는 어울리지만 아직은 인 정받기 어려웠다.
-왜초를 치고 그래.
-그러니까, 너도 적당히 해. 굳이 그럴 필요 없어. 어머니에게 잘 보인다고 너 와 내가 잘되는 것도 아니고.
-속에 있는 말을 끄집어 낼 필욘 없잖 아.
-심력 낭비하지 말라는 거야
-명절에 오지 않으면 전은 누가 붙이 고?
-너 시키지 않아. 정 없으면 내가 하면 되니까. 전붙이는게 대수야.
정우는 명절 날 하라에게 음식을 시킬 생각이 전혀 없다 정 돈과사람이 없으면, 자신이 직접 하면 되었다. 여자를 데리고 와서 효자 노릇하려는 것부터가 비이성적 인 판단이었다. 단, 부모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 현금 500만 원은 달로 계산해서 꼬 박꼬박 보내줄 심산이다 덤으로 추궁과혈 과 수발들 흑금단을 보내드릴 계획이기는 하다 물론 내 가족으로 건드리면 피 본다 는건여전했다
-너무 똑 부러져서 좋기는 한데, 욕먹기
도 좋겠다
-모두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건 피곤한 일이야.
-그 피곤한 일을 나는 매일 하거든.
-그거야, 네가선택한일이니까그렇지.
하라에게도 정우의 결혼관이 나쁘진 않았다. 둘 만의 공간을 확보하고, 각자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행복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은 혼자 살아가지 못 한다 결혼은 서로의 가문과 가문이 맺어 지는 일이기도 했다.
“어머니, 정우 말 신경 쓰지 마세요. 혼 자 결정하면 다 되는 건가요. 그리고 우리 다른 얘기해요. 정우가 요즘 진짜 핫해요. 방송 보셨죠?”
“봤지.”
“그거 다 제가 어렵게 연출한 거예요. 얼마나 얄밉도록 게임을 잘하는지, 방송 을모르더라고요.
“좀 전에도 그랬듯, 정우가 고지식한 면 이 있지.”
할머니와 김 여사는 아들의 결혼관에 층격을 받았다. 모신다고 빈말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대놓고 같이 살지 않겠다고 하니 서운한 감정이 있었다. 물론 모신다 고 해도 거절할 생각이었다. 자신들도 나 름 현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 시어머니였으 니까:
자연스럽게 정우의 뒷담화가 진행되었 다
"모든 게임을 한 번에 성공하니, 피디가 되레 당황하던데요.”
“융통성이 없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 이 없어.”
“아시잖아요, 강 피디가 보통 피디가 아 닌 거요. 그런데 웃긴 건 시청률이 너무잘 나와서 한번 더 섭외해달라고요청이 쇄 도하고 있어요 다른 방송국도 그렇고.”
정우와 하라의 조합이 화제성은 물론
시청률도 대박을 쳤다 한 번 더 나와 달라 고 청탁이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정우에게 있어 방송은 역린이었 다
‘그날의 굴욕을 갚아 주기는 해야 하는 데.’
하라는눈치가 굉장히 빨랐다 허튼수 작을 부렸다가는 쫌생이로 낙인이 찍힐 수 있었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도록, 방송 으로 복수를 해줘야 한다
‘조만간’
정우의 의욕에 하라는 한기를 느꼈다
‘불안한데.’
하라는 괜히 긁어서 부스럼올 만든 게 아닌가 내적 갈등을 유발했다 분위기 전 환 삼아 정우를 잘근잘근 씹었을 분인데,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 고 여기서 기 싸움에서 졌다고 백기를 들 면, 잘못을 인정하는꼴이 된다
‘내가 뭘?’
하라는 아직도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 하지 않았다. 방송에 나왔으면 예능의 취 지에 걸맞도록 행동을 해줘야 한다. 그것 이 출연자의 본분이었다. 반면 정우는 지 나칠 정도로 완벽했다. 너무 완벽해서 예 능이 아니라 다큐가 될 뻔했다. 작금의 하-셀럽을 만든 장본인으로서 다음에도 또다시 굴욕올 안겨 주리라 다짐했다
‘이게다 널 위해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