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 장
염화방문 (1)
빠득빠득!
핏발이 선 두눈 꽉쥐어진 두손 모골 을 송연하게 만드는 이를 가는 소리. 공간 은 무겁게 가라앉은 채 분노에 젖어 있었 다. 어둠에 사로잡힌 짙은 적막을 깨우는 살의가 팽배했다.
그들은 남겨진 자들이다
문파의 수장과 주 전력을 하루아침에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혹시나 하는 기 대를 해봤으나 연락은 오지 않았다 끝내 돌아오지 않는 길로 떠났다 처음에는 불신했다. 그분은 확실하지 않은 일엔 나서지 않는 천부적인 승부사 이자 전략가였다. 99%임에도 1%의 불신 이 있다면 발을 딛지 않는다
“납득할수 없어, 이게 납득이 되는 일 이야!”
“안됩니다”
“그렇다면 연유가뭐겠어?”
“함정입니다.”
“그래, 그렇지 않고선 불가능해.”
누가 봐도 완벽한 계획이었다
자리를 위협받는 사람의 불안한 심리를 파고들어 자중지란을 일으켰다 내우외한 을 겪은 이빨 빠진 호랑이 따윈 복속시키 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완벽했던 계획은 철저히 부서졌고, 문파 의 주력은 생환하지 못했다 남아 있는 전력은 다른 7대문파와 비교 가 되지 않았다. 전력에서 상대는커녕, 유 지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암암리에 소문까지 돌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문파의 존속도 어렵 습니다”
“결단이 필요할때입니다"
무문연합 내에서 분위기가 좋지 않았 다. 은연중 문파를 배척하고, 거리를 두었 다. 그간 왕래가 있었던 문파와 길드는 물 론 지역 무문에 소속되었던 중소문파도 이탈하고 있는 현실이다. 내부적으로도 중심이 사라지면서 흔들렸다 그는 복수를 다짐했다
“이 씹어 먹어도 시원찮올, 절대 그냥 두지 않겠어!”
“자칫 잘못되었다가는 후폭풍이 만만
치 않을겁니다”
“구렁이 무서워서 장못 담그는 것도 아 니고. 언제부터 주변 눈치를 봤다고 그래. 이번 일에 반대하는 자는 지휘고하를 막 론하고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하오나 본문의 자금이 넉넉지 않습니 다”
“자금이야, 들어오는 의뢰를 처리하면 되는거 아냐”
총관의 만류에도 신임 문주는 확고했 다 또한 모두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시 간이 흐를수록 자신들은 무문연합의 들 러리가 될 테고, 가지고 있는 이권을 빼앗 기게 된다. 그것이 중요했다. 단순히 복수 심 때문만이 아니다 그들은 힘의 단 맛을 보았다. 빼앗겼을 때의 상실감이 클 수밖 에 없다 화천문에서 손님이 왔다
방문자는 염화 권우화다. 그녀는 화천 문의 대표로서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 문주이하 화천문 서열 2위다 30살 도 되지 않아 문파의 핵심이 되다니, 고속 승진의 표본이었다. 후일 골드미스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여자의 지위가높을수 록 눈도 높아진다 자기 수준에 차지 않으 면노처녀가 되기 쉽다
문파 간 우호협정 사절로 파견된 그녀 는 금강문주와 총관에게 정중히 예를 갖 추었다
“문주님올 뵙습니다”
“홈.”
금강문주는 염화를 보고 편치 않은 심 경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일전 권영일이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 질긴 불덩어리 가 쉽사리 포기하지는 않았을 터. 꼼수가 눈에 훤히 보인다. 그러니 말투에도 가시 가 있었다. 꼬투리만 잡히면 되돌려 보내 고 말겠다는 부라림을 더해서. 요즘은 부 라림 신공이 예전만 못하기는 했다. 길거 리를 지나다니면서 시선만 줘도 개미떼처 럼 흩어졌건만 이제는 더 부라려 달랜다.
-문주님 부라려 주세요.
-저도요, 저도 부라림 받고 싶어요.
-꺄악, 나한테 부라렸어
여학생들의 거침없는 요구와 부끄러움 이 상기된 금강문주였다. 이게 좋으면서 도, 한편으로 떨떠름하다. 무인으로서의 기백이 사라져 버린 것 같다. 그리고 요즘 애들이 정상은 아니구나, 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아이돌의 기분을 만끽하고 있다.
“화천문엔사람이 없다디.”
소녀가 본문의 대외 업무를 제가 맡게 되었어요.”
“ 영일이는?”
명색이 일파의 수장인 화천문주의 이 름올 함부로 부르고 있음에도 염화는 표 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마치 그럴 줄 알았 다는듯,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예의를차 려 줄 거란 기대는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왔다고 해도 대접이 다르진 않을 테고:
염화는 본문에 있올 때부터 금강문주 의 본색을 간파했다 그는 가식이 없는 사 람이다. 자신의 성향을 있는 그대로 직설 적으로 표현한다. 겉으론 예의가 없어 보 여도, 속내를 숨기지 않기에 오히려 믿음 이 갔다 솔직히 금강문주라면 배신을 하 더라도, 선전보고를 한 후에 할 사람이었 다
“문주님은 폐관수련에 들어가셨습니 다”
“짜식이, 이제 좀 정신 차렸나 보구나. 그래도 수련은 네가 더 필요한 거 아니 냐?”
무림대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
무공이 한순간의 깨달음으로 벽을 넘 어서기도 하나 그런 경우는 드물다 소설 의 주인공처럼 기연이 다발로 오진 않는 다 대부분은 꾸준히 평소에 수련올 해 점 차적으로 늘려간다: 특히 염화와 같이 일정 수준의 경지에 올라서면 벽을 하나 깨기도 쉽지가 않다. 이것이 고수와 하수의 차이다. 하수가 현 재의 역량보다 10배가 강해져도, 고수가 하나의 벽을 넘어서면 제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따르지 못하기 마련이다.
현재 대회장 건설 공사가 진행되고 있 는 와증에도 설왕설래가 오가고 있었다. 지금까진 7대 무문에서 낸 정기회비로 처 리했지만 돈이 예상보다 더 들어가고 있 었다. 이 부분에 대한 권한 양도가 문제 시 되었다. 이는 다음 무문연합총 회의에 서 거론이 될 것이다
“시간을 내어 수련을 하고는 있지만 단 주에 비하면 많이 부족해요.”
“비교할상대가 아니다. 불필요한 심력 낭비야”
염화의 포부가 크기는 하나, 뱁새가 황 새 쫓아가다 가랑이가 찢어지는 수가 있 었다. 적당히 애들 노는수준에 맞추는 편 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목표는 크게 잡으려고 하잖아요.”
“잡아도 너무높게 잡았어.”
자칫 실력을 폄하하는 것처럼 들릴 수 도 있으나, 염화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문 파에서 드러낸 흑금단주의 전력은 그뎌에 게 충격을 주었다. 비슷한 나이라고는 생 각되지 않을 개세적인 무력, 까놓고 말하 면 나이를 떠나 실력 하나만큼 견줄 대상 이 많지 않았다. 그러니 아버지도 폐관수 련을 마다하지 않으셨겠지. 한국을 대표 하는 기존의 절대고수들도 방심하면 잡아 먹히기 딱 좋았다. 어떤 면에선 청출어람 의 표본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쩐 일이야?”
“아, 제가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했네
요.”
그녀는 서류를 내밀었다
받은 사람은 당연히 김 총관이다 이호 극은 빼곡하게 적힌 서류를 보자마자, 인 상올 찌푸렸다. 약관이 뭐가 이리 많은지, 읽다 보면 정신을 혼몽하게 만든다. 실속 보장 없는 보험약관 서류를 보고 있는 기 분이들었다
“협정저의 세부내용이에요.”
“서류 양식이 참좋구나?”
김 총관은 협정서를 꼼꼼하게 살폈다. 문주야 워낙 막눈이라 보기 불편하다고 투덜거리지만. 문파간의 협정을 위한규약 이었다. 당연히 세세하게 적어 놓아야 했 다
“해석하기에 따라 오해가 생길 부분을 수정했어요.”
“훌륭해, 이건 내가수정한부분이다”
김 총관은 서류를 염화에게 내밀었다. 각자 필요한 부분을 수정하고, 보완하기 로 약정을 맺었다 단어 하나의 차이로 뚯 이 완전히 달라지고, 해석이 자의적으로 변할수 있었다. 이런 모호한부분을 확실 하게 꼬집어서 보완해야만 했다. 그래야 차후, 서로 간에 오해가 생기지 않고 공평 하게 처리할수 있다
“사례를 참조했네요.”
“사소한 다툼이 결국에는큰 분란을 일 으키지. 아 이런!”
김 총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깜빡잊고실수한듯하다
김 총관이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한탄 을 하자 이호극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오 랜 세월 함께해서 그런지 몰라도 표정만 봐도 감이 왔다.
“어이쿠, 내 정신 좀 봐 손님에게 대접
“저는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
염화는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김 총관 의 화기가 돋은 얼굴을 보고 있자니, 거절 해선 안 될 무언의 압박을 받았다. 마치 자 랑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 어린아이처 럼 김 총관이 문 옆의 버튼올 눌렀다
드륵!
장식용, 즉 폼으로 만들어 놓은 서재가 좌우로 벌어졌다 그러자 카페를 연상시키 는 바리스타의 필수용품, 로스터기를 비 롯한 각종 기계가 눈에 들어왔다 짜잔.
어느새 복장을 착용하여 바리스타로
화한 김 총관이 로스팅한 원두를 그라인 더에 넣어 곱게 갈았다. 제대로 된 로스팅 이라서 그런지 커피의 진한향기가 집무실 안을 진동한다;
“아메리카노어떠냐?”
“?…좋아요.”
마다하기 힘든 박력이 있었다.
흥이 돋은 김 총관이다
커피를 끓일 때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정성이 깃들었다
‘일을그렇게 열심히 할 것이지.’
그것이 내심 못마땅한 이호극이다
저 기계 값이 꽤나 고가였다. 시중에서
파는 아무거나 대층 사면 될 것올 가지고, 이태리제 명품올 고집했다 시가로 3천만 원이며, 항공운송료까지 더해서 5천만 원 을 잡아먹었다 커피 가는 거야 공력을 사 용하면 얼마든지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을
“나보고 돈 잡아먹는 귀신이라고 그 지 랄을 떨더니.”
“누가 보면 공짜로 산 줄 오해하겠습니 다 저는 문주님과 달리 충분히 받을 만큼 일했고자격이 있습니다”
이호극도 김 총관의 노고를 마냥 무시 하진 않았다. 지금이야 정우가 있어서 총 관이 없어도 돌아가지, 예전이었다면 총관 이 손올 놓으면 금강문도 손올 놓아야 했 다. 그만큼 총관의 비중이 컸다. 문주는 없어도 되지만, 총관은 반드시 잡아야 막 말까지 떠돌았었다 그래도 그렇지.
“그걸 왜 내 집무실에 설치한 거야?”
“집무실을 쓰지도 않으면서, 남는 장소 활용했을 부입니다”
막는 말인데도 화가 난다
팩트 폭력 제대로였다
“총관실도 있잖0}.”
“공과사는구분해야지요. 거긴 공무를
집행하는 장소입니다”
집무실을 놀리고 있다는 말로 들려, 이 호극은 발끈했다. 다만, 틀린 말이 아니라 서 딱히 반박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문 주의 집무실보다 총관실이 넓고, 화려하 다
“안락한 노후를 보내려면 저처럼 고상 한 취미생활도 있어야 합니다”
“좋겠수다, 취미 생겨서.”
취미치고는 아마추어의 솜씨가 아니었 다 전문적으로 공부를 했고, 끊임없이 연 구했다. 바리스타 자격증까지 따 놓은 상 태다. 정년퇴직하면 금강문 옆에 카페를 차릴 심산이다. 금강문의 문도는 30% 할 인도가능했다
‘대단한분들이시네.’
염화는 금강문주와 김 총관의 티격태 격에 배우는 바가 컸다 끈끈한 유대와 신 뢰가 전해졌다. 그럼에도 서로의 약점올 물고 늘어지는 건 문화적 충격을 주었다. 지나치게 직설적이 어서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화천문이라면 상상도 못할 하극상 이 버젓이 자행되었다 그럼에도 금강문은 역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아이러니한 현실이기는 한데, 염화는 단순히 운만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금강 문주가 독고다이라고는 하나; 그의 무력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어쩌면 유니크 최고등급에 도달해 있을 수 있었다. 참사 의 그날 아버지가 받은 충격이 이를 대변 해주었다 이호극은 이왕 이렇게 된 거 본색을 유 감없이 발휘했다.
“미스터 김, 나는 다방 커피로!”
“그냥 주는 대로 처먹으시지요.”
“갖은 폼은 재면서 다방 커피도 안 되 고, 그게 뭐야?”
“이래서 싸구려는 상종하면 안 된다니
4.”
“뭐요! 거 말이면 단줄 아쇼!”
이호극은 커피의 맛을 모른다, 알고 싶 지도 않고. 입맛에 맞는 건 믹스커피였다. 프림하고 설탕 많이 든 커피를 선호했다. 괜히 향기 운운하며 입에 맞지도 않은 블 랙커피는 무슨 맛으로 먹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종종 회사 근처를 지나가다 보면 다들 손에 커피 하나씩 들고 다니며 마시는데, 그것도솔직히 맘에 안든다. 밥 보다 비싼 커피를 마시고, 최저 시급에 시 달린다고 앵앵거리면 사람들이 알아주나-
김 총관은 문주의 이죽거림에도 주눅 이 들기는커녕, ‘너는 짖어라, 나는 타겠 다’ 바리스타의 혼을불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