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 장 첩첩산중 ⑵
사바 사박
정우가 적풍과의 거리를 좁혔다.
적풍과 귀영 2조는 방심하지 않았다. 병기를 들어 만약의 사태를 대비했다. 언 제든 반격이 가능한 진형을 갖추었다.
“요란을 떨었네.”
정우의 시야는 귀영에게 향하지 않았 다. 그 뒤로 펼쳐진 공간에 있었다. 여기저 기 폭발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격전 을 벌였다 주장했다. 아쉽게도 혹금단이 제 역할을 잘해 줬다. 동생의 경호에 실패 한 대가를 치러주려고 했건만, 10분의 1 은 상쇄했다. 나머지 9만으로도 충분하긴 하지만, 시간을 좀 더 타이트하게 조절할 걸 그랬다.
정우의 시선이 적풍과 어긋나는 타이밍 에.
“죽어랏”
적풍은 사리분별을 못하는 자가 아니
다. 한가하게 말이나 섞을 때가 아님을 직 시했다. 무방비로 다가와 거리를 좁혔을 때야말로 기회다. 설령 죽이지 못하더라 도, 부상을 입혀 인질로라도 사로잡아야 했다.
공간을 좁히면서 적풍의 칼이 사선을 그었다.
슈우욱!
공간이 베어졌다.
베고 나아간 적풍, 칼의 극(戰)과 신(神) 에서 공허함이 전해졌다. 납득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궤적에는 놈의 목이 자리하고 있었다. 닿기 일보 직전까지도 회피할 낌 새가 보이지 않았었다.
“잡스러운 장난감이지?”
적풍의 등 뒤, 목소리가 들렸다.
담담함에 모골이 송연해진다
오싹.
정우의 오른손엔 특수재질로 만들어진 장갑이 끼워졌다. 장갑의 손가락 끝부분 에는 금속으로 날카롭게 벼린 손톱이 달 렸다. 살짝 까딱거렸을 뿐인데, 어둠이 베 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뚝뚝
칼날장갑에서 선혈이 떨어져 내렸다
크으윽!
적풍은 그제야 통증을 느꼈다. 시야가 흐릿해지는 가운데 내려다본 가슴, 찢겨져 나간흔적이 역력했다
“?…언제?”
적풍은 말 같지도 않은 현실과 마주하 고 있었다 눈에도, 감각에도 닿지 않았다. 게다가상처가 급속히 부패되면서 썩어 가 고 있었다.
“독이 있었네?”
몰랐다는 정우의 태도.
미안한 감정이라고는 한 홀도 실리지 않 았다. 대신 대국의 무인답게 받아들이라 는 무성의가 다분했다. 독이든 아니든 적 으로 만나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라 배 웠을 터. 생사가 걸린 전투에 공명정대함 을 바란다면 수명을 단축하는 행위였다.
‘극독이다’
적풍은 혈맥을 타고 들어오는 독을 공 력으로 억제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닿는 순간 마비가 되어 절명했을 맹독이다.
까아앙!
정우는 적풍을 외로이 방치하지 않았 다
나름관종병이 있었다.
싸우는 도중 한눈팔지 못하도록 강요 했다. 칼날장갑을 휘두르자 적풍이 칼을 들어 막았다.
주륵!
적풍이 밀리자 귀영 2조가 나섰다. 귀 영 개개인도 전투력이 뛰어난 편이나, 적 풍에 비하면 부족하다. 무엇보다 조장이 무너져 버리면 유기적 전투가 어려워진다.
촤자자작!
부챗살처럼 퍼지며 정우를 에워쌌다.
“놀아보자고.”
적풍은 퍼지는 독이 심상치 않음을 체 감했다. 그러나 공력융합을 활용하면 회 복이 가능하다. 문제는 놈의 움직임이다.
‘어째서?’
분명히 보였다. 궤적에 있었고, 칼을 휘 둘러서 충돌이 일어났다. 그런데도 불구 하고 격돌이 일어날 때마다 조원들의 육 신에 상처가 새겨졌다 적풍으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현실과 마주했다. 이대론 위험하다. 궤적을 무시 하는 놈의 공격을 무력화해야 승산이 있 었다.
탁탁!
정우의 칼날장갑에 핏물이 중첩되어갔 다
100합의 결전.
어둠을 투영한 달빛, 대지에는 선혈이
낭자했다. 찢겨진 슈트, 벌어진 상처에선 심장 박동에 핏물이 토해졌다 비틀!
시간이 지날수록상처는 많아지고, 귀 영 2조의 전력은 약화되었다.
적풍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네놈이구나!”
“눈썰미 좋네.”
적풍은 치를 떨었다. 시야에 보였던 궤 적 사이로 또 하나의 희미한 궤적이 있었 다. 모든 공격이 일격이 아니라 이격이었 다. 감히 따르지 못할 극한의 속도였다. 시 각은 물론 감각마저도 비틀어 버리는 속도 라면,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놈이 자신들을 가지고 놀았 다는 의미가 되었다.
빠드득!
적풍은 이를 갈았다. 살면서 오늘처럼 수치스러운 경험은 처음이다. 이대로는 죽 어도 편히 눈을 감지 못한다: 스적!
정우의 일수
격렬한 분노를 차갑게 식힌다. 마치 네 깟 놈들이 화내면 어쩔 거냐는 압도적인 무력시위다 까불 테면 까불어라, 나는 내 멋대로 하겠다는 의지가 분명하다.
크억
귀영의 수급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붉은 핏줄기가 분수처럼 쏟아지는 가운 데, 정우가 움직인다. 이제까지의 시간을 보상하듯 귀영의 숨통을 끊어내기 시작 했다. 톡톡, 닭 모가지를 비틀 듯 지나치게 쉬워 보이는 장면의 연속이었다
9 수
9명의 귀영에겐 1수 이상 필요하지 않 았다. 간극의 차이가 극명하다 못해 넘지 못할 벽이었다.
부르르!
조원들의 허무한 죽음을 적풍은 넋 놓
고 봐야 했다. 가지고 노는 수준마저도 벗 어나 있었다. 그러자 머리가 차가워지면 서 주변이 보였다. 곳곳에 남아 있는 발버 둥의 흔적, 특히 죽은 조원들의 몸 상태가 약간 이상했다. 1대 다수의 대결에서 나타 나기 어려운흔적들이 섞여 있었다 마치 같은 숫자로 싸운 듯한
“?…대체 무슨이유로?”
“알면 달라지냐”
“목적이 어떻든, 세가를 건드리고 무사 할 성싶으냐!”
“쯧쯧, 이래서 사람은 이기적인 동물이
라고 하는거야”
본인들의 행동에 대한 자각도 없이 피 해자인 척 행사를 하다니.
정우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굳이 놈들의 과거를 보지 않아도, 격돌만으로 읽어낼 수 있었다. 수없이 많은 피를 본 자 들이었다. 목적을 위해선 수단 방법을 가 리지 않았던 주제에 억울함이 가득하다. 자신들은 죽여도, 죽을 수는 없다는 건가.
“세가에서 네놈을?… 크억!”
적풍의 일갈은오래가지 않았다
“말 많네.”
말도 말 같아야 들어 주지, 개소리를 주 저리주저리 반복하고 있었다 정우의 우수가 적풍의 심장을 꿰뚫었
다
적풍의 가슴에는 공허함만이 남았다. 여전히 믿기지 않는 듯, 죽음을 인식하지 못했다
“요즘은 수작 부리는 놈들이 많아서, 안심을 못하겠단 말이야.”
확인사살은 필수, 죽음을 확인해야 했 다. 확인도 하지 않고 나중에 살아서 돌아 오면 불신하는데, 어리석은 짓이다. 죽일 때는 확실하게, 가급적 두 번 세 번 확인 해줘야 했다. 맘 같아서는 시체를 분쇄시 키고 싶은데, 흔적이 필요한상황이다.
‘자,이제 어찌할 거냐?’
정우는 돌아가는 상황이 꽤나 궁금했 다. 물론 어떤 판단을 내린다 해도 대비는 되어 있었다. 그러나 모두에게 이로운 결 과는 아닐 것이다. 이번 일에는 지극히 개 인적인 감정이 들어가 있으니까.
흑금단 2조가돌아왔다.
“ 제보는?”
“곧 올겁니다?”
우리만 알고 있으면 섭섭하니, 동네방네 소문은 기본이었다. 호들갑 떨고 있을 대 상을 상기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정우 였다.
이런 걸로 웃으면 안 되는데, 왜 좋을 까?
난 그런 사람 아닌데.
“차는?”
“대기시켜 놨습니다?”
“맛없으면 죽는다.”
“최고로 준비했습니다.”
흑금단 2조는 최선을 다했다. 단주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으면 하는 바람을 담 았다.
한국 드라마의 고질적인 병폐는 쪽대본
이다. 방송 후 대중의 반응을 살피며, 대
본을 수정하거나 바꾸기에 연습할 시간도 없이 촬영을 하곤 한다. 근래에 들어서 사 전 제작이 성공하기는 했어도, 쪽대본은 여전했다. 사전 제작은 성공하면 대박 나 지만, 실패하면 부담을 고스란히 제작사 가 떠안아야하기 때문이다.
하라는 쪽대본을 받고 촬영을 하고 있 는 중이다. 대본이 오전에 나오기로 되었 었는데, 저녁이 다 되어서야 완성된 것이 다. 여러 사람들이 촬영장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다 외웠어요.”
“역시 빨라 하라는 문제없겠어.”
“그래도 리허설은 해야 하지 않을까 요?”
“시간이 부족해, 당장 내일 방영해야 하 거든.”
하라는 대본을 외우는 데 천부적인 자 질을 갖추었다. 한 번 보면 토씨 하나 틀리 지 않고 대본 대로 수행했다. 아쉬운 점은 지나치게 대본 위주라 애드리브는 없다는 것이다. 간혹, 그 시점에 맞는 애드리브가 필요할 때가 있었다 새벽 2시에 촬영이 끝났다.
다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보다 앞선 건 배고픔이다. 점심 이후부터 먹지 않고 촬영을 하는 바람에 허기를 채울 시 간도 없었다. 야외촬영을 하다 보면 체력 소모도 평상시보다 더 많았다.
부릉!
차의 엔진 소리가 들렸다. 어둠을 뚫고, 3.5톤급의 탑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라마 연출을 비롯한 스태프 대부분 이 지쳐 있었다. 의도치 않은상황을바라 진 않았다. 피디가 조감독에게 한 소리 했 다
“저찬또 뭐야‘?”
“제가안 불렀는데요.”
“그럼 끝나는 거냐?”
알아보겠습니다.”
“정신 좀 똑바로 차려. 그래 가지고 감 독되겠어!”
조감독이 스태프를 불러 탑차에 대해 알아보라고했다 그러는 동안 탑차는 빈 공간을 찾아 섰 고, 윙-바디가 열리며 후각을 자극하는 냄새가 풍겨 나왔다. 탑차에서 내린 사내 가 하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웬 차이구”
“밥안 먹었다면서.”
“그래도 그렇지, 시키지도 않은 짓을.”
“밥은같이 먹어야맛있지.”
밥도 못 먹고 촬영하는 하라를 위해 정 우가 밥차를 가지고 왔다 밥차에 실린 음식 냄새에 신경이 날카 로웠던 피디를 비롯한 스태프들도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고는 말 못했다. 배에서 울 리는 정직한 뱃고동에 응할 수밖에 없었 다
“자자, 많이 있으니까 맘껏 드세요.”
“뭘 이런 걸 다, 고맙습니다.”
스태프 대부분이 정우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소개할 때 하라의 소속사 매니저 라고 했다. 당장은 남자 친구임을 밝히진 않았다. 남녀가 사귀는 것이 죄가 아니기 는 한데, 하라의 나이가 열일곱 살이었다. 여러모로 제약이 있고, 인터넷에 좋지 않 은 악성 댓글이 달릴 수 있었다
“하라야 잘 먹을게.”
“맛있게 드세요, 언니!”
하라가 불러서 밥차가 온 줄 알고 있었 다. 함께 출연하는 동료 배우들이 고마워 했다. 일정 클래스의 배우를 제외하면 연 기만 해선 배곯지 않고 살기 어렵다. 하라 와 같은 톱스타가 동료라고 챙겨주는 경 우는 흔하지 않았다. 흥망성쇠가 한순간 인 연예계다. 당연한 배려일 수도 있는데, 인기에 편승하는 냉혹한 현실이었다.
정우도 딱히 아니라고 답하지는 않았 다. 그렇게 알고 있는 편이 나았다 흐응!
늦은 시간 밥차를 대령한 정우의 정성 에도 하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않 았다. 남자 친구의 순수한 호의로 받아들 이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이 인간이 왜 안 하던 짓을 하는 거 지?’
죽을병 걸렸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생 생하고.
평소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는데도 어떤 역할인지도 모르던 녀석이다. 본인이 관련 된 일을 제외하고는 무관심의 대명사다. 그런 녀석이 밤마다 찾아오고, 밥차까지 대령하다니. 정우의 저의가 의심스럽다.
‘뭔가있는 것같은데?’
현우 선배가 관련됐을 가능성이 크기 는 하다. MT가 끝나고 보인 현우 선배의 태도는 알려진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만약 정우가 아니었다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조 롱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약 올리려고?’
함께 있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어, 현우 선배를 약 올린다는 유치한 계획?
비약이 너무 심했다. 정우는 고작 그런
이유로 이렇게까지 성의를 보일 성격하곤 거리가 멀다. 간혹, 좀스러운 면이 있기는 해도.
“수상해?”
“남자 친구의 순순한 호의를 오도하진 마라.”
“순수하긴 어디가?”
“평생손만잡고 잔다니까.”
“그러기만?…?”
결혼해서 평생 손만 잡고 산다면 과연 순수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걸 순수하다 고 표현한다면 그 인간은 정신감정을 받 아봐야 한다. 혹, 변태일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하라는 순수의 대명사다. 제 입으 로 삿된 말을 하기에는 제약이 많았다 하라는 급히 화제를 돌렸다
“아버님 회사가 어렵다고 했잖아.”
“잘 해결됐어.”
“다행이다;”
“너밥굶기지는 읺아”
“내 밥은 내가 알아서 챙겨 먹거든?”
현우 선배라면 정우 아버지의 회사를 좌지우지할 힘이 있었다. 관련이 있지 않 을까 싶어 물었는데, 내색하지도 않았다.
하라는 아쉬웠다. 신안으로 다른 사람 의 생각은 알아도, 정우의 시꺼먼 속은 알 기가 어려웠다. 지나치게 검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