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장
분란엔 기름을 부어야 제맛 ⑵
정우와 설현은 10분 후 제자리로 돌아 왔다
자연스러웠던 관계가 어색하게 변했다. 조원들은 또다시 저희끼리 속말을 생성해 냈다. 친근함에 이어 어색함은 설렘을 발 동시킨다. 전쟁 중에도 사랑은 이어진다고 하더니,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잔인한 것들이다.
설현은 아연실색했다.
도저히 믿을수 없었는지 다시 물었다.
“하라랑 사귄디고?”
“그렇다니까.”
“거짓말!”
“바로 들통 날 거짓말을 뭐 하러 해.”
하라는 학교 모델로서 홈페이지를 장식 하고 있었다. 설현도 하라가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는 걸 알고 있다. 아역 시절부터 꾸준히 인기를 얻은 국민여동생으로서 한 창 주가가 오르고 있는 자신과 함께 대세 반열에 오른 핫(Hot) 스타다. 알게 모르게 비교를 많이 당하고 있어, 은근 경쟁심을 불태우고 있는 대상이기도 하다. 다음 학 기에는 반드시 학교 홈페이지를 탈환하고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하라의 남자친구가 얘라고?’
국민여동생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 실도 놀랍지만 그 대상이 정우일 줄은 몰 랐다. 그렇다면 정우의 성적 취향이 정상 이라는 뜻이 된다. 명백한 오해로 인한 쪽 팔림이 홍수처럼 밀려오는 가운데, 분한 감정이 샘솟는다.
‘두고 봐, 내 빠돌이로 만들어 줄 테니
까:
남자 앞에서 돌멩이가 되다니, 설현은 오기가 발동했다.
오늘의 수모를 빠돌이라고 되갚아 주리 라
“오해는사양이니, 저리가줄래.”
정우는 하라와 진지하게 만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니 주변에 이유 없이 여자가 붙어 다니는 걸 원치 않는다. 마음을 정했 다면 주변은 돌멩이가 되어야 한다. 그리 고 내 것이라 정한 이상 주변에 꼬이는 날 파리는 각오해야 할 것이다.
‘내 것을 남에게 양보할 만큼 착한놈이
아니거든.’
익은 벼를 쪼아대는 참새처럼 휘휘 저 어진대상
설현은 소박맞은 처량한 심정이었다.
‘오늘의 굴욕, 갚아주고 말테다!’
* * *
MT 가 끝났다
성적은 케이브 안에서 취득한 에너지 스톤의 등급과 수량이 결정적 역할을 한 다 수량과 등급 체크는 케이브에서 나오는 직후에 거의 끝이 났다. 성적은 그날 결정 이 됐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공식평가 가 나오려면 집계를 해야 하기에 3일이 걸 린다.
“이게 뭐야?”
그는 미리 집계결과를 확인했다.
현우는 기가 찬지 인상을 구겼다. 예상 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 최하 위를 전전하던 마법학과가 이번에는 탑 5 에 드는 성적을 올렸다. 특히 마물이 각성 하면서 에너지 스톤등급이 무려 5급이었 다. 이건 여태까지의 MT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결과물이었다.
“윤 비서, 어떻게 했기에 이런 결과가 나
와요?”
집계결과를 공수해 온 수행비서 윤기성 도 예상과는 다른 결과에 당황한 기색이 완연했다. 인공지능 컴퓨터에 조작된 데이 터를 심어, 정우의 조를 드론 정찰 범위 밖 으로 유인했다. 당연히 정우의 조는 난처 한 상황에 처해 도망 다니다가 MM 포기 했어야 한다.
그런데 최고의 성적을 거두고 말았다. 의도치 않게 폐기 직전의 마법학과를 도 와준 꼴이 된다 그냥 놔두기만 했어도 마 법학과는 자연히 도태되었을 텐데.
자료의 마지막 줄에 5급 에너지 스톤이
적혀 있었다.
“하면 5급 마물을 해치웠다는 거잖아”
“단독으로 움직인 건 아닌 듯합니다. 나올 때 레드아이즈의 민설현이 같이 있 었습니다.”
민설현의 잠재등급은 5급이며,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돌아가는 정황을 살펴보 면 민설현이 중심이 되었고, 정우가 어부 지리를 취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드 론을 조작하는 바람에 영상을 구하지 못 했다.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일이 꼬이려고 하니, 제대로 꼬이고 말
았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꼴이라 누구한 데 말을 하기도 부끄럽다. 외부에 알려지 면 단단히 망신을 당할 일이다.
“결국 놈에 대한 정보는 하나도 얻지 못 한거군.”
“다른 수를 강구하겠습니다.”
고민을 해봐야 할 문제다.
케이브 등급을 조정해서 MT를 하고 있 었다 5급의 마물을 해치운 건 뛰어난 성 취지만, 1학년이다. 드론 정찰 구역을 벗 어났다는 점도 문제가 되었다. 인명피해가 없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큰 사고를 불러올 수 있었다. 케이브에서 개최한 첫 MT라는 점을 감안해도 두 번은 위험했 다
‘쉬우면 재미가 없지.’
뜻밖의 결과에도 현우는 개의치 않았 다. 벌레 중에서도 제법 기어오르는 벌레 가 있기 마련이다. 그럴수록 주제를 깨닫 게 해주면 된다. 발버둥을 쳐도 넘볼 수 없는세상이 있음을.
* * *
마법학과는 축제분위기다.
정우의 조가 최고 점수를 받았고, 윤정 과 하라도 못지않게 분발했다. 다른 조가 안타까운 성적을 내는 바람에 많이 깎아 먹기는 했어도, 최상위권의 점수를 얻었 다. 역대 MT 중 마법학과에서 낸 최고의 성적이자 쾌거였다 불행이라면 이로써 학 년 선배들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더욱분발하지 않으면 역전당할 수 있었다.
마법학과는 회식을 가졌다.
“장하구나, 장해!”
“너희가 큰일을 할 줄 알고 있었단다.”
“자자, 맘껏 먹으렴.”
“고기도 더 시키고!”
누구보다 기뻐하는 사람은 남 교수와
정 교수다. 학과가 폐지되지 않을까,전전 긍긍했건만 예상치 못한 쾌거였다. 이젠 학과 유지는 물론 성적 향상으로 인한 보 너스까지 받게 되었다. 오늘은 먹고 죽어 도 여한이 없을 만큼 기쁜 날이었다. 회식 비는 학과 운영자금으로 이루어지는 거지 만, 학생들에게 자세한 설명은 생략했다. 좋은 게, 좋은 Day라고 서로 좋으면 그만 이었다.
“이게 얼마만의 멀쩡한 고기냐!”
“그런데 왜 그게 더 맛있냐 이거야!”
“젠장 입맛이 변해 버렸어!”
투덜거리는 것과 대도적으로 정우의 조
원들은 걸신들린 사람처럼 고기를 위장에 쑤셔 넣고 있었다. 마치 오늘이 아니면 고 기를 영영 먹지 못할 사람들처럼. 주변의 동기들이 말을 걸기도 무서울 지경이다.
정우는 리차드 교수와 자리했다.
평소 회식에는 참석하지 않은 리차드 교수인데 의외였다.
“실력이 많이 늘었구나, 어떻게 한 것이 냐?”
“운이 좋았습니다.”
리차드 교수가 보기에도 정우와 하라, 윤정은 타 학과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정우의 조 는 전체적으로 속성의 향상이 놀라울 정 도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속성이 늘었다.
“알려주기 싫은게냐?”
“그럴 리가요.”
에너지 스톤의 개수를 보면 조원들의 실력 향상은 당연했다. 하지만 마물을 상 대한 적이 처음인 조원들이다. 하급마물 이라도 수가 많으면 상대하기가 까다롭다. 점차적으로 실력이 늘면 좋겠지만, 자칫 목숨이 위험할수도 있었다.
‘알려줄수 있는것도 아니고.’
설명을 하려면 MT의 문제점을 거론해
야한다.
리차드 교수의 성격상 문제를 알면 가 만있지 않을 테고, 사태를 복잡하게 만들 공산이 컸다. 능력은 인정을 받아도 리차 드 교수는 전문학교 내에서 영향력이 크 지 않았다. 무엇보다 남의 도움을 받을 만 큼, 힘든 일도 아니고 원하는 바와도 거리 가 멀다.
‘무슨일이든, 직접 해야 제맛이지.’
어떤 식으로 나온다 해도 상관은 없다. 계획은 점차적으로 세워지고 있었다. 오히 려 틀에서 벗어나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야 부족한 점을 개선할 수 있었다.
격변의 세상이라고는 하나, 전생보다는 편안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이 죽어 나가는 무림과 비교하면 밋밋했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은 나태해지기 마련이다.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견제는 필 요하다.
정우는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시는 성 격이었다. 물론 제 역할에 충실한 평범한 중생들까지 건들진 않는다
“주책없이 오래 앉아있었군. 가세.”
“저희는 아직.”
“꼰대소리 듣고 싶은가.”
“…아닙니다!”
리차드 교수는 오래 앉아 있지 않았다. 할 말을 끝내고, 교수들을 데리고 나갔다. 학생들끼리 편안히 먹고 대화할 수 있도 록피해주었다.
집에 가봤자 할 일 없고, 바가지만 긁히 는 남교수와 정 교수는 되도록 오래 앉아 있고 싶었지만 리차드 교수를 따를 수밖 에 없었다.
학생들은 남 교수와 정 교수의 퇴장에 환호했다.
“얼어죽는줄알았네.”
“어떻게 한마디도 안웃기냐?”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야.”
아재개그를 듣지 않아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가재는 게 편이고, 아재는 너희 편 이라니 듣다가 얼어 죽을 뻔했다. 다들 정 색하자 하는 말이 20년 뒤에는 너희도 빵 빵 터질 개그란다.
“웃겨죽는줄알았네.”
“너 나이가 몇 살이야 웃지 좀 마!” 유일하게 빵빵 터지는 사람이 있었다. 참으려고 해도 볼 살이 저절로 움직였다
“근래에 들었던 개그 중에 최고였는데, 배꼽 빠지는 줄 알았다고.”
“이거 아재 중에 상아재네!”
아재개그에 유일하게 웃었던 대상
정우다.
이토록 웃긴 개그에 웃지 않다니. 애들 이 너무 감정이 메말랐다며 타박했다. 역 시 수백 년을 전생한 고인돌다웠다.
보다 못한 하라가 정우의 입을 틀어막 았다
윤정도 인정 못하는 눈치였다.
“말 돌리지 말고, 바른 대로 실토하시 지.”
“뭘?”
하라는 의심을 눈초리를 지우지 못했 다 케이브 안에서 일이 터진 게 분명하다. 신안과 여자의 직감이 경고를 보내왔다.
“여우같은 계집애하고 같이 나왔다며?”
“의심하는 거야?”
“전혀.”
그럴 리가, 그렇다면 이름을 말했겠지.
“그럼 말안해도 되겠네.”
“말은해야지.”
윤정은 대화에 끼려고 해도, 들어갈 틈 이 없었다. 마법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을 회식 자리에서 꺼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 다 꿔다 논 보릿자루인 양 있어야 하는 현 실보다, 다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자신이 더 짜증났다.
‘이래선 안돼.’
시답지 않은 감정소모를 하고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굳건히 마법에 매진해야 했 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칼같이 자른다고 해서 잘라지진 않는다.
정우와 하라가 공식적으로 사귄다는 선언을 하자, 마음이 더 흔들렸다. 마치 남 의 떡이 더 맛있어 보여 욕심내는 것처럼.
‘나답게 행동해.’
객관적으로.
윤정은 흔들리는 마음을 추수렷다. 고 작 이런 일로 흔들리면, 해야 할 일을 끝내 지 못한다. 정우는 마법의 벽을 깨도록 도 와줄 조력자일 뿐이었다 회식이 끝날 때쯤 누군가 찾아왔다.
하라의 인상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상대가 찾아온 것이다. 회식을 마치고 정 우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건만 훼 방꾼이다.
현우는 껄끄러워하는 하라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걸어와 정우와 마주 섰다. 시선보다 본인이 더 중요하다 는 의사표현이었다
“축하한다.”
“별말씀을, 소식 참빠르군요.”
축하인사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듯 보인다. 그러나 내실을 따져보면 의미가 확 연히 달라진다. 첫 MT임에도 당연한, 별 것도 아닌 일로 굳이 찾아왔다는 뉘앙스 다
“마법학과로서는 예상 밖의 성과였으니 까, 다들 주시하고 있는 거겠지.”
“그렇다 치고, 바쁘신 분이 어쩐 일입니 까?”
“MT를 성황리에 마친 기념으로 축하파 티를 열었거든, 어때 관심이 있나?”
“과도 다른데, 제가 가도 되는 곳입니
까?”
“참석해준다면, 고마운일이지.”
현우는 하라도 함께 초대를 했다. 의심 을 피하기 위한 수법이다 정우 혼자만 초 대하면 누가 봐도 이상해 보인다 어쨌든 직접 찾아와준 성의를 고려하 면 참석해야 할 분위기다.
하라는 정우가 초대에 응할 거라고 생 각하지 않았다. 딱 봐도 계산이 깔려 있었 다. 이럴 때는 시비 붙지 않기 위해서라도 피하는 편이 나았다.
그럼에도 설마 하는 심정이었다.
“회식도끝났겠다 가시죠.”
“흔쾌히 응해주니, 내가 다 기쁘구나.”
현우는 담담한 표정과 달리 속으로 비 웃고 있었다. 케이브에서 벌어진 일을 의심 하고 있지 않나 떠봤더니, 지나치게 간단 히 초대에 응했다. 의심하고 있었다면 표 정과 분위기부터 날이 서 있었을 것이다.
‘능력은 있을지 몰라도, 머리는 없군.’
정우의 어수룩함에 현우는 분함을 느 꼈다. 고작 이런 놈 때문에 가문의 혼약을 거절한 하라의 치기를 탓했다. 결혼은 가 문과 가문의 일대 거사다. 재벌이라면 사 랑 따위에 연연해선 안 되었다. 가문을 위 해서 본인의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그러나 여자의 마음은 강제할수록 반
발하는 경향이 강하다. 본인의 위치를 제 스스로 깨닫도록 해줄 필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