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버스 빌런-54화 (54/500)

제 3장 사후 처리 (3)

밑그림은 그려 놨다.

사소한 일은 양용익에게 일임하고 집으 로 돌아왔다. 시간은 정확히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조용히 지문인식을 한 후, 안으로 잠영했다. 부모님이 깨지 않도 록 방으로 들어섰다.

방에 사람이 있었다.

“힘들었을텐데, 안자고 뭐해?”

“오빠기다렸지.”

“걱정한 거야?”

“내가 오빠를 왜 걱정해. 지구가 멸망해 도 혼자 잘 살 인간인데.”

“농담하는 걸 보니, 괜찮은 모양이구 나.”

험한 일을 당하고도 수연이는 씩씩했 다. 초딩답지 않은 강인한 배포였다. 게다 가 진짜로 걱정하지 않은 표정과 말투다. 연기라면 수준급이고, 아니라면 좀 실망 이다.

수연은 굴하지 않고 눈빛에 힘을 주며, 심문을 시작했다.

“밖에서 뭘 하고 돌아다니기에 오늘 같 은 일이 벌어지는 거야‘?”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궁해서 물어 보는거야‘?”

“날 어떻게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당연히 궁금! 해서지.”

단어에서 하나를 뺐을 뿐인데, 의미가 전혀 달랐다. 어쩌면 궁금이란, 자금(資金) 이 궁(窮)하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속셈이 뻔히 보이는데도. 안 그런 척하느라고 애 쓰는 것 같아 안쓰럽다.

“말하기 싫다면?”

“ 알잖아”

설명이 귀찮아 통과했더니, 물고 늘어 졌다. 게다가 협박을 주저하지 않았다. 천 륜이 무너져 버린 통탄할 현실이다.

“말할 거구나.”

“당연히.”

이 시간에 엄마를 깨워, 사연을 설명하 는 것보다는 동생을 설득하는 편이 나았 다. 납치 미수에 그쳤다 해도 동생이 험한 일을 겪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았다. 혹금단 1조장의 안일한 대처를 상기하게 되었다. 경호 실패에 대한 책임은 차차 내 려주기로 마음먹었다. 당장은 동생을 구 슬리는 것이 급선무다.

“얼마면 되니?”

“내가돈 따위에 굴할 것같아?!”

“10만원.”

탐욕에 찌든 눈을 하고선 저딴 말을 하 면 누가 믿을까. 요즘 애들은 예전만큼 순 진하지 않았다. 하물며 초등학교 6학년이 면알거다안다.

“난?… 그렇게 지조 없는 소녀가 아니라 고.”

“20만원.”

수연의 동공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한 달 용돈을 감안하면 20만 원은 엄청난 액수였다. 20만 원이면 그동안 해 보지 못 한 신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일을 제대로 파헤쳐야 한다는 사명감을 잊어선 안 되었다. 한 번 쉽게 보이면, 두 번은 더 쉽게 보이기 마련 이다.

동생의 지조를 보여줄 때다

“세……상에 돈이면 다되는 줄알아!”

“30만원.”

지독한 금수저질!

아무리 오빠지만 이건 심했다. 돈으로 무마를 하려고 하다니. 벌써부터 이러면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될지 뻔히 보인다. 동 생으로서 오빠의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경 고를 해주어야 했다. 그것이 동생이 해야 할미덕이었다.

펄럭!

수연의 눈앞에서 5만 원권 6장이 펄럭 거렸다. 그에 따라 수연의 동공도 왔다, 갔 다 했다. 심정적으로는 아니라고 부정하면 서도, 30만 원의 위력은 컸다. 현실과 타 협할까, 말까 고민의 골이 깊었다. 현실과 타협하면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으나, 거 절하면 얄짤없다. 오빠의 성격상 두 번은 권하지 않았다.

“싫으면 말고.”

수연은 돈을 다시 집어넣으려는 오빠의 손을 덥석 잡았다. 거의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무아의 경지에서 나온 본성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금나수법이 이전과 는 몰라보게 빨라졌다 족히 한 단계의 벽 을 깨 버렸다. 흑영단의 위협으로 인해 벽 을 넘었을 때와 비슷한 경험이었다.

씨익!

정우가 웃었다.

아!

수연은 아차 했다. 이럼 할 말이 없어진 다. 잡아 세운 두 손이 무안해졌다. 이제 와 돈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맹세는 허언 증(虛言症) 말기 환자의 망언에 지나지 않 았다. 오빠의 심리적, 금전적 유혹에 흘라 당 넘어가 버리고 만 것이다.

수연은 자기 자신을 싸구려 취급했다 는 사실에 분개했지만 수중에 쥐어진 5만 원권에 행복했다. 안 그런 척하려고 하는 데, 자꾸 양 볼이 실룩거린다. 어쩔 수 없 는 초딩임을 인정해야 했다.

애써 마음을 다독인 수연은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오빠가 곤란할까 봐 묻지 않는 거지,

돈 때문이 아냐.”

“그럼 누구 동생인데, 고맙구나.”

수중에 자금을 두둑이 챙긴 수연은 오 늘의 횡액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이번에 나온 한정판 블랙로즈 펜던트 를사야지. 히히’

알다시피 수연은 블랙로즈의 길드장, 강설현의 광팬이다. 유니크의 경우 유명세 를 타면 기업과 광고 계약을 맺어 스타 못 지않은 대접을 받는다. 그녀가 착용하는 모든 걸 탐하고 있었다. 실례로 정우가 가 르쳐준 초식을 강설현의 특기인 블랙필드 와 유사하게 바꾸려는 말 같지도 않은 시 도를 하곤 했었다.

‘지조가 없어서 좋구나’

정우는 동생이 돈을 받아줘서 진심으 로 고마웠다. 오늘 일은 전적으로 자만에 서 온 실책이었다. 만약 동생에게 지우기 힘든 참사가 벌어졌다면, 평생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해결은 된거지?”

“물론.”

오빠가 그렇다면 그런 거다.

정우는 넌지시 재차 물었다.

“정말로 괜찮은거지?”

“오빠동생 으}하지 않아”

수연은 진짜로 괜찮았다. 오빠가 알려

준 현천공은 육체는 물론이고. 정신까지 도 단련을 시켜주었다. 어지간한 일이 아 니고서는 흔들리지 않고, 현천공을 운용 하면 심신이 안정을 찾는다. 4단공에 올라 선 효과를 톡톡히 봤다

“그런데 위험할 번했지?”

“조금:’

“절정에 이른 네가 일류에게 쩔쩔매다 니, 슬프구나.”

남매의 오붓한 정을 느낄 수 있었던 시 간은 짧았다.

수연은 대화의 핀트가 벗어나 있음을 실감했다. 위화감이 심신을 조여 오며 침 이 바짝바짝 마른다. 훈훈한 마무리는 기 대하지 말았어야 했다. 남매는 절대 친절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상에 본인 이외에 는 믿을 놈이 없음을 재차 상기한다.

“설마?”

“ 맞아”

오빠의 본래 모습을 간과하고 있었다. 빈틈이 많아 보이는 듯해도 실상은 완벽 하다. 또한 자기가 원하던 계획에서 조금 이라도 벗어나면 절대 봐주지 않는다.

“엄……마한테 이를 거야!”

“최강의 여전사께서.”

“젠장!”

동생의 성취는 분명 뛰어나다. 하지만 더 강해질 소지가 다분했다. 노력해도 안 되는 경우가 허다한 세상, 그 안에서 재능 을 타고나고 완벽한 스승을 만나기란 불 가능에 가깝다 복을 타고난 동생이다. 축 복을 받았다면 노력은 필수다 정우는 훈련의 강도를 높이기로 결정했 다. 바람의 속성을 각성한 것까지 계산에 넣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필요하기도 했다.

덤으로 입도 막고.

‘30만 원이면 싸게 먹힌 거지.’

요즘 초딩은 신사임당이 아니면 받지

를 않는다. 세종대왕의 위대한 업적을 씨 불이지 말란 초딩의 일갈이 인터넷에서 화 제가 되었던 적이 있었다. 신사임당의 업 적에 비할 바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둘 다 훌륭한 분이긴 하나, 가치적인 측면에서 보면 차이가 분명했다 혹호문의 괴멸.

한국의 무문, 길드, 연합을 막론해 큰 파장을 일으켰다. 혹호문은 한국을 대표 하는 8대 무문의 대문파다. 무공을 익힌 유니크만 해도 족히 500명이 넘었다. 게다 가 혹호문의 수장, 박영천은 마제라 불리 는 최강의 무인 중에 하나다

하룻밤 새 혹호문을 괴멸시킬 단체는 많지 않았다. 대체 누가 이런 일을 벌였는 지,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서둘러야 했다.

혹호문은 이 사태를 되도록 축소, 은폐 하려고 했다. 그러나 지부에 파견된 무인 들이 감당할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사건 을 전달받은 시간도 다른 무문, 길드, 연 합에 비해 늦었다. 속속 드러나는 사태의 진실은 흑호문에 남은 무인들의 단결력마 저 무너뜨렸다.

조사 내역만 봐도 흑호문의 재건은 사

실상 불가능했다.

확인된 사실은 점입가경이었다

혹호문의 대공자 박기철이 강탈 능력자 였으며, 속성을 강탈한 흔적이 남았다. 박 기철이 죽었다면 입증하기 어려웠을 텐데, 살아 있었다. 근래에 납치당한 유니크의 속성을 박기철이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 뼈 아팠다 게다가 마공의 일종인 흡기공까지 익히고 있어 빼도 박도 못했다.

무문 길드, 연합은 혹호문의 멸문을 공 식적으로 선포하진 않았다. 언론을 통제 하고, 외부로 진실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조치했다. 혹호문을 괴멸시킨 유력한 대상 이 중국의 오대세가인 하북팽가일 수도 있었다. 자칫 국가 간 마찰을 빚을 우려가 있어, 사건을 공개적으로 처리하기가 껄끄 러웠다.

7개의 무문이 회합을 가졌다. 길드나 연합보다는 밀접하기에 사태 수습의 권리 가있었다

회의장은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한국인답지 않은 적발을 지닌 중년인, 화천문의 문주 권영일이 오랜 침묵을 깼 다. 그는 꽤나 직선적인 성격이었다. 서론 을 빼고 본론으로 넘어갔다.

“증거가 명확한데, 무엇을 망설이는 거

요!”

“속 편한 소리를 잘도 하고 있군.”

검선문주 백천웅이 깊은 한숨을 쉬며 핀잔을 주었다. 화천문주와는 극과 극으 로 서로에 대한 감정이 좋지는 않았다. 그 래서 그런지 몰라도 다른 이들과 달리 말 투도상당히 거칠었다.

“지금 그 말무슨 뜻이지?”

“우리가 몰라서 가만있는 거냐!”

혹호문 곳곳에 남아 있는 증거 외에도 문서에 하북팽가가 거론되었다. 계약 내 용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잠재 등급이 높 은 아이들을 일정한 기일 내에 보내기로 약속했다 일반적인 무문이라면 계약 내용만으로 도 충분히 책임을 묻을 수 있겠지만 상대 는 하북팽가였다. 한국이 처한 국제정세 를감안하지 않을수 없다.

설령 하북팽가가 흉수라 해도 따져 묻 기가 곤란했다. 현 시점에서 대중무역의 비중이 상당히 컸다. 제재를 당하면 국가 경제가 휘청거렸다. 가뜩이나 대외적인 경 제 악화와 내수 경제가 죽어나가고 있는 데, 사건을 크게 터뜨려 봤자 실익이 없었 다. 국가적인 문제는 자존심만 따져서 해 결되지 않았다.

“자자, 그만하시오. 우리끼리 싸우자고

자리한 것이 아니지 않소.”

천무문의 문주, 정민철이 두 사람을 만 류했다.

여러 문주 중에서도 제일 연장자이기는 하나, 피부는 20대에 못지않게 팽팽했다. 내력이 경지에 이르려 나이를 잊게 했다. 그는 한시적이기는 해도 회동의 수장을 맡 고 있었다.

“밝혀진 사실을 종합해 보면 하북팽가 의 소행이 분명하나, 지나치게 노골적이라 는 점이 걸리는구려.”

“누군가 중국 무문과의 마찰을 의도했

다는 말씀입니까?”

“꼭 그렇다는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 북팽가라 해도 혹호문을 그 짧은 시간에 멸문시킬 수 있다고는 보지 않소. 발견된 문서도 그렇고, 보다 면밀히 조사를 해 보 지 않고서는 장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천무문주의 의견은 예리했다. 하북팽 가의 소행이라고 해도 흔적이 선명했다. 그런 짓을 하면 당연히 분란을 피하기 어 렵다. 게다가 합법적인 일이 아닌 데다, 불 법을 공모했다.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할 사실은흉 수가 혹호문을 무너뜨렸다는 점이오.”

하북팽가와의 마찰이 국가 간의 일로

번지지 않도록 통제하는 것 보다 중요한 사실, 그건 바로 혹호문의 괴멸이었다. 하 룻밤 새 혹호문을 멸문했다면 다른 무문 이라고 해서 안전하다 장담하기 어렵다.

“혹호문을 무너뜨리려면 얼마의 전력이 필요할것 같소?”

“최소한 200의 무인에 8급의 유니크가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혹호문주는 알려지기로는 7급이지만, 실제로는 8급이오. 게다가 강탈 능력을 지 닌 흑호문의 대공자도 7급 이상으로 밝혀 졌소.”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혹호문이 무너졌을 때 주변은 조용했 다. 흉수는 용의주도하게도, 케이브 대비 훈련을 위해 인근을 통제했다. 시각이 늦 었고, 인적이 드문 점까지도 이용한 것이 다. 과감한 결단력과 추진력, 전투력까지 겸비했다.

그렇기에 이번 사건이 단순히 하북팽가 와의 마찰로 벌어졌다고 단정하기 힘들었 다. 흉수가 따로 있다면, 차도살인지계(借 刀殺人之計)에 놀아나는 꼴이 된다. 이는 한 국을 대표하는 무문으로서 용납할 수 없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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