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는 새롭게 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가만히 있으려니 좀이 쑤신다. 단 체를 만들어서 좀 더 화끈하게 살아보려 는 웅심이 솟을 때마다 다스려야 했다. 도 둑질을 하도 많이 해 봤더니, 금단증상이 일어났다. 너무 참으면 폭발할 것 같았다. 뭔가 소소하게 터뜨릴 만한 기회가 필요했 다. 그래서 금강문의 호법이 되었고, 혹금 단을 만든것이다 한편으로 금강문의 규모가 커지면서 인 원이 더 필요한 것도 한몫했다. 아이러니 하게도 정우가 취미 활동을 하면서부터 동네의 치안이 안정되고, 범죄가 획기적으 로 줄어들었다 제 5장
순간의 판단이 평생을 좌우한다 ⑴
정우네 식구는 강화도에 살고 있는 할 아버지 댁에 왔다. 구정이라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날이었다.
“어이구! 내 새끼들! 할미 보고 싶지 않 았어?”
“보고 싶었어요. 할머니!”
수연이 할머니의 품에 안겼다. 이런 점 은 정우도 많이 배우고 있었다. 동생은 누 구나 좋아할 만한 호감형이었다. 말 잘 듣 고, 잘 웃고, 공부도 잘하니 좋아하지 않 을 수가 없다. 반면에 정우는 노력은 하는 데, 쉽지가않다 엄마의 시어머니이자, 정우의 할머니는 여든 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정정 하셨다. 겉으로는 50대 중반처럼 보인다
“오느라 고생 많았다.”
“자주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해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강화도의 동막 해 수욕장 인근에서 펜션을 하신다. 원래는 동인천에서 사셨었다. 은퇴를 하고 전원생 활을 즐기려고 고향으로 내려오셨다. 하지 만 보통의 할아버지, 할머니로 보면 곤란 하다. 자식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 인 삶을 즐기시고 있었다. 특히 할머니의 주도권은 예나 지금이나 막강했다 실제로 할머니가 할아버지보다 나이가 5살이나 연상이다.
“바쁘면 그럴 수 있지, 보고 싶으면 우리 가가면 되고.”
“어머님 최고. 이래서 제가 어머니를좋 아하지 않을수 없다니까요.”
“네가딱나를 닮아서 딸 같아”
“저도 그래요.”
결혼 생활에서 불화의 가장 큰 원인은 부부간의 성격 차이에서 오지만, 그 다음 으론 고부갈등이 문제가 된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는 한 번 엇나가면 심각한 상황으로 번지기 일쑤다. 그런데 할머니와 엄마는 찰떡궁합이었다. 성격도 비슷하고, 평소 소신도 확고했다.
“모름지기 남편이란 집에서 조신하게 전 이나 예쁘게 부치면 되는 거야.”
“맞아요, 돈이야 없으면 제가 벌면 되 죠.”
전을 뒤집고 있었던 할아버지의 옆자리
를 아버지가 차지했다. 일반적인 가정집을 상상하면 안 된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결혼은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을 넘어선다 고 봐야 했다. 당시 할아버지는 23살, 할 머니는 28살이었다.
실컷 놀 거 다 놀았던 할머니의 눈에 순 진한 할아버지가 눈에 띈 것이다. 할머니 의 마수에 걸린 할아버지는 하룻밤의 낙 인으로 평생을 함께 하게 되었다. 가모장 적(家母長的)인 성격이 고스란히 아빠에게 이어졌다. 엄마에게 순종적인 아빠의 유 전자가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알 수 있다. 여인천하(女人天下). 그것이 우리 집의 가풍 이다.
“유니크 전문학교에 입학했어요.”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게 최고지. 이 할미는 반대하지 않는다”
“고마워요, 할머니.”
“정우는 씩씩해서 좋아 나중에 할미같 이 훌륭한 여자 만나서 결혼하렴.”
그 말은 못 들은 걸로 하고 넘어갔다
할머니와 엄마를 싫어하진 않지만, 내 여자가 비슷한 성격이면 달갑진 않다. 할 아버지나 아버지라서 버티고 살지, 나는 자신이 없다. 결혼이란 공동의 가치를 지 키면서 맞춰가는 것이라 본다. 그러나 나 는 반반이라고 본다. 모든 일에 관해서 객 관적 지표를 우선으로 해야만 한다.
정우와 수연은 세배를 한 후에 고모와 작은아버지를 기다렸다 펜션의 7층、베란다의 난간에 걸터앉은 정우는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4급은 되려나’
정우는 케이브의 변화를 긍정적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다. 등급이 점차적으로 상 향되고, 유니크도 진화하고 있었다. 강한 힘은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불가사의한 마 력을 지녔다. 컨트롤이 되는 범위라면 다 행이겠지만, 무분별한 힘은 부정적인 측면 이 강했다. 특히 마물을 죽였을 때 속성이 증가했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그것 때문이겠지.’
8대 문파는 물론 8대 길드와 유니크 연 합이 회동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단체의 수장이 한꺼번에 움직였던 사례는 많지 않았다. 그만큼 이번 변화에 대해 심각하 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문제 는 이미 발생했을 수도 있었다. 유니크 연 합과 무문, 길드가 나서면 언론을 통제하 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문주는 회합 후 정우와 총관, 장로를 불러 사안을 밝혔다. 내용엔 정우가 알지 못했던 일까지 거론되었다.
‘강탈능력이라’
남의 속성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는 유니 크.
얼마나 있는지는 모른다. 외부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왜 그럴까? 그런 자가 앗、 다면 세상은 가만두지 않았을 테니까. 게 다가 능력을 철저히 숨기고 있었다. 강탈 능력은 드러내지 않으면 구별하지 못한다. 알려진 건 우연한 사고에 의해서다. 속성 을 빼앗긴 유니크의 시체를 발견한 것이 다. 생존했다면 보다 구체적인 정보를 얻 을 수 있었겠지만, 시간을 지체했다면 시 체조차 건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마물보다 위험할 수도 있겠어.’
마물은동물과 비슷하다. 인간을 죽이 기 위한 본능을 타고난 포식자다. 그렇기 에 답은 명확했다. 싸워서 이기면 된다. 하 지만 인간은 적과 아군의 구분이 어렵다. 어제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기도 하며, 상황에 따라서는 누구든 적이 될 수 있었 다
‘파탄이 일어나겠지.’
케이브가 등장하기 전 인류는 정체기에 빠져 있었다 나아갈 길이 없는 장벽에 가 로막혀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케이브는 머 물러 있던 인류에게 진화의 계기가 되었 다
인류는 마물이라는 공동의 적을 상대 하기 위해서 단결했다. 희생이 따르긴 했 어도 케이브는 인류를 업그레이드 시켜주 었다. 하지만 균형을 이룬 시간이 길어질 수록 파격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강한 힘 을 소유한 자들은 도태되지 않기 위해 더 욱 강한 힘을 탐하게 된다.
왜 그렇게 단정하냐고?
‘내가 그랬으니까’
전생의 나를 돌이켜 보면 그랬다. 압도 적인 능력을 가졌음에도 만족하지 않았 다. 더 강한힘을 탐하며, 더 많은걸가지 려고 했다. 진강백이 등장해 막아 세우지 않았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끝 없이 탐욕을 부리며, 끝이 오기를 기다렸 을 것이다.
‘그래서 재밌는거지.’
삶은 알 수 없는 무수히 많은 변수의 연 속으로 이루어진다. 정해져 있는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하고 있어도, 벽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오빠! 여기서 뭐해?”
“생각할 게 있어서.”
“방금웃을 때 소름돋은 거 알아?”
“ 내가?”
수연은 평소의 오빠와는 다른 이질적인 느낌을 받았다. 웃는 얼굴 뒤로 영혼을 강 하게 울리는 떨림이 있었다. 제어를 무시 하고 발동한 속성과 현천공이 그 증거다. 하지만 감히 저항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휘말려 들어가 산산이 부서져 버릴 격렬 한파괴성이 전해졌다.
“무슨꿍꿍이야? 나촉되게 좋은 거알 지.”
동생의 과신에도 정우는 반박하지 않 았다. 모두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건, 모두 의 감정을 알고 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 다. 지나치게 민감해서 소심하게 보이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개 버릇 남못주는구나:
전생과는 다른 삶을 살기를 바란다고 하고선, 파격적인 변화를 은연중 즐기고 있었다. 다된 밥에 재를 뿌리는 놈■이 나 타나서 매번 실패를 했더니, 버릇을 잘못 들였다. 순서대로 성과를 이루면 뭔가 하 나 빠진 느낌을 받는다. 짜증이 났었던 게 분명한데, 이쯤에서 훼방을 놔줬으면 하 는 오모한 바람 같은 거다.
정우는 전생과 현생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정제되지 않은 감정의 편린 을 수연이 느낀 것이다. 내 동생이지만 확 실히 촉은좋았다
“케이브에 들어갔었어.”
“어떻게? 오빠는 아직 들어갈 수 없잖 아”
“꼼수야 얼마든지 있지.”
골격 변환을 통한 인공적인 성형이 가 능했다. 절대고수에게 천변술(千變術)은요 령만 파악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기술이 다. 3번째 전생에서 추격을 피해 도망치던 변신마(變身魔)를 사로잡아 구결을 빼앗았 다. 나중엔 변신을 나보다 못한다고, 병신 마(病身라고 갈구던 기억이 새록새록 상 기된다.
“그러면서 나한테는 한마디를 안한 거 야?”
“말하면 너도 들어가려고 했을 거잖 아”
마물 사냥으로 속성이 증가했다는 사 실을 알면, 수연의 행동은 뻔했다. 나이에 비하면 조숙하지만, 13살에 불과하다. 호 승심이 한창왕성할 때였다
“사랑스러운 동생에게 귀띔이라도 해줬 어야지.”
“공과사는 구분해야지.”
“가족끼리는 무슨 공과 사야.”
가족일수록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을 구분해야 할 때가 있다. 나이가 들고, 현실 과 부딪쳐보면 깨닫게 된다. 가족을 위하 는 마음이야 당연하지만, 사■사로움이 지나 치면 탈이 나기 마련이다. 가족경영을 내 세우는 기업치고 제대로 되는 경우가 없 는것과 비슷하다.
정우는 사적으론 수연이 원하는 대로 해 주겠지만, 선은 분명히 그었다. 그 선을 넘으면 그날은 동생에겐 최악의 날이 될 수밖에 없다.
“수연아 가족을 10번만 해 봐”
“유치하니까 그만해.”
맺고 끊음을 흐지부지 했다가 정말 (가) 족 같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가족에 연 연하고 싶은 마음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러나 이번 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 고 있어야 했다. 모르고 있다가 당하는 것 보다는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수연은 오빠의 말을 이해했다. 예상보 다 변화가 더 빠르고, 위험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렵기보다는 두근거 리는마음이 컸다.
‘얘도 무인다 됐네.’
무인은 호승지심의 생명체다 강함에 대 한 갈망과 두근거림은 무인의 본능이었다.
나중에 엄마한테 한 소리 들을 것 같기는 하다.
그래도 수연이 원하는 일이다. 어리다고 무시하지 않았다 결정을 존중했다
“오빠는꿈이 뭐야‘?”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너는?”
“알면서 왜 그래. 물어보나마나 세계 최 강의 여전사지. 오빠。h 이미 세계 최강이 니까식상하겠다.”
“세계 최강이라니. 거짓말하면 지옥 간 다:’
“가면가는거지.”
보통 팔은 안으로 굽는다. 그것이 일반
적이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따져 봐도 오 빠는 천하무적이다. 누가 감히 오빠의 발 톱이라도 건드릴 수 있을까. 차기 세계 최 강의 여전사를 꿈꾸는 나도 오빠를 이기 는 그림이 나오지 않았다. 동생이라고 봐 주지 않는 무지막지함까지. 그야말로 완전 무결한 오빠다. 이보다 더 완벽한 오빠가 있을 수 있을까? 그래서 궁금하다 오빠의 강함이.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오빠 의 전력을 끌어내지 못했다
“8단의 현천공은 얼마나 강한 거야?”
“글쎄. 힘의 척도는 상대적인 거라서 단
정하기가 어려워.”
강함을 단순 수치만으로 계산할 수 있 을까? 정우의 경험으로는 아니었다. 잠재 등급을 비롯한 계산된 수치는 평균을 반 영할 분이다. 오히려 수치에 얽매여 실체 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경험이 적은 애송이일수록 본인의 실력에 자부심을 가져 적을 깔보는데, 그러다가 한 방에 혹! 간다 본인의 능력을 만개하고 싶다면 항시 은인자중해야 한다.
“그러니까, 대충이라도 보여줘 봐. 그래 야나도감을 잡지.”
“정 그렇다면.”
정우의 손가락이 바다를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