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승부의 마왕 (4)
정우는 수업 시간에 원장실에 불려왔 다
스윽!
방 안을 둘러보았다. 사물인터넷(lot)이 보급되어 부피가 큰 가전제품을 들여 놓 지 않아도 되건만 방 안의 중심을 100인 치 구형 OLED 텔레비전이 차지하고 있었 다. 요즘은 접어서 종이처럼 들고 다니는 플렉서블 텔레비전도 구형이라고 핀잔을 받는데, 원장은 과거의 향수에 젖어 사는 모양이다. 휴대폰도 20,000mah용량의 구형을 쓰고 계셨다. 그거 가지고 얼마나 쓴다고. 최소 100,000mah는 되어야 한 번 충전으로 보름은 사용한다.
‘충전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해야지.’
태양전지판의 집적도를 극대화해, 태양 열만으로도 사용이 가능한 배터리가 나 왔음에도, 에너지 시장의 고착화로 상용 화가막혀 있는상태다.
송 원장은 정우를 위해 따뜻한 음료를 손수 타서 과자와 함께 내놓았다 수제 과 자는 원장의 취미 생활 중에 하나다. 꼭 구형 오븐에 굽는다. 지금 나오는 오븐으 로는 옛날 맛이 나오지 않는다나.
“그렇게 게임을잘한다며?”
“조금요.”
소문이 자자하던데, 뭘.”
“과장된 소문이죠.”
송 원장은 잠시 의아해했다. 나 선생의 말을 들어보면 승부에 집착하고, 잘난 체 가 심하다고 했는데. 직접 마주하니 겸손 하고, 차분하며, 조리가 있었다. 나이에 비 해서 성숙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보는 것 과다를수도 있기에 대화를좀더 유도했 다
“유치원 생활은 어때? 힘든 건 있니?”
“힘들긴요. 다들잘대해주세요.”
“우리 정우는 남자답고 씩씩하구나.”
“감사합니다. 원장선생님.”
송 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또래보다 조숙해 보이기는 하는데, 그런 애들도 간 혹 있었다. 성숙한 애들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다들 그 나이에 맞게 살아갔다.
‘부모님도 괜찮고.’
유치원을 운영하다 보면 별의별 애들이
다 있지만 그런 애들보다 더 심한 건 부모 다. 자기애가 조금만 잘하면 신동이네, 천 재네 떠드는데 그런 건 오히려 애한테 해 를 끼친다. 애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 도 주변 분위기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 럼 결국 탈이 난다. 지금은 나이 때에 맞 게 생활하고, 관심 분야를 찾아주는 것이 현명하다.
“바둑 둘 줄아니?”
“아니요.”
“한번 배워 볼래?”
“예.”
송 원장은 바둑판과 바둑알을 가지고
왔다
가로 19줄, 세로 19줄의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으며, 그 안에 혹백의 돌을 번갈아 놓는 것을 바둑이라고 한다. 이에 대한 기 초적인 내용을 설명해 주는 송 원장이었 다
‘기석은 배워두지 않았지.’
정우는 금기서화(琴橫書호)에는 능통하 지 않았다. 사실 배울 필요성을 못 느꼈다. 전투에 특화되었고, 싸움을 위한 기술만 을 배웠다. 전장에서 살아남는 법에 금기 서화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현시대 는 평화로운 편이다. 바둑은 마음 수련을 위해서라도 배워둘 만한 기예였다
‘진법과 비슷하네.’
정우는 묵묵히 설명을 들었다. 바둑도 게임의 일종, 법칙을 알아야 응용이 가능 하다. 기본을 읽어 초석을 세운 후, 머릿속 으로 끊임없이 복기 운용했다.
“바둑에서 중요한 건 포석이야 그 이유 를아니?”
“왜 그런데요?”
정우가 흥미를 보이자 송 원장은 흐뭇 한 미소를 지었다. 요즘은 시대가 변하면 서 바둑에 대한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 빠 르게 변하는 세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구 시대적인 유물이 되었다. 인공지능이 발전 해 인간을 넘어서 버린 점도 아쉬웠다. 1 명이라도 더 바둑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 낼 수 있다면, 송 원장은 만족했다
“바둑은 상대의 수를 읽는 것에서 시작 해. 그리고 자신의 수를 들키지 않도록 끊 임없이 수를 숨겨야 해.”
“이 조그만 바둑판에 전략과 전술이 난 무하네요.”
“그렇지. 바둑은 인생의 축소판과 같아.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잘 짜는 것도 포석 의 일종이야”
정우는 토를 달지 않았다. 대화의 기본
은 추임새였다. 송 원장이 맘껏 얘기할 수 있도록 장단을 맞춰주었다.
‘배우는바가 크다.’
정우는 상대의 비위를 맞추며 대화를 한 적이 없었다. 무조건 내 말이 옳아야 했다. 토를 달면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해 주었다. 전생의 내가 그리 좋은 놈이 아님 을 깨닫고 있었다. 살아가려면 남의 말을 듣고, 가려낼 줄알아야 했다.
“정우는 바둑에 딱 맞는 성격이야.”
“그래요?”
“그럼. 보통은 지루해하거든.”
바둑은 가르친다고 해서 가르칠 수 있
는 것이 아니다. 재능을 타고나야 한다. 노 력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단계가 정해져 있다. 하나, 이는 프로의 경우다. 보통 바 둑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인내다. 수를 놓고, 다음을 이어 나갈 인내심이 필요하 다. 그렇지 않으면 시작부터 지루함을 느 껴, 바둑을 싫어할 공산이 크다.
송 원장은 바둑의 규칙을 쉽고, 간단하 게 풀이했다.
‘둘러싸면 끝나는군.’
바둑은 자신이 쥐고 있는 바둑알로 상 대방의 바둑알을 포위하면 이긴다. 방법 자체는 간단하지만 바둑판 안에 칸이 361
개나 된다. 그 안에서 헤아리기 어려운 수
많은 수가 공존한다.
‘상대의 수에 따른 공수의 조화가 중요 하군.’
바둑 수업은 꽤나 유익했다. 교실에서 아는 내용을 반복할 때보다 훨씬 도움이 되었다. 사고력을 증진시키고, 무공을 정 리할 수 있었다. 가급적 송 원장과 많은 시 간을 갖기로 했다.
‘ 일단은.’
바둑 수업을 받은 지 3일이 흘렀다.
정우는 집에서도 바둑의 기초를 배우
기 위해 인터넷을 활용했다. 기본적인 바 둑의 공수(攻守)는 검색만으로도 많은 도 움이 되었다. 프로의 정석을 살펴보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기초를 마스터한 그때부터, 송 원장이 본색을 드러냈다.
“시합을 해볼까?”
“좋아요.”
내기의 상품은 이하동문이었다. 정우 는 승부를 서두르지 않았다. 송 원장과는 맞바둑이 아닌 접바둑을 했다. 5수를 먼 저 두고 하기에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었 다
“두고 나면 물리지 못하는 건 알지?”
“물론이죠.”
흑돌을 착수(着手)하면서 시작이 되었 다. 하나둘 바둑돌이 쌓여가며 바둑판을 흑백으로 채워 나갔다
“잘하고 있어, 정우야.”
“그런가요?”
“다음수를 잘 읽었어.”
“고맙습니다.”
송 원장은 내심 놀라고 있었다. 돌을 접 어주고 있지만 팽팽했다. 나름 바둑에 관 해서는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했는데, 3일 만에 곧잘 따라오고 있었다.
15분이 흘렀다. 공식 대회처럼 시간제 한을 두지는 않았다^
주르륵!
송 원장은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접어 준 바둑을 따라가려고 하면, 한 끗 차이로 벗어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 계속 벌어 지다 보니 결국 악수(惡手)를 두고 말았다. 집을 계산해 보니 답이 나오지 않는다.
불계(不計). 돌을 던져야 했다. 끝까지 가 봤자승산이 없다.
“졌어.”
송 원장은 감탄과 더불어 허탈함이 교 차했다. 접바둑이라고 해도 30년 바둑 인 생이 단 3일 만에 추월당하고 말았다.
“그럼 대세요.”
≪..2”
정우는 원장실로 출근 도장을 찍었다. 수업보다 송 원장과 바둑을 두는 걸로 하 루 일과를 시작했다. 승부는 계속되었고, 매번 정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접어주는 바둑돌의 수가 줄어들어 이 젠 맞바둑을 두었다. 팽팽한 승부가 지속 되었다. 승패는 병가지상사라 했던 송 원 장이 돌변했다. 이기기 위한 최선의 수를 찾았다. 그러나 대마가 계속 잡힌다. 사방 이 가로막힌 백돌은 잡아먹히기 일보 직 전이다. 바둑의 명수 왕적신이 남긴 바둑 의 자세, 위기십결(圍®十휴)은 잊힌 지 오 래다.
주르륵!
송 원장의 이마엔 땀이 샘물처럼 홀러 내렸다.
‘묘수가 없어.’
어디를 두어도 죽을 자리(死地)로 들어 가는 격이다. 핀치에 몰려 사방이 가로막 혔다. 활로를 트기 위한 맹렬한 두뇌 회전 도 소용없었다 송 원장의 답답함은 정우의 시선 밖이
었다. 본인의 바둑에만 집중했다. 바둑도 독고다이는 힘들다고 하는데, 정우는 예 외였다.
‘바둑이란 것도 배워둘 만하네.’
인생의 묘미가 곳곳에 담겨 있었다. 송 원장의 반응에 따라 착수하면서, 포석을 깔아놔 전체적인 구도를 장악했다. 바둑 은 흐름의 미학이었다. 공수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하며, 집중력을 잃지 말아야 했 다. 찰나의 방심은 허를 찌르는 역린이 될 수 있었다.
‘수를 읽어내고, 변수를 줄여 판세를 이
끌어 가면 되는구나:
정우의 바둑은 공격적이지 않았다. 전 체적인 구도를 계산해 내고, 상대방의 수 를 읽어내는데 중점을 두었다. 수비적으 로 보여 언뜻 재미가 없을 수도 있으나, 판 이 끝나고 나면 언제나 승부를 가져왔다. 신이 나서 공격했던 입장에선 화가 치미는 바둑이다. 부처님 손바닥 안에 손오공 신 세였다.
“하아, 정말대단하구나.”
“감사합니다.”
불계의 연속. 송원장은또다시 돌을던 져야 했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어떤 수 를 써도 정우의 손바닥 안이었다. 수비적 으로 가선 승산이 없다고 판단해, 공격 일 변도로 나갔고 흐름을 잡았다고 여기는 순간 판이 끝나 버렸다.
“원장선생님.”
“어, 그래.”
말투가 시원치 않다.
그런다고 사정 봐줄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 대세요.”
송 원장의 이마도 볼록 튀어나와 있었 다. 나 선생이 왜 그렇게 승부에 집착했는 지 뼈저리게 체감했다. 정우의 딱밤은 절 대 만만히 봐서는 안 되었다. 이마를 관통 해 뇌에 직접적으로 충격을 주었다. 게다 가 정신적 트라우마를 새겼다.
송 원장도 나 선생처럼 승부에 집착하 고 말았다. 패배를 곱씹어 정우에게 도전 했다. 결과는 패배. 시간이 지날수록 차이 가벌어졌다.
백전불패.
승부의 마왕, 정우의 전설이 시작되고 있었다.
-영혼의 프린스세트.
-하드 몬스터 스페셜 카드 10장
-바다의 왕국홀로그램 영상
-나노봇 1호.
-스마트 레인저 전투복 5종(레드, 블루. 블랙, 핑크, 옐로).
-한정판바람의 전설 10종.
정우의 스마트 메모장에 적혀 있는 물 품 목록이다. 반 아이들의 도전을 받아 거 둬들인 수확물이다. 목록에서 10개의 메 인 품목은 어른들도 원하는 한정판과 희 귀품이었다 그중 절반이 강천의 것이기는 해도, 반 아이들의 눈이 돌아갈 만한 희소 품은 분명했다.
‘애나 어른이나 인간은 똑같거든.’
내기로는 이길 수 없음을 아이들도 안
다. 그럼에도 도전하는 애들이 간간히 있 었다. 승리의 전리품이 쌓일수록 배당률 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1번만 이겨도 정우 는 가지고 있는 모든 물품을 주기로 했다. 쌓여가는 한정판에 대한 애들의 소유욕 을 이용하고 있었다
‘로또에 당첨되고 싶은 녀석들은 모여 라 크크크:
상품에 눈이 멀어 무모한 승부에 뛰어 드는 애들이 꽤 있었다.
정우는 불 속으로 뛰어드는 가련한 부 나방임에도 말리지 않고 받아주었다. 애 들이라고 무조건 무시하진 않았다. 기발 하고, 창의적인 게임을 만들어 오는 애들 도 있었다.
그러나 그분. 기발해봤자 끝까지 이끌 어 갈 기획력과 뚝심, 두뇌 회전이 부족하 다. 정우의 상대가 되기에는 100년도 이 르다. 기본을 알면 그 즉시 최선의 방법을 찾아 도전자에게 절망을 선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