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버스 빌런-8화 (8/500)

제 3장 승부의 마왕 (3)

또르르!

동전이 굴러 앞이 나왔다. 나 선생이 선 을 잡았다. 정우는 걱정하지 않았다. 젠가 는 선수로 판단이 나지 않는다. 탑을 쓰러 뜨리지 않는 승부이기 때문이다.

정우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아래서 위로 방향을잡고, 빼야겠군.’

단순히 쓰러뜨리지 않는 것으로 안심해 선 곤란하다. 승부에 임하는 나 선생의 자 신감이 엿보였다. 가장 잘하는 게임임을 알 수 있었다. 운만으로 승부에 임하지는 않았을 테고. 나 선생의 전공이 건축이었 다

‘각을 만들어서 타이밍을 계산해야겠 지.’

정우는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 려 계획을 잡았다. 단순히 보는 것으로 끝 나지 않고, 답이 계산되어 나왔다. 속전속 결, 빠르게 젠가를 뺐다.

젠가의 개수가 무려 2천 개다. 그렇다 해도 중구난방으로 빼서 축이 흔들리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조금만 잘못 건드려 도 와르르! 무너져 내릴 수 있었다.

“마구잡이로 빼면 금방 쓰러질걸.”

“빨리 끝나고 좋죠.”

나 선생은 방심하지 않았다. 몇 차례의 패배로 정우가 보통이 아니라는 걸 체감 했다. 얌전히 유치원을 다니기에 잘 몰랐 을 뿐이다. 강천의 연이은 패배가 이해되 었다. 애들은 절대 정우에게 아름다운 패 배를 선사하지 못한다.

‘축을 비틀고, 형태를 완성해 나가야겠 斗’

아무렇게나 잡아 빼는 것처럼 보여도 정우는 계산한 대로 수행하고 있었다. 특 히 젠가 하나를 뺄 때마다 옆의 젠가를 일 정한 힘으로 밀었다. 조금씩, 조금씩 축을 밀어 형태가 변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하는 나 선생. 나름 계산을 하고 있었다. 무턱대고 빼지 않고 정우가 빼는 젠가를 계산에 넣었다. 건축의 기본 은 축과 균형이다. 큰 흐름을 벗어나지 않 도록 계산했다.

젠가의 수가 하도 많아 시간이 꽤 걸렸 다. 각자의 자리에 젠가가 수북이 쌓였음 에도 쓰러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시간 이 좀 더 필요해 보였다.

“끝났네요.”

“끝나긴 뭘 끝나.”

정우의 선포에 나유란이 발끈했다. 시 작도 하지 않았건만, 자기 맘대로 끝내려 고 하니 받아들이지 않았다. 주변 상황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애들과 열을 올 리는 나 선생을 학부모가 봤다면 기가 막 혀 했을 테지만.

믿음은 강요하지 않는다. 보여주면 그

만이니까.

쏘옥!

젠가를 뺀 정우는 승자의 미소를 지었 다

흔들

굳건하던 젠가의 축이 금방이라도 무너 질 것처럼 위태위태했다. 흔들릴 때마다 애들이 탄성을 내질러 나유란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예측하지 못한 타이밍이다. 태 풍에도 굳건할 젠가가 50도로 비틀어 놓 은 피사의 사탑이 되었다.

‘이게 뭐야?’

왜 갑자기 흔들려?

나유란은 이해할 수 없었다. 건축학도 로서 축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 었다. 나름대로 젠가의 축을 계산해서 기 둥을 남겨두고, 정우를 궁지에 몰기 위해 야금야금 긁었다. 그런데 채 긁기도 전에 축이 흔들리며 불안감을 조성했다.

주르륵!

똥줄 타는 현실. 나 선생의 귀밑머리에 뽀얀 땀방울이 흘러내린다. 자격증 시험을 볼 때보다 긴장이 되기는 처음이었다. 하 나의 젠가로 승부의 명암이 갈린다는 걸 체감하고 있었다

“젠가 빼는사람 어디 갔나?”

정우의 여유에 나유란의 인상이 구겨졌

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표정으로

내뱉는 말마다 염장에 불을 지폈다.

▲ a g;

조심스럽게 젠가 하나를 선택해 뺐다. 흔들린다고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나 선생은 살살 건드려서 빼냈다.

씨익!

정우는 웃었다.

와장창!

나 선생의 한 줄기 희망이 허물어지고

말았다. 승리를 위해 자비로 제작했던 젠 가의 허무한 최후였다.

“어……떻게?”

“운이 좋았네요.”

정우의 가식적인 위로와 달리, 실상은 운과상관이 없었다.

‘진강백의 도움이 컸지.’

진강백과 전생을 초월한 다툼을 벌이 는 동안 정우는 매번 진화해야 했다. 무공 만 파지 않고, 기관과 진법은 물론 독까지 도 섭렵했다. 특히 기관과 진법은 수학의 기하학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중심축을 하나씩 홑트리고, 진법을 사 용했으니 당연한 결과지.’

젠가를 빼는 처음부터 끝까지 계산대로

다. 중심축의 무게를 달리 하기 위해서 중 력진(重方陣)을구성했다. 자연적으로 중력 을 끌어오는 진이기에 어렵진 않았다. 무 게를 크게 늘릴 필요도 없었다. 나 선생이 빼야 할 위치에만 중력의 흐름을 집중시켜 놓으면 그만이었다. 어떤 곳을 빼도 흔들 리는 반면, 유독 한 곳만 안정된 축이 있 었다. 나 선생이 빼야 할 젠가까지도 계산 에 넣었다.

“다?…시 해.”

“그전에 할일이 있잖아요.”

“뭘?”

“알면서 그러시는 거면 영악하시네요.”

정우가 딱밤 자세를 취하자, 나 선생이 멈칫하며 물러섰다. 애한테 영악하다는 말까지 들은 와중이나, 본능적인 반응이 었다. 정우가 보통 애면 선생 체면에 이러 지도 않는다.

“정우야, 팔목으로 하면 안 될까?”

“다음부터 팔목으로하죠.”

“양심적으로 같은 데는 때리지 말자.”

“내기에 없는조항이네요.”

나 선생은 말로도 정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다른 때는 어눌하게 행동하는 것 같으면서도 승부에 임하면 뉴스 앵커보다 조리 있게 잘했다. 대화를 섞으면 섞을수 록 불리하게만 다가왔다. 게다가 주변의 아이들까지 이용했다

“지고서 땡깡 부려도 되나 보네요.”

아이들은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들이대 며 나 선생을 바라보았다. 어떤 행동을 할 지 궁금해하는 무지막지한 눈초리다. 차 라리 욕을 하고 비난을 하면 그나마 낫다. 선생으로서 애들의 순진무구함에 오물 을 투척할 순 없었다. 정당한 승부를 했다 면, 마땅히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했다. 그 것이 선생으로서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바른 정의였다.

하아아!

나 선생은 체념하고 내려놓았다.

“자 맘대로 해.”

“역시 선생님이세요.”

치켜세워 주는 정우의 제스처에 나유 란은 저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졌다. 지금 이 순간 정우가 같은 나이였으면 하는 바 람이 있었다.

‘얄미워! 얄밉다고!’

하는 행동이 지나치게 정중하고, 정당 해서 더욱 얄밉다. 비겁한 수단을 사용했 다면 모를까, 대결마저 공정했다.

빠악!

딱밤은 이마의 얇은 두피를 관통해 전

두엽을 강타했다.

부릅

충격을 받은 나유란은 찰나 멈칫한 채 멍하니 시선을고정해야 했다. 머리끝에서 발끝을 관통하는 가공할 통증이 밀려왔 다. 눈물이 쏟아질 만큼 엄청나게 아팠다. 그렇다고 애들 보는 앞에서 눈물을 쏟아 낼 수도 없는 처지다.

“아주잘하는구나, 정! 위 야!”

“노력의 대가죠.”

나유란은 곱씹었다. 이대로 물러서야 할지, 아니면 또다시 도전해야 하나 망설임 이 교차했다. 현실적으론 포기해야 하나, 포기하고 싶지 않다. 저 얄미운 녀석에게 패배의 쓴맛을 각인시키고 싶었다. 이는 선생이 아닌 사람으로서, 사심(私心) 200% 다. 절대 객관적이지 않다. 그러고 싶지도 않고. 무조건 이기고 싶었다.

“한번더하자”

“ 얼마든지요.”

정우는 여지를 주었고, 나 선생은 덥석 물었다. 쥐덫인 줄도 모르고 포식한 쥐의 말로는정해져 있었다 반에서 가장 수다스러운 애가 있다면 공남주가 세 손가락 안에 꼽힌다. 그러나 요즘엔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말수도 현 저히 줄어들었다.

정우는 입 모양으로 ‘어흥’을 그렸다. 한 퉁인지, 멍퉁인지 알 바 아니지만 상어의 습성을 보여주었다. 상어가 주변의 어류를 가리지 않고 포식하는 식사 장면이었다. 그날 남주의 동심은 파괴됐다. 상어의 실 체를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하지 못했다. 두 번 다시 정우 앞에서 입도 뻥끗하지 않 았다.

‘조용해서 좋군.’

실내에서 떠드는 거 아니라고 배웠다(室 內靜肅). 친히 수다쟁이 남주를 요조숙녀로 만들어 주었음에 감개가 무량했다. 조용 히 있으면 예전보다 더 귀엽고, 예뻐 보인 다

‘내 앞에서 떠든 놈치고, 입이 성한 적 이 없었지.’

주둥이를 나불댄 놈은 친히 천연 바이 오 흙 침대에 눕혀 주었었다. 너무 심하다 고? 노노노(NoNoNo)! 진짜 말 많은 놈치 고 제대로 된 놈을 보지 못했다. 현란한 주둥이로 사람들의 마음을 홀려 선동하거 나 파탄을 일으킨다. 그래서 전생에선 말 보다 칼로 대접을 해 주었다. 말 한마디에, 칼빵 하나씩. 그럼 조용하다 못해 숨소리 도들리지 않는다.

교실에서 넋이 나가 있는 사람이 2명 더 있었다.

1명은 강천이다.

정우는 어제 시계를 엄마에게 주었다. 어디서 났냐고 하기에 강천이 내기로 시계 를 걸었다고 했다. 엄마 친구에게 돌려주 라고 부탁했다. 알고 보니 시계는 엄마 친 구의 혼수였다고 한다. 그날의 결과는 굳 이 보지 않아도 강천의 표정으로 입증되었 다 시달린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남은 1명은 나선생이다.

젠가를 시작으로 알고 있는 보드 게임

을 전부 가지고 왔으나 참패를 면하지 못 했다. 특히 젠가는 일방적인 패배의 연속 이었다. 딱밤이 아닌 팔목으로 대신했으 나, 대가는 선명하게 남았다. 채찍을 휘두 른 듯 팔목엔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집에 가선 말도 못한다. 누구한테 맞은 거냐고 엄마가 따졌으나, 애한테 맞았다고는 도저 히 말할 자신이 없었다.

“나 선생, 멍하니 뭐하고 있는 거예요?”

“아! 원장 선생님!”

청송 유치원의 대장 특이한 미적 감각 의 소유자로 평가를 받았으나, 지금에 와 선 재평가를 받고 있었다. 유치원 주변이 시대에 발맞추어 변화하고 있는 동안 제 자리를 지킨 뚝심이 빛을 발했다.

“요즘들어 왜 이래요?”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곳에 정신을 팔 았네요.”

원장은 자초지종을 물었다. 나 선생이 이유 없이 그러진 않는다고 판단했다. 평 소 성실한 선생이 갑자기 그러면, 집에 우 환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

“사정이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말해 봐 요.”

“그게.”

나유란은 터놓고 말하기 곤란했다. 말

해봤자 본인 얼굴에 침을 뱉는 격이 되었 다. 그러나 말을 하지 않으면 답답해서 죽 을 것 같다. 대나무 숲이라도 있으면 가서 소리치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송원숙 원장은 엄마 미소를 지었다.

“부득탐승 이기는 것에 목적을 두면 삶 이 피곤할 뿐이에요. 게임은 게임으로서 즐기세요.”

“아는데도 맘이 편하질 않네요.”

정우에 대한 험담은 하지 않았다. 애한 테 졌다고 뒷담화를 까는 건 나유란이 생 각해 봐도, 속물에 저질이었다. 그래도 감 정이 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애한 테 맞은 꼴인데, 이게 아프기도 하고 은근 히 자존심 상한다. 반 애들의 굳건했던 신 뢰가 정우로 인해서 와르르! 무너져 버렸 다

“정우가그렇게 게임을잘해요?”

“말도 마세요,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니 까요.”

“나 선생도 게임을 잘하는 걸로 아는 데, 정우가참 대단하네요.”

“대단한 걸 떠나서 승부에 너무 집착하 는걸요.”

승부에 집착하는 사람이 누군데. 송 원

장으로 속으로 혀를 찼다. 반에서 조용히 공부하고 있는 정우와 대조되었다. 정우가 비록 1등은 아니지만, 세 손가락 안에는 든다. 샌님처럼 얌전한 모범생인 줄 알았 는데, 승부욕이 상당한 모양이다.

‘궁금하긴 하구나;

송 원장은 정우의 실력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얼마나 대단한 실력이기에 나 선 생이 언급할 때마다 콧바람을 황소처럼 불어대는지. 특별한 재능을 지닌 인재라 면 발굴해 내는 것도 원장의 의무였다.

“원장 선생님께서 나서시게요?”

“나도 게임을 좋아하는 편이에요.”

나 선생은 걱정이 되었다. 자신도 우습 게 봤다가 큰코다쳤다. 연이은 패배는 결 코 운이 아니다. 정우는 얄미울 정도로 뛰 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정우를 쉽게 봐선 안돼요.”

“바둑이라면 괜찮지 않을까요?”

나 선생은 원장의 바둑 실력을 안다. 프 로에 버금가는 기력을 쌓으셨다. 그러나 정우라고 바둑을 두지 못하리란 법은 없 었다. 바둑 기사의 경우 나이가 어려도 최 고의 수준에 이르기도 한다.

“걱정 마세요. 바둑을 전문적으로 배우 지는 않았을 테고, 가르치다 보면 승부욕 을 잠재울수 있지 않겠어요.”

바둑은 예(禮)로 시작해서 예(禮)로 끝나 는 스포츠다. 기력을 쌓아가다 보면 정우 의 승부욕을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지나친 승부욕은 타짜로 가는 지름길이라 고 했다. 이쯤에서 패배의 쓴맛을 가르쳐 줘야 삶의 현명한 지혜를 배울 수 있었다.

“부족함이 있다면 채우고, 배울 점이 있 다면 배우는 것이 스승의 자세임을 잊지 마세요.”

“예,원장선생님!”

나유란은 수긍했다. 원장님이야말로 정 우를 올바르게 이끌어 줄 훌륭한 분이셨 다. 그리고 바둑 초보가 원장 선생님과 승 부해봤자 결과는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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