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정우 (3)
헐
나선생도또다시 혀를찼다
‘무슨놈의 땅따먹기가.’
이렇게까지 흥미진진할 수 있는 거냐! 나 선생은 소름이 쫘악! 끼쳤다. 손등에 돋아난 소름이 이를증명했다. 월드컵 최 종 예선에서 일본을 꺾고 본선에 진출했 을 때보다 더한 격정이 피어오른다. 이것 이 바로 스포츠다, 라고 외치고 싶을 지경 이다.
‘이게 뭐라고?’
생각해 보면 별거 아닌 대결인데, 정우 는 집중시키는 능력을 타고났다. 나대는 경우는 한 번도 본적이 없지만 일단 승부 를 걸어오면 모두를 주목시켰다. 실로 믿 기지 않는 공간 장악력이었다.
“ 강천아”
정우의 부름이 강천의 귓구멍을 테러했 다. 모두에게는 다정하게 들릴 달콤한 미 성이나 강천에게는 악마의 속삭임처럼 들 렸다. 듣기 싫었다.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감정에 충실해봤자 유치원 을 벗어나지 못한다.
“내기는 내기지.”
“?…그건 안돼!”
“아직 달라고도 안 했어, 설마 감추고 있는건아니겠지?”
.?…아냐!”
내기의 조건은 상대방의 애장품 중 하 나를 갖는것이다 강천은 조마조마했다. 엄마를 졸라, 간 신히 산 최신형 27단 변신 나노봇이었다.
지금 한창 방영하고 있는 나노봇 워(War) 의 주력 로봇이기도 했다. 모두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나노봇-원(One), 자랑하고 싶지만 만약을 대비해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었다. 그것만 아니면 다른 건 줘도 그 만이었다
“박스몬스터가 좋을까? 봇물상 다나와 가 좋을까?”
정우는 고민을 굳이 입으로 하고 있었 다. 빤히 강천을 보며 입술을 혀로 핥았 다. 그럴 때마다 강천의 동공이 흔들렸다. 덩치는 산만해도 애는 애였다. 표정에 불 안감이 엄습해 오고 있었다. 떼를 써도 될 상대였으면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나 몰라라 할 텐데. 정우에겐 통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했다가 고생한 애들인 한둘 이 아니었다.
“잘 모르겠네.”
고개를 저으며 이리저리 눈을 돌렸다. 주변 친구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강천은 다소 안심했다. 유치원에 나노봉-원을 가져오지 않았었다. 아무도 모른다 면 결국 선택지는 정해져 있었다. 다행히 정우도 모르는 눈치다.
“그래, 아무거나 하나고르자.”
“아무거나 뭐?”
“나노봇-원.”
..
강천은 귀를 의심했다. 도톰한 손가락 으로 귀를 후벼 파고 다시 들어봤다.
“잘못 들었는데.”
“나 노 봇 원! 강천아 잘들리니? 아니 면 면봉으로 뚫어줄까?”
정우는 면봉 대신 이쑤시개를 들고 있 었다. 손가락에 낀 때를 제거하는 데는 이 보다 더 좋은 수단이 없다
“어떻게?”
“우리 엄마랑 네 엄마랑 친구잖아”
강천과 정우는 단순히 유치원 동기가
아니라, 엄마끼리도 친했다. 인천에서 자 라, 인천을 벗어나지 않은 토박이로 중학 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같은 곳에서 나왔 다. 결혼도 신혼여행을 감안해 10일의 간 격을 두고 했다. 축의금을 내야 한다는 서 로의 의견을 부합한 것이다. 그로 인해 아 빠가 좀(많이) 고생했다고 한다.
“네가 엄마 친구 아들이라서 정말 좋 다”
엄마 친구 아들은 잘생기고, 공부 잘하 고, 인기가 많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애 들은 많지 않다. 현실의 엄마 친구 아들 은 나보다 잘나거나, 뛰어나지 않다. 거기 서 거기다. 무엇보다 강천은 나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덩치만 컸지, 가지고 놀기 딱 좋은 호구였다.
‘반대로 생각하면 불쌍하네.’
강천에겐 정우가 엄마 친구 아들의 최 고봉일 테니까.
“27단 변신은 어떻게 하는 걸까?”
27단 콤보는 들어봤어도, 27단 변신 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요즘 나오는 장난 감은 어른의 판단 기준을 벗어나 있었다. 사람, 동물, 우주선 등 못하는 변신이 없 다는 광고가 상기되었다. 자동변신모드가 장착되어, 간단한 변신은 버튼만으로도 가능했다. 장난감에 내구성 강한 형상기 억합금까지 집어넣었다.
우물쭈물
강천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물 쭈물했다 몇 번 만져 보지도못한로봇장 난감을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잘 때 항상 품에 안고 자는 애장품이었다.
‘망설임을 없애주마.’
정우는 친절을 베풀었다. 절대 사악하 지 않다고 여겼다. 이만하면 아주 정중한 태도였다. 예전이었으면 무조건 빼앗고, 개 기면 그 자리에서 목을 따 주었다 갖고 싶 은 게 있으면, 주지 않고서는 못 배기게 피 를 말렸었다.
그에 비해 지금은 어떤가. 압도적으로 유리한 100%의 승률을 자랑하지만 기회 는 주었다.
보라, 나의 자애로움을.
게다가 친절하기까지.
“애들아, 강천이 나노봇-원을 가져오면 같이 가지고놀자.”
아이들도 눈과 귀가 있었다.
나노봇-원이 무엇인지를 안다. 중산층 이면 잘 사는 부류에 속하지만 나노봇-원 의 가격이 무려 180만원이었다. 그걸 사 줄 수 있는 가정은 많지 않으며, 설령 돈 이 있다고 해도 아까울 수밖에 없다. 아이 들도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지지 못하는 것 정도는 구분한다. 아무리 떼를 써도 손에 넣지 못하는 것. 그럴수록 갖고 싶어 하는 것. 그것이 소수정예, 한정판의 위력이었 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어른, 아이를 딱히 구분 짓지 않는다.
와아아아아!
아이들이 좋아서 환호성을 질렀다 짝짝짝!
열렬한 박수가 내 귀를 즐겁게 해주었 다. 애들은 역시 애들, 본능에 충실했다. 반대로 순수함만으로 잠자리의 날개를 뜯 어내는 섬뜩함도 있다.
“진짜로가지고 놀아도 돼?”
“그럼, 너희 먼저 가지고놀0h”
“우와아, 정우 최고!”
“내 정우다!”
강천은 울기 직전이었다. 애들이 모두 좋아하고 있었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여기서 안 주면 안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다. 애들에게 따를 당하는 수가 있었 다. 애들이라고 상황 판단 못할 거란 편견 은 버려야 한다. 요즘 애들은 유치원부터 씨가 남다르고, 싹수가 노랗다.
정우는 싹이 노란 애들을 꺾어 주며 유
년 시절을 즐기고 있었다. 아름다운 승부 와 정당한 대가는 삶의 미학이었다. 다들 이렇게 논다고 본다. 남들 하는 거 하면서 살아볼 심산이다.
“줄 거지?”
“?…다른걸로 하면 안돼?”
“난상관없지만 애들을봐.”
기대를 담은 애들의 눈빛, 초롱초롱하 게 빛나고 있었다. 그걸 보고 귀엽다 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간절함이 실려 있어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저 간절 한 열망이 배반당했을 때의 파급력이란?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그래도.”
“10일만 가지고 놀게.”
강천은 울고 싶었다. 친구들이 가지고 놀면, 어떻게 될지 뻔히 안다. 유치원 놀 이공방에 있는 장난감의 상태를 보면 예 상이 되고도 남는다. 하루만 지나도 장난 감의 팔다리가 사라지고, 10일 안에 나노 봇-원은 나노 단위로 쪼개져 사라질 것이 다. 망가져 버린 나노?봇-원이 떠오른다.
‘사?…악해!’
나 선생은 할 말을 잊었다. 이 녀석은 늘 이렇다. 모두와 친해지기 어려운 분위 기를 풍기면서도, 인기가 아예 없지도 않 다. 지금도 봐라 모두가 좋아할 만한 제안 이었다. 그러나 반대 입장을 따져 보면 그 렇지도 않았다. 자신이 나선다 해도 사태 를 해결하기에는 늦어버리고 말았다. 흥이 돋아 버린 아이들을 통제하기란 말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애들은 한 번 비지면 여 러모로 피곤해진다.
나 선생이 본 정우는 착한 아이가 아니 라 만찢마였다.
-만화를 찢고 나온 마왕
표현이 참 아름다웠다.
정우는 만족했다.
강천이 로봇을 주지 않아도 된다. 로봇
가지고 노는 건 전혀 흥미롭지 않으니까. 단지, 이 순간의 즐거움은 가려운 데를 제 대로 긁어주는 느낌을 받는다. 무미건조한 유년 시절에 활력소를 제공해 주었다
‘이런 재미도 없이 어떻게 살아’
전생엔 하루에도 수십 명씩 죽이고 살 았으니, 좀이 쑤실만도 했다.
유치원 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한 정우 는 엄마의 환대를 받았다.
“우리 아들!”
“엄마-
대답은 간단하게, 행동은 빠르게.
나의 철학이 되었다.
“엄마가사랑하는 거알지?”
“정말?”
“물론이지.”
우리 집의 안살림을 책임지시고 있는 김혜정 여사이시다. 나이는 마흔이 확실 하나, 한 번도 말해준 적이 없으시다. 항상 본인 나이를 25살이라고 내 귀에 대고 세 뇌를 시켜주셨다. 그런다고 나이가 달라지 는것도 아니고.
나의 탄생은 꽤 늦은 시기였다. 아빠와 엄마는 신혼 생활을 10년이나 즐기고 나 서야, 나를 낳았으니까. 뒤늦게 나를 낳고 나니 외로움을 타지 않을까 해서 동생을 낳았다. 주변 친구들이 결혼하고 애를 낳 은 시기와는큰 차이가 없다. 요즘 들어 워 낙 많은 남녀가 만혼하는 풍속이라. 노인 인구가 늘어나는 와중에 젊은 사람이 부 족해지고 있다는 뉴스보도가 상기된다.
“유치원은 재밌고?”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어쩜, 우리 아들은 이렇게 의젓할까?”
“엄마 닮아서?”
“당?…연하지.”
엄마의 낯간지러운 칭찬이 좋다. 이런 달달함을 원한다. 5번의 전생 중에 유년 시절의 삶은 피폐함의 연속이었다. 부모보 다는 사육사에 가까웠었다. 사육사에게 달달한 것을 달라고 하다, 목이 잘렸던 애 들이 부지기수다.
사^사 왈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해라
그 말이 굉장히 무서웠다. 기대에 어긋 나면 그때부터 지옥이 기다린다. 인간이 상상하기 어려운 참혹한 수련 속에서 감정 도 무뎌지고, 생과 사에 대한 관점이 바뀌 어 버렸었다.
10살이 되기도 전에 사람을 죽여야 했 던 전생과 비교하면, 지금의 간지러움은
큰 은혜이자 호사였다
“오빠!”
동생이 뒤뚱거리며 달려와 내 품에 안 겼다
3살의 여동생, 하수연.
수연이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이 집안의 귀염둥이였건만 그 자리를 양보해 야 했다. 토실토실하게 찐 동생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귀여워서 미치겠다. 가끔 의도 치 않은 행동을 해서 부아를 치밀게 하기 도 해도. 그땐 고의적이었으면 하는 바람 이 있다.
“수연아 오빠 씻어야 돼.”
“놀자, 오바아아!”
안기면서 꼼지락거릴 때마다 분유 냄새 가 풍긴다. 어리광을 부리면 답이 없기는 하다. 김 여사도수연의 어리광을 받아주 다가 지치기 일쑤다. 압도적인 귀여움이 어 리광을 분쇄시켜주기는 해도 휘익! 휘익!
정우는 수연을 들어서 이리저리 돌려보 고, 안아도 보고 가지고 놀았다. 말랑말랑 하고, 부드러운 연약한 피부와 골격이 만 져졌다.
‘내 동생이면 강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