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그너스 대륙전기 497화
호는 조용히 전술판을 바라보며 생 각에 잠겨 있었다.
확실히 리그너스 대륙에서 제일가 는 전투 종족답게 마족의 전력은 적 이지만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다른 세력이었다면 이미 물러났을 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해서 병력을 보충하고 영웅들을 소집해가며 전쟁을 지속해 나가고 있었다.
또한 이번 전쟁을 통해 리그너스 대륙의 칠제 중 한 명이며 마족을 다스리는 만마의 지배자 쉐르난비체 의 강함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 다.
‘전에는 나와 브로리 그리고 한 시 진까지 셋이 덤벼도 상대가 힘들었 었지.’
그만큼 쉐르난비체의 진정한 전투 능력은 단순히 EX로 표현된 등급으 로 설명이 되는 게 아니었다.
마족의 신기 카시아움과 전용기 루 비아이의 시너지가 더해진 마왕의 전투력은 EX+ 중에서도 최상급이나 다름없는 한시진의 공세를 어느 정도나마 감당해 낼 수 있을 정도였 다.
아니, 감당할 수 있었다. 바로 마 장기의 성능 때문이었다.
아쉽게도 한시진의 기체인 데스 사 이더는 전투 유지 능력이 루비 아이 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한시진이 내뿜는 파괴적인 마력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렇다고 마족 마장기와 관련된 기 술 개발도 제대로 하지 않은 까닭에 한시진의 마장기를 개조할 수도 없었다.
그녀의 마력을 감당할 수 있는 새 로운 기체를 구하는 것도 시간이 필 요했다. 당장 기체에 적응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어쨌든 진짜 시진이가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그런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 시진은 쉐르난비체를 포함해 그녀를 돕는 마족의 영웅들을 상대로도 우 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런 한시진의 활약으로 인해 루비 아이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쏠리지 못했고, 그만큼 아군의 피해도 줄어들었다.
만약 본인이었다면 아무리 S 등급 의 마장기인 알바트로스가 있다고 해도 감당이 쉽지 않았을 것 같았 다.
‘그런데 이제는 딴 놈이 문제란 말 이지.’
지도로 시선을 돌리던 호의 관자놀 이에 혈관이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한숨이 절로 흘러 나왔 다.
‘바리안스의 대지’를 수비하고 있 는 리셴르나에게서 드워프들의 움직 임이 점점 공격적으로 변하고 있다 는 소식이 며칠 전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디아린 상단의 정보망을 통 해 드워프들의 맹장 아크칸이 드워 프 왕국의 수도 콜스타인에서 ‘바리 안스의 대지’로 향했다는 정보를 접 할 수 있었다.
망치 회의를 통해 실각이 거의 확 실해진 쿠퍼 쏘우의 뒤를 이어 드워 프 군의 사령관으로 부임이 확실시 되고 있었다.
“아크칸이 바리안스의 대지에 도착 하면 분명 큰 전투가 벌어질 거다.”
문제는 커티삭과는 달리 크리솔라 이트는 적들의 침입을 상정하고 만 든 도시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당연히 수성능력은 비교가 되지를 않았다. 그나마 국경 도시인 까닭에 마동포 이제르론을 한 기 건설해 놓 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바리안스의 대지’로 보낼 지원군이 없었다.
현재 알르드의 비상 병력은 전부 커티삭에 집결해 있었다. 에이스급 오너라도 지원할 수 있으면 좋으련 만, 쉐르난비체를 따르는 마족들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호 본인이나 한시진 이 바리안스의 대지로 이동할 상황도 아니었다.
정말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으면 결 국 브로리나 아쉬토의 군단을 뒤로 빼야 할 것 같았다.
“드워프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마족 녀석이 먼저 물러가 줬으 면 좋겠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던 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커티삭에 맛 좋은 꿀이라도 숨겨놨 는지 커티삭 점령에 목숨을 건 쉐르 난비체가 그럴 리는 없을 것 같았 다.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잠시 후, 마족의 공세가 시작되었다는 급보가 호에게 전해졌다.
- 와아아아아!!! 물러서지 마라!!!
- 커티삭을 점령해라!
- 루루팡 ! 루루 피!!! 한 놈도 성 가까이 접근하게 두지 마!!
화창할 정도로 밝은 하늘이었지만, 지상은 선혈이 파도를 이루고 있었 다.
빛 무리로 화해 사라지는 시체와 여기저기 나동그라진 무기들.
사방에서 연기를 뿜으며 쓰러지는 강철 거인들의 모습은 끔찍한 전장 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 었다.
하지만 그런 전장에도 주인공들은 있었다.
-콰아아아아!
마력이 들끓으며 마왕의 전용기 루 비 아이를 향해 날아들었다. 한시진 의 공격이었다.
쉐르난비체는 마신기의 힘과 루비 아이의 출력을 적절하게 사용해 그 런 한시진의 공격을 막아냈다. 물론,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 었다.
그만큼 데스 사이더에 탑승한 적은 강한 상대였다.
“적기 나타났습니다!”
“친위대는 마왕님을 도와 적을 격 추한다!”
만마의 지배자를 노리는 적기의 등 장에 마족의 에이스들이 행동을 개 시했다.
하지만 그런 에이스들의 움직임에 서 유독 동떨어진 움직임을 보이는 마장기가 한 기 있었다. 볼 붸르니 체스의 데스 사이더급 전용기였다.
레이더를 통해 볼 붸르니체스의 움 직임을 확인한 사운더러스가 그쪽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그의 말대로 만마의 지배자는 볼
붸르니체스의 이탈에도 불구하고 그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면, 적기에 집중하느라 모른 척 무시를 하고 있거나.
“이왕이면 후자였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뇌까리며 사운더러스는 자 신의 기체를 움직였다.
멀리 반인반마 형태의 마장기가 아 군의 기즈린 부대를 향해 달려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패왕 윤호의 마장기였다. 그리고 볼 붸르니체스의 마장기 또한 그리 로 향하고 있었다.
“윤호!”
u.Q 하
조금씩 속도를 높이던 호가 자신의 기체를 옆으로 틀었다.
자신을 향해 데스 사이더급 전용기 가 접근해 오고 있었다. 최소한 마 족의 에이스급 영웅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호가 창을 머리 위로 돌리며 적기를 향해 돌격을 시작하려고 할 때였다.
“……대화를 하고 싶다, 알르드의 패왕.”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적의 기체 에서 흘러 나왔다.
그 증거로 데스 사이더의 주위에
있던 마족들이 어느새 뒤로 물러나 고 있었다. 전선에 배치되었던 기즈 린 부대도 뒤로 후진하는 모습이었 다.
‘무슨 꿍꿍이지?’
창을 굳게 쥔 알바트로스의 뒤로 알르드의 병사들이 좌우로 길게 늘 어 섰다.
그들 역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짐작이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묘한 분위기가 지속될 때였 다.
치지직 거리면서 통신이 연결되기 시작했다. 눈앞의 마족이 강제적으로 접속하는 통신이었다.
강제 접속인 만큼 연결을 끊어버릴 수도 있었지만, 호는 적의 영웅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졌다.
분명 만마의 지배자인 세르난비체 의 생각은 아니었다.
그녀는 한시진과 싸움을 벌이느라 정신이 없는 모습이었다. 통신구를 통해 한시진의 짜증이 계속해서 들 려오고 있는 게 그 증거였다. 그리 고 적기와의 통신이 연결되었다.
-음무워. 오랜만이군. 나는 마족의 동부 군단장, 볼 붸르니체스다.
“ 오호라.”
호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 나 왔다. 볼 붸르니체스, 오랜만에 듣는 익숙한 이름이었다.
“우리에게 빼앗긴 마장기는 새로운 걸로 교체했나 봐?”
-덕분에 좋은 기체를 손에 넣을 수 있었지. 조금 화가 나기는 했지 만 내가 쓰던 기체가 알르드의 돌격 대장인 한시진이 사용하고 있는 것 을 보면 오히려 영광이라고도 할 수 있겠군. 그 루비 아이를 이렇게나 몰아붙일 정도니…… 음무.
“……그래서 무슨 꿍꿍이지?”
적의 신경을 건드릴 생각으로 입을
열었는데, 괜스레 친한 척 말을 늘 어놓는 볼 붸르니체스의 행동에 호 는 어쩔 수 없이 본론을 요구했다.
한 세력의 군단장급 이상 되는 녀 석들은 다들 본인들의 능력에 자신 이 있는 건지 지금처럼 얼굴에 철판 을 깐 놈들이 많았다.
-정전을 요구하고 싶다.
“뭐? 쉐르난비체는 그렇게 생각하 지 않는 것 같은데?”
-정확히 말하지. 상태가 이상해지 신 폐하의 모습을 원래대로 되돌리 고 싶다. 그에 대해서는 너도 짐작 하고 있는 게 있겠지?
호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쉐르난비체의 정신에 창조신이 관 여했다는 것은 우주의 관찰자를 통 해 들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조금 의외긴 했다. 마왕의 절대적인 권력에 볼 붸르니체스와 같은 상급 마족이 의문을 표하고 따 로 행동을 했다는 상황이 잘 이해되 지 않았다.
그리고 호는 곧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알르드와의 전쟁이 계속될수록 우리 마족들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 를 입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 벌써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 수많은 전사 들이 죽었고, 영웅들이 목숨을 잃었 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알르드를 탓할 생각으로 꺼낸 말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족의 안위를 위해 전쟁을 그만둬야 하고, 성격이 이상 하게 변하신 폐하께서는 그것을 원 치 않으신다.
볼 붸르니체스의 말을 들으며 호는 입은 다물었다. 아무래도 마족의 의 견이 두 패로 나뉘는 모양이었다. 전쟁을 원하는 쉐르난비체와 이제라도 물러나야만 자신들의 안위를 지 킬 수 있다는 상급 귀족들로 말이 다.
‘마족들 모두가 창조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었나?’
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마왕 쉐르난비체의 명령으로 마족 의 모든 전력이 총동원된 전쟁이었 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쉐르난비체 혼자 단독으로 진행한 일이었다면? 생각보다 빠르게 전쟁을 끝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창조신의 힘이 정말 대단
하긴 한 모양이었다. 만마의 지배자 가 이렇게나 강력히 세뇌가 되어있 다니…….
“세리너스. 확실히 조심해야 할 힘 이네.”
-……으음?
“모르고 있었나? 현재 쉐르난비체 는 창조신 세리너스의 힘에 조종당 하는 상태다.”
-그, 그게 무슨!
호의 말에 볼 붸르니체스는 자신의 얼굴을 찌푸렸다. 황당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만마의 지배자이자 리그너
스 대륙의 칠제인 그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존재는 호의 말대로 신이라는 존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 한 일이었다.
순간적으로 볼 붸르니체스는 온몸 의 털이 곤두서는 전율을 느꼈다.
만약 호의 말이 사실이라면 마족은 이제껏 창조신의 힘에 의해 농락당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마족 은 지금도 그들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폐하를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나? 이 땅에 믿을 수 없는 기적을 만들어낸 너라면 분 명 무언가 알고 있을 터!
“나도 그런 방법을 알고 있으면 참 으로 좋겠다.”
조종간에서 손을 뗀 호가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며 전투가 벌어지는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한시진과 쉐 르난비체가 연신 불꽃을 튀기며 맞 붙고 있었다.
“전통적인 방법이 하나 있는데…… 죽기 직전까지 패다보면 정신을 차 리지 않을까?”
-농담으로 듣겠다.
진심인데……. 어쨌든 딱히 생각나 는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더 답답 했다.
볼 붸르니체스가 이렇게 나온 것을 보면 마족들도 상황이 이상하게 홀 러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기 시작 한 모양인데 지금의 상황을 호전시 킬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마왕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다시피 하는 마족의 병사들이 자기네들끼리 쉐르난비체의 명령을 거부하고 물러날 리도 없었다.
마족의 특성을 생각해 보면 볼 붸 르니체스의 이런 행동도 믿을 수 없 을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띵동.
-큐브 상점에 새로운 상품들이 입 고되었습니다.
“……뭐야 이건?”
갑자기 뜬금없는 메시지가 호의 눈 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큐브 상 점. 카오스 큐브를 화폐로 사용하는 값비싼 상점이었다.
게다가 파는 물품들 또한 괴상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리그너스 대륙에서는 사용할 일이 없을 것 같은 것들이 큐브 상점의 판매품이었다.
당장 기억나는 목록은 ‘황금 용제 의 세트’라는 아이템이나 ‘유니버스 급 함선-발록’과 같은 것들이었다.
“느낌이 조금 세하기는 한데.”
하지만 메시지의 내용을 무시하기 에는 타이밍이 너무 이상했다. 그리 고 잠시 고민을 하던 호가 큐브 상 점 목록을 열었다.
한시진의 백금색 재능을 오픈하며 카오스 큐브를 다소 소모하기는 했 지만 그래도 호는 60개가 넘는 큐 브를 가지고 있었다.
“어라?”
오랜만에 연 큐브 상점에는 생각보
다 많은 상품이 새롭게 모습을 드러 내고 있었다.
게다가 전처럼 양심 없는 가격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