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그너스 대륙전기 465화
짙은 녹색을 띠는 슬라임 떼가 꾸 물거리며 다가온다. 분명히 홅고서 지나온 던전의 뒤쪽에서도 동굴의 천장에서도, 강한 산성액을 품은 슬 라임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슬라임은 그래봤자 슬라임이었다. 주인공을 레벨 업 시켜주는 초보적인 몬스터 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설정은 가 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에서 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모조리 태워버려!”
“주인님이 원하는 대로!”
“루루 팡! 루루 피! 불꽃아 피어올 라라!”
호의 명령에 따라 브뤼헤아 비쉬들 이 자신들의 마법을 시전했다. SSS 랭크의 마법병이 사용하는 화염마법 이 던전을 휘저었고, 뜨거운 열기가 한바탕 휘몰아치자 주위에는 말라붙 은 녹색의 찌꺼기들밖에 남지 않았 다.
“전방에서 슬라임 무리! 또 옵니 다!”
“오라 그래.”
병사의 보고에 호는 심드렁하게 대 답했다. 이런 녀석들 따위 수천, 수 만 마리가 몰려와도 두렵지 않았다.
“여긴 내가 활약할 일이 전혀 없잖 아? 재미없어, 이 던전. 빨리 점령 하고 다른 곳으로 가자.”
그런 호에게 브로리가 툴툴거리며 말했다. 본격적으로 주먹을 휘두르 기도 전에 화염 마법에 녹아빠지는 슬라임 무리의 모습에 흥미를 잃은 것이다. 하지만 호의 승급 퀘스트 조건은 아직 반 이상이 남아 있었 다.
“그럴 생각이긴 한데, 슬라임 녀석
들이 워낙 많아서.”
대답과 함께 호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리고는 어느새 꾸물거리 며 몰려오는 슬라임 무리들을 보며 말했다.
“그래도 던전의 보스급 몬스터인 자크는 혼자서 상대하게 해줄게.”
“마족 마녀들을 동원하지 않고?”
“그래. 보스 몬스터니까 손맛은 제 법 있을 거야.”
브로리가 자크에게 질 것이라는 생 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D등급 던전에서 등장하는 보스급 몬스터는 아무리 좋게 쳐줘도 C등급 몬스터. 알고 보니 자크가 고대 신이나 창조신의 자식이었다는 출생 의 비밀이 있지 않는 이상은 백 퍼 센트 브로리의 압승이었다.
퍼억! 퍽!!
우이이이이익!
뚜루뚜! 빠라빠라라람!
아니나 다를까. 동굴의 주인인 킹 슬라임 자크는 브로리의 상대가 되 지 못했다.
괴상한 소리를 내며 자크는 열심히 브로리를 공격했지만, 그의 산성 주 먹과 산성 침은 브로리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렇게 던전의 주인은 브로리의 폭력에 무릎을 꿇 어야 했다.
-띵동-
던전의 공략에 성공했다는 메시지 와 함께 승급 퀘스트의 내용을 확인 하니 승급 조건 횟수가 1 올라가 있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굳이 다른 세력 들과 전쟁을 벌이지 않아도, 그렇게 꼼수를 사용해 전직할 수 있다는 것 이 확인되었기 때문이었다.
하기야 다른 세력들끼리 천 만 이
상의 병력을 동원하는 전쟁이 벌어 지는 일은 지금 대륙의 상황으로는 수십 년이 지나야만 가능한 일이었 다. 호가 심혈을 기울여 성장시킨 알르드도 병력 천 만을 동원하는 것 은 힘든 일이었다.
그렇게 자크의 동굴 공략에 성공한 호는 이어서 저주의 평원으로 향했 다.
그곳에는 D등급 던전인 뼈의 성채 가 있었다. 자크의 동굴과 마찬가지 로 스켈레톤과 같은 언데드들이 끊 임없이 등장하는 던전이었다.
“그래! 바로 이거지!!!”
뼈의 성채 공략에 들어간 브로리는 신나게 자신의 주먹을 휘둘렀다. 주 먹을 휘두를 때 마다 느껴지는 손맛 이 장난이 아니었다.
녹슨 무기를 휘두르는 스켈레톤을 향해 브로리는 주먹으로 발로 머리 로 심지어 엉덩이를 이용해서 몬스 터들을 때려잡았다. 하지만 뼈의 성 채에서 가장 독보적인 활약은 보인 영웅은 따로 있었다.
“성검 그람!!!”
니나 다니엘레가 검을 휘두른 순간 밝은 빛 무리와 사방을 덮었다. 그리고 잠시 후, 눈에 보이는 스켈레 톤이 전부 사라져 버렸다. 성검의 신성력에 모조리 녹아버린 것이다.
“……아, 재미없어.”
그런 니나 다니엘레의 활약에 질투 하듯 브로리가 퉤하며 땅에 침을 내 뱉었다. 그 모습을 보며 호는 그녀 의 행동이 굉장히 자연스럽다는 생 각이 들었다.
리그너스 대륙의 패권을 다투는 종 족 중 하나인 인간들은 서로 간에 끈끈한 동맹으로 자신들의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그런 인간들의 관계는 골든 크로우를 중심으로 한 팔 왕국의 동맹으로 발전이 되었다.
그렇게 인간들은 위기가 있을 때마 다 하나로 뭉쳐 위기를 해결해 나갔 고, 서로 간의 군사, 경제, 문화 교 류를 통해 빠르게 성장했다.
천족, 수인, 엘프 보다 늦게 세력 을 키워나갔지만, 인간들이 리그너 스 대륙의 패권을 다투는 하나의 세 력으로 우뚝 서게 된 것은 바로 그 끈끈한 관계가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옛 말이었다.
천족들과 지리적으로 가장 멀리 떨 어져 있던 아이리스 왕국이 갑자기 라헬교를 받아들이며 자신들을 성국 이라고 칭했고, 천족들과 종속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이 인간들의 결속이 깨지는 시발점이 되었다.
그것을 발단으로 물밑으로 세력 다 툼을 벌이던 골든 크로우와 바라테 이온은 서로 간에 대놓고 왕국 동맹 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치열한 정치 적 권력 다툼을 벌이기 시작했고, 인간들의 결속은 조금씩 무너져 내 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재 리그너스 대륙에 남아 있는 인간들의 왕국은 과거의 숫자에 비해 딱 절반인 네 국가뿐이었 다.
“그 녀석들의 행태가 가관이 아니 오. 감히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했는 지 아시오?”
왕들이 모인 회의에서 머리에 황금 색의 왕관을 쓴 늙은 남자가 말했 다. 얼굴이 붉게 물든 그는 현재 골 든 크로우를 다스리고 있는 왕이었 다.
과거 왕국의 재상이었던 그나이 칼 츠만의 죽음 이후 귀족들의 손에 의 해 새로운 재상으로 선출되었고, 그 에 실망한 기사왕이 왕국을 등지자 그녀를 대신해 골든 크로우의 왕으로 추대된 귀족이었다.
“기사왕이 왕묘를 이전시키겠다고 했다던데……
“기사왕? 그 여자는 이제 기사왕이 아니요! 애당초 골든 크로우의 왕도 아닌데, 어째서 왕묘에 관심은 둔 단 말이요! 그년은 알르드에게 꼬리 를 흔드는 개에 불과한 존재요.”
“으음.”
분노에 찬 늙은 왕의 대답에 광산 국가 토란의 왕, 말트가 신음했다.
기사왕이 인간들을 노리는 다른 세 력들의 도발을 막아낸 게 대체 몇 번이던가? 그녀는 늙은 귀족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하며 모욕을 당할 수준 의 영웅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요? 알르 드와 전쟁이라도 벌일 참이요?”
불가능한 일이다. 패왕 윤 호가 다 스리는 알르드의 군사력은 인간 왕 국들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리그너스 대륙의 패권을 다투는 모 든 종족들이 군사를 일으켜도 능히 감당해 낼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들 려올 정도였다.
“……천족들이 우리를 도와주기로 했소.”
“못 들은 걸로 하지. 우리 토란은
빠지기로 하겠소. 바보도 아니고 그 네들에게 당한 게 한, 두 번이요?”
말트는 순간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 었다. 키리네 공왕도 마찬가지의 얼 굴이었다. 천족과 키리네 공국은 불 과 몇 년 전만 해도 치열하게 전쟁 을 치렀던 사이였다. 아직도 서로간 에 충분히 앙금이 남아 있는 것이 다.
괜히 왕의 회의에 참여했다는 생각 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 리 광산에 들어가 광물이라도 캐는 건데. 말트는 여기까지 오가는 시간 과 자원이 아깝게 느껴졌다.
“다 우리 동맹을 생각해서 하는 말
이니 말트 왕께서는 노여워하지 마 시죠. 그렇게 생각할 게 아닙니다. 알르드를 그냥 두게 되면 우리 왕국 들의 존재가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모에드 왕국을 시작으로 알르드의 손에 무너진 나라가 팔 왕국 동맹이 반이나 됩니다.”
빅터 바라테이온이 말했다. 과거 알르드와 전쟁을 벌였던 청년은 조 금 나이가 들어 있었다.
“그게 알르드가 선공을 한 거요? 천족의 꼬임에 넘어가 혹은 멍청한 귀족들로 인해 알르드를 공격한 게 그 이유지?”
“그들이야 그렇겠지요. 하지만 말
트 국왕 폐하, 알르드가 직접적으로 움직이지 않아도 그들은 존재만으로 이미 우리 인간 왕국들을 흔들고 있 습니다.”
“흥!”
말트는 빅터 바라테이온의 말이 짜 증스러울 만큼 불쾌하게 느껴졌다. 어쨌든 토란은 알르드와 전쟁을 벌 일 생각이 없었다. 더욱이 알르드에 는 기사왕이 있었다.
“우리들은 굳건한 동맹으로 여러 위기를 해결해 나갔습니다, 말트 폐 하. 이변에도 분명히 그래야 하고 요.”
바라테이온의 젊은 왕이 웃었다. 골든 크로우의 늙은 왕도 따라 웃었 다. 하지만 말트는 그 모습이 서늘 하게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왕의 회의가 열리고 있는 도시인 하밀레온은 골든 크로 우의 수도. 이곳을 방문하면서 말트 는 천족들의 병사와 그들의 마장기 를 볼 수 있었었다.
‘나도 늙었군. 왕국 회의라는 말에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호랑이 굴 에 대놓고 들어오다니.’
말트는 정신이 차가워졌다. 여기서 계속해서 반대의 의견을 내놓는다면 이들이 어떠한 짓을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대놓고 찬성하는 모습도 보 이면 안 됐다. 괜한 의심을 살 수 있었다. 어리숙하게 어쩔 수 없이 상황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처럼. 일 단은 이들의 뜻대로 행동하며 이곳 을 벗어나야 할 것 같았다.
“좋아. 뼈의 성채도 공략 성공! 이 제 한 번 남았다!”
자크의 동굴처럼 뼈의 성채도 클리
어 하는 순간, 승급 조건 횟수가 1 올라가 있었다. 그것을 확인하며 호 는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생 각보다 쉽게 그리고 빠르게 ‘리그너 스-온리 원’으로 전직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검의 왕좌에서 운트리온을 상대하 며 맛보기로나마 접해본 EX등급의 클래스.
그 사기적인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창조신과 있을 앞으로의 싸 움에서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슬쩍 한시진의 정보도 확인하니 그 녀의 승급 조건도 꽤 많이 달성되어 있었다.
“시진이까지 SSS등급이 되면 한 번 더 전력이 업 되는 건가? 아, 기 사왕도 빨리 EX등급으로 성장시켜 야 하는데……
골든 크로우의 정통성을 손에 넣어 라. 기사왕의 말에 따르면 골든 크 로우의 왕묘만 이전시키면 되는 간 단한 문제였다. 그러나 현재 골든 크로우의 다스리고 있던 귀족들도 자신들의 정통성을 위해 왕묘 이전 을 목숨을 걸고 반대하고 있었다.
“확 쓸어버리면 좋을 텐데……
천족만 없었다면 그랬을 지도 몰랐 다.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해결해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아 있었고, 여신 라헬이 어떻게 나올지가 알 수가 없 기에 섣불리 군사를 움직일 수가 없 었다.
그렇다고 또 다른 황금색 재능을 지닌 영웅, 수왕 아쉬토의 승급 퀘 스트를 진행할 수는 없었다. 기사왕 과는 달리 아직 그 녀석은 확실히 믿을 수가 없었다.
호는 알르드에 소속된 영웅들의 일 람을 띄웠다. 알르드에는 수백의 영 웅이 소속되어 있었지만, 이 중에서 황금색 재능을 지닌 영웅은 고작 넷 에 불과했다. 그만큼 특별함을 지닌 이들이 적다는 뜻이었다. 아, 소환자들은 제외한 숫자였다.
“정리가 끝났습니다, 호 님. 던전 공략에서 획득한 리스와 식량 그리 고 아이템들은 브뤼헤아 비쉬 한 부 대를 통해 알르드로 이동시키도록 하겠습니다.”
호가 한창 영웅들의 목록을 구경하 던 도중 막사 안으로 니나 다니엘레 가 들어와 말했다. 알르드의 수많은 영웅들 중에서도 꽤나 빠르게 SSS 등급으로 승급했던 그녀는 안타깝게 도 황금색 재능이 없는 여인이었다.
“그래? 그러면 알르드로 돌아가도 록 하지.”
자크의 동굴과 뼈의 성채. 이 두 곳의 공략을 끝내며 엘프 왕국에서 의 볼 일은 모두 끝이 났다. 이제 승급 퀘스트의 조건을 만족할 만 한 던전은 드워프 왕국이나 마왕성이 있는 블라디션에나 존재했다.
“아, 엘프 여왕에게 도움에 감사하 다는 이야기도 전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니나 다니엘레를 내보내며 호는 다 시 정보 창을 열었다.
자신이 승급 퀘스트를 위해 던전을 공략하는 동안 눈에 띌만한 사건은 크게 없었다. 드워프 왕국에서 화산이 하나 폭발했지만, 그거야 으레 있던 일이었다. 견인들의 국가인 바 우에서 식량 원조가 필요하다는 사 신을 보냈지만 그것 또한 해결된 참 이었다.
“아, 드워프 왕국에도 화산 폭발 피해를 위한 지원 물품을 보내야겠 네. 퀘스트 때문에라도 호감도 관리 를 해야지.”
정령 왕국과는 달리 알르드와 드워 프는 사이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애매한 관계였다. 칼라시니코프 사 건를 해결하면서 서로 관계가 좋아 졌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알르드 의 국력이 강해질수록 드워프들의 경계심도 같이 높아져 버렸다.
그리고 쉐르난비체의 마족은 솔직 히 말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