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그너스 대륙전기 446화
얼음 정령의 토라짐이 끝나고 땅의 정령이 모습을 드러내려는 초봄.
리그너스 대륙의 세력 중 하나인 정령 왕국의 수도 유드라실의 집무 실은 굉장히 시끄럽고 어수선했다. 그리고 그들의 소란은 일 년 전의 사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일 년 전, 유드라실의 순찰 임무를 맡은 B등급 비행병인 픽시 편대의 소식이 갑자기 끊겼다. 그리고 그들 의 행방을 추적한 결과 정령들은 모종의 적에게 픽시 편대가 몰살당했 다는 증거를 찾아낼 수 있었다.
쉐르난비체의 짓이 틀림없다!
정령 여왕인 아르넨 리네와 최상급 정령 셋은 픽시 편대를 몰살시킨 범 인으로 마족을 지목했다.
일 년이 멀다 하고 서로 투닥거리 는 사이인 만큼 그럴 이유도 충분했 다. 당연히 마족들은 자신들이 한 짓이 아니라고 발뺌을 했고, 정령들 의 선제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되었 다.
그리고 수많은 희생을 낸 채 종전 에 합의한 게 바로 몇 주 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최근 수도를 순찰하 던 픽시 편대가 또 공격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반수가 넘는 픽시들이 목숨을 잃은 끔찍한 사건이었다. 살아남은 픽시 들도 끔찍한 부상을 입었다.
“사망한 픽시들을 관찰한 결과, 죽 은 픽시들이 강제적으로 마력을 빼 앗겼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 니다. 마족의 짓은 아닌 것으로 생 각됩니다.”
사건의 조사를 맡은 중급 정령 셀 리먼이 그렇게 말했다.
그는 픽시 편대가 전멸하는 원 사
건이 벌어졌던 일 년 전부터, 픽시 들이 전멸한 원인에 대해 조사를 하 고 있던 정령이었다.
“마족의 짓이 아니라고?”
“그럼 대체 누가 픽시들을 공격한 거지? 엘프인가?”
“엘프들이? 국경도 아니고 자기네 들의 영토에서 수천 킬로는 떨어져 있는 유드라실까지 엘프가 잠입해서 픽시들을 공격하고 사라졌다고? 무 슨 이유로?”
여러 말들이 나오긴 했지만, 단지 그 뿐이었다. 이 자리의 정령 증 가 장 계급이 높은 정령이 최상급 정령셋도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정령 여왕 아르넨 리네가 셀리먼을 향해 물었다.
“마족의 짓은 확실히 아니라는 거 지요?”
“그렇습니다. 엘프 와 마족 중 누 가 범인이라면 마족이라고 말씀을 드리겠지만, 두 종족 다 픽시들을 공격한 범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셀리먼의 대답에 정령 여왕의 입에 서 답답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확실히 일반적인 사건은 아니었다. 분명 수도 근처에서 공격을 당했는 데, 범인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 소문이 유드라실에 퍼져 나간다면 정령들의 불안은 극에 달할 게 분명 했다.
“몬스터일 가능성은 없을까요?”
어느 정령의 말에 리네는 곰곰이 생각을 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죽은 픽시들은 강제적으로 마력을 빼앗긴 흔적이 남아 있었다. 마족이나 엘프보다는 몬스터들에게 당한 흔적일 가능성이 더 높아보였 다.
문제는 유드라실 부근에는 마력이 새어나올 만한 던전이 존재하지 않 는다는 점이었다. 전부 정령 병사들이 던전을 깡그리 청소했기 때문이 었다.
“깨끗하게 쓸어버린 던전에서 몬스 터들이 나와 픽시들을 공격한 것도 아니고……
정령 여왕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짜 증이 담겨 있었다. 마족과의 전쟁이 끝난 상황이지만 정체모를 사건 때 문에 유드라실의 평화가 깨지고 있 었다.
“아직 정신을 차린 픽시들은 없나 요?”
“현재 치료 중에 있습니다만……. 여전히 헛소리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공격을 당한 픽시들이 범인을 특정 할 수만 있다면 바로 범인을 향해 정령들의 분노를 보여줄 수 있었다.
하지만 공격에서 살아남은 픽시들 은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공포에 떨며 촉, 분, 양, 수라는 뜻 모를 단 어만을 말할 뿐이었다.
“후. 픽시들을 공격할 범인을 찾을 때까지 유드라실의 경계를 최고 수 준까지 올리겠습니다. 또한 C 등급 마장기를 유드라실 순찰 편대에 합 류시 킵니다.”
마장기가 나선다면 더 이상의 피해
도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설령 공 격을 당한다 하더라도 강철의 거인 이라면 충분히 범인을 붙잡고 늘어 질 수 있었다.
그리고 범인이 멍청하게 모습을 드 러낸다면?
‘감히 우리 정령들을 건드리다니. 정체가 무엇이든 가만두지 않겠어.’
정령 여왕의 눈동자가 타오르듯 빛 이 났다.
수인들의 신성한 산에 알바트로스 가 숨겨져 있다는 정보를 획득한 다 음날.
“알바트로스가 숨겨진 장소는 SSS 등급의 던전처럼 굉장히 위험한 곳 일 거야.”
“에이스 오너들을 다수 소집해야겠 어. 국경의 방어가 조금 불안해 지 긴 하겠지만 어쩔 수 없지.”
“일단 로우덴, 브로리, 이레네 아르 티아는 확실하게 던전 공략에 참가 시킬 거야. 아쉬토도 포함시켜. 당연 히 시진이 너도 가야지.”
“일반 병사는 너무 많아도 곤란하
니까 십만 명 수준으로 편성해.”
호는 병사들을 이끌고 세렝게티로 향했다. 당연히 목표는 알바트로스 의 입수였다.
알르드의 대규모 군사 행동에 국경 을 맞대고 있는 다른 종족들은 별다 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드워프들이 으레 하는 행위처럼 위 기감을 조성하지 말라는 경고에 가 까운 말을 전달했을 뿐이었다. 다만, 천족들은 자국의 정예부대를 국경선 에 배치했다.
알르드와 인접한 종족들이 알르드 의 군사 행동에 반응이 미적지근하게 변한 것은 알르드의 군사 행동이 최근 들어 굉장히 잦았기 때문이었 다 그리고 그 이유 또한 충분히 수긍 할 수 있는 이유였다.
자신들은 쉽게 손대지 못하는 위험 한 던전의 토벌. 알르드는 자국의 정예병을 동원해 금지라 불리는 위 험한 던전을 토벌하고 있었다.
호가 이끄는 군대는 남동쪽으로 방 향을 잡고 진군하기 시작했다.
국경선에 다수의 병력을 배치한 천 족들도 호의 목표가 세렝게티라는 것을 첩보로 입수하고는 병사들을 해산시켰다.
세렝게티는 지대 대부분이 낮은 평 원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울창한 삼 림과 늪지대도 찾아볼 수는 지형이 었다.
당연히 다양한 수인들이 살고 있기 도 했다.
“저게 바로 진정한 야생 수인의 모 습인건가?”
멀리서 호인 하나가 토끼 부족으로 보이는 생명체를 잡아먹고 있는 모 습이 호의 눈에 들어왔다. 사파리에 서나 볼 수 있는 생생한 야생의 광 경이었다.
“멀리 운고로 산이 보입니다.”
그렇게 수인 사파리를 즐기던 도중 전방 부대에서 통신이 들어왔다.
시선을 돌려보니 멀리 구름으로 뒤 덮인 가파른 산이 눈에 들어오고 있 었다. 운고로 산이었다.
“지금부터 웨어 타이거와 티거 알 리카들은 운고로 산의 수색을 시작 한다. 수상한 것들이 보이면 바로 통신을 보내도록.”
“쿠워엉. 알겠다.”
가파른 산 지형을 수색할 수 있는 마장기는 네 발로 달릴 수 있는 짐 승형 마장기가 가장 효율이 좋았다.
그리고 티거 알리카 한 기와 웨어 타이거 세 기가 하나의 편대를 이뤄 운고로 산의 수색을 시작했다.
“정말로 저 산에 알바트로스라는 마장기가 숨겨져 있을까요?”
운고로 산을 보며 한시진이 물었 다.
“뭐, 지도는 운고로 산을 가리키는 게 맞긴 하지만……
솔직히 말해 조금 불안하기는 했 다. 분명 마장기에서 본 뜬 지도는 운고로 산을 나타내고 있었다. 하지 만 알바트로스와 관련된 퀘스트는 아직까지도 갱신되지 않고 있었다.
눈앞에 확실한 증거가 있지만, 퀘스 트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금 은 불안하게 느껴졌다.
호는 망원경으로 운고로 산을 살폈 다. 군데군데 색색의 점들이 움직이 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군의 마장기들이었다.
‘오늘 바로 알바트로스와 관련된 무언가를 발견하지는 않겠지? 병사 들에게 휴식도 주어야 하니 주둔 막 사를 세워야겠네.’ 거기까지 생각이 든 호는 바로 통 신구를 통해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명령을 받은 병사들은 물자
를 이용해 막사를 세우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뚝딱뚝딱 소리가 들리고 병사들은 알르드의 정예군답게 순식 간에 자신들의 막사를 완성시켜 나 갔다.
“멍멍! 호님. 지휘 막사가 완공되 었습니다. 조금 쉬시는 게 어떻겠습 니까?”
“그럴까?”
로우덴의 말에 호가 그렇게 대답하 며 마장기의 해치를 열었다. 확실히 마장기를 움직여서 계속해서 이동을 했던 터라 피로감이 살짝 있었다. 그리고 마장기의 조종석에서 내려와 땅이 발을 디디려는 찰나였다.
띵동
“……타이밍 한 번 거지같네.”
귀에 익숙한 소리와 함께 퀘스트가 나타났다.
“아니, 이렇게나 빨리 그리고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장소를 왜 이제까지 못 찾은 거야? 수인들을 죄다 눈이 뻬꾸야? 아니면 뭐, 마법진으로 숨 겨놓기라도 한 거야?”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운고로 산 을 수색하라는 명령을 내린지 십 분 이 채 지나지 않았다.
퀘스트의 내용은 확인하지 않았지 만 보나마나 알바트로스와 관련된 것이 갱신된 게 틀림없었다.
-‘짐승신의 전설’ 퀘스트가 발생합 니다.
[리그너스 대륙의 수인들은 짐승신 이라는 지고의 존재를 섬기는 것으 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짐승신은 창조신 리그로우의 또 다른 이름으로 리그로우는 자신의 권능을 사용해 수인들을 창조하고, 그들에게 녹의 힘을 부여했습니다.
하지만 리그로우가 수인들을 창조 할 당시 리그너스 대륙은 강력한 악 의 힘으로 인해 위험에 빠진 상황이었습니다. 호시탐탐 대륙을 집어삼 키려는 고대신들 때문이죠. 그리고 수인들은 이런 고대신의 악한 힘을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만들어낸 생명체인 수인들 이 악의 힘에 타락하는 모습을 보다 못한 리그로우는 자신이 창조한 수 인들에게 열 두기의 강력한 병기를 내려 주었습니다. 또한 직접 고대신 에게 맞설 용감한 영웅을 선택해 자 신의 권능이 깃든 강력한 무기를 주 었습니다.
그 무기의 이름은 ‘알바트로스’. 고 대신의 악을 꺾을 창조신의 병기입 니다.]
호가 퀘스트를 확인하는 사이 수상 한 장소를 발견했다는 보고가 전해 졌다.
“당장 던전으로 진입할 생각은 없 으니까 일단 병사들에게 휴식을 주 도록 해. 정찰에 나섰던 마장기사들 도 복귀시키도록.”
그리고 병사들의 상태를 확인한 호 는 던전의 공략에 앞서 휴식 명령을 내렸다.
자신의 힘을 회복하고 있는 고대신 -파이가론의 상태가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가뜩이나 행군으로 지친 병사들이었다. 게다가 마장기사들의 컨디션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어차피 열두 기의 모든 마장기를 찾지 않고서도 알바트로스가 숨겨진 장소를 발견한 상황.
하루이틀 정도 늦는다 하더라도 크 게 상관은 없을 것 같았다. 설마 이 하루 이틀 사이에 파이가론이 부활 할 것 같지도 않았다.
“정말로 운고로 산에 알바트로스가 숨겨져 있을 줄이야.”
“대체 저렇게 큰 통로를 왜 우리들 이 발견하지 못한 거지?”
“지도를 찾은 자만이 발견할 수 있
도록 마법으로 숨겨놨던 게 아닐까 요?”
그렇게 본격적인 알바트로스 수색 은 호가 운고로 산에 도착한지 이틀 후부터 시작되었다.
“그럼 진입하겠습니다.”
팔쿤의 목소리와 함께 조인족의 전 설급 마장기인 피닉스에서 붉은색의 빛이 일렁이더니, 굳게 닫혀 있는 문으로 쏘아졌다.
콰아아앙!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박살나며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먼 지 구름이 가라앉자 마장기들이 먼저 진입을 시작했다. 호도 한시진의 뒤를 따라 던전의 안으로 들어섰다.
그렇게 박살난 문을 지나치던 도중 호는 녹색의 희미한 결계가 던전을 감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 마 짐승신의 힘으로 보였다.
“어떤 녀석이 나타날지 모르니 경 계를 철저히 하도록.”
보상이 무려 s등급의 마장기인 알 바트로스다. 고대신 급의 적이 나타 난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호의 경고에 모두들 긴장한 표정으 로 이동을 시작했다. 전방에는 브로 리와 셰비트리들이 좌우 측면으로도 단단한 장갑을 지닌 마장기들이 철 저하게 병사들을 보호했다.
안으로 이동한지 몇 분. 하지만 몬 스터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보 스급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던전 내에 아무도 없는 게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창조신의 권 능으로 숨겨진 장소이지 않습니까? 몬스터들이 창조신의 힘을 버텨낼 리가 없죠.”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 던전의 모습 에 몇몇 마장기사들의 얼굴에 화색 이 감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호는 이들의 생각이 착각이라고 여겼다.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개발팀은 그렇게 착한 놈들이 아니 었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리그너스 대륙 전기’와 동일한 이 세계 또한 비슷 할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첫 번째 짐승의 시련이 나타납니 다.]
“그러면 그렇지. 이 녀석들은 내 예상을 벗어나지 못한다니까.”
메시지가 나타나자 호가 연달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날로 S등급의 마장기를 획 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적의 등장에 다들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호의 얼굴은 아무런 변화 가 없었다.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 실망도 없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