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그너스 대륙전기 425화
자신을 공격하는 무언가를 피해 호 인 남성이 다급한 얼굴로 지면을 박 차고 날아올랐다.
S등급의 영웅답게 호인 남성은 하 늘을 훨훨 날아 지붕위로 사뿐히 착 지했다.
그런 호인을 향해 검붉은 촉수가 슬금슬금 지붕을 타고 뻗어오고 있 었지만, 호인 남성은 자신을 노리는 촉수에게 신경을 집중할 수가 없었 다.
“이게 무슨……!”
호인 영웅의 눈동자에 사파리가 불 타오르는 모습이 들어오고 있었다. 끔찍하게 생긴 검붉은 촉수들이 도 시 전체를 감싸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뿐인가?
불과 몇 년 전, 수인 왕국에 큰 피 해를 주었던 루베릭 대륙의 괴물 킬 리만자로들의 모습도 보이고 있었 다.
갑작스러운 루베릭 대륙의 공격에 왕국의 수도인 사파리는 너무나도 무방비했다.
“여자와 아이들을 피신시켜라!”
“왕국을 지켜라! 크하악!!!”
한 용감한 수인이 무기를 들고 앞 으로 나섰다가 촉수들의 공격에 목 숨을 잃었다.
입구가 부푼 촉수들이 산성 체액을 쏘아내자마자 온 몸이 녹아버린 것 이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지키려 던 수인들도 촉수들의 산성 체액에 모두 녹아내렸다.
“이놈! 저리 꺼지지 못해!!”
케에에에엑!
주점에 있던 우(牛)인 영웅이 자신
의 메이스를 휘두르자 주위에 있던 촉수들이 폭발하듯 터지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우인 영웅의 용맹은 오래가 지 못했다. 촉수들의 비명에 하나, 둘 모인 킬리만자로들이 우인 영웅 을 노리고 공격을 시작했기 때문이 었다.
“음무워어어어!! !”
A등급 마장기에 필적하는 괴물들 의 공격에 우인 영웅의 몸은 수초도 지나지 않아 갈기갈기 찢겨졌다. 주 위에 있던 수인들 또한 휘말려서 목 숨을 잃었다.
알르드의 공격으로 수왕 아쉬토가 대다수의 병사들을 이끌고 원정을 나선 터라 사파리에는 루베릭 대륙 의 공격을 막아낼 병사들이 없었다.
제대로 지휘할 영웅들이 없는 소수 의 병사들은 촉수들의 공격에 순식 간에 와해됐고, 그나마 남아 있던 마장기들도 킬리만자로의 공격에 순 식간에 파괴가 되었다.
“루베릭 대륙의 녀석들이 대체 어 디에서 나타났단 말이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당장 수인들을 이끌고 후퇴해야 합 니다!”
“사파리를 버리더라도 어쩔 수 없 습니다!”
너무나도 좋지 않은 상황에 수인 왕국의 수뇌부들은 즉각적으로 판단 을 내리고 모든 이들에게 사파리에 서 도망을 치라는 명령을 내렸다. 어떻게 보면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무책임한 명령에 가까웠지만, 그것 말고는 당장 내릴 명령이 아무것도 없었다.
“도망쳐라!!!”
“모두 숨어!”
명령이 떨어졌지만 촉수들의 공격 에 가까스로 살아남은 수인들에게는 사파리를 벗어나는 일 또한 힘겨웠 다.
이미 성문 곳곳에는 킬리만자로들 이 진을 치고 있었고, 셀 수도 없는 많은 촉수 무리가 성벽을 넘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사파리의 남문. 화염과 비명으로 새카맣게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정 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커다란 이빨을 들이대며 밖으로 벗어나려던 백여 명의 수인 무리들에게 달려들 었다.
“으아아악!”
“아악! 살려줘!”
비명 소리가 순식간에 공기를 타고 흘렀다.
적지 않은 숫자의 수인들이 눈 깜 짝할 사이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피로 만들어진 웅덩 이 속에서 한 남성이 모습을 드러내 었다. 짙은 갈색의 피부와는 어울리 지 않는 새하얀 머리카락을 지닌 남 성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는 남자의 눈동자는 얼핏 보면 호인족을 연상케 할 정도 로 굽이쳐져 있었는데 세상 그 모든 것들을 깔보는 것 같은 오만함이 담겨져 있었다.
제8 파신-비야르키나.
리그너스 대륙의 배신자라 불리는 호인 영웅이자 루베릭 대륙의 파신 오으든을 끌어내리고, 그 자리를 대 신 차지한 사내였다.
그리고 그의 옆으로 수인이라면 누 구나 다 정체를 알고 있는 호인 여 성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내더니 기 다렸다는 듯 비야르키나의 품에 안 겼다.
“호위병으로 붙인 킬리만자로들이
모두 죽은 모양이더군.”
아란티아느를 한 손으로 꽉 끌어안 은 비야르키나가 그녀를 향해 말했 다. 그리고 잠시 그의 뺨에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가 뗀 아란티아느가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제 실수였어요. 알르드의 녀석들 이 그렇게나 빨리 흑묘로 위장한 킬 리만자로들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 곤 생각지 못했어요.”
“낭중지추라는 말처럼 약해빠진 수 인 병사들 사이에서 킬리만자로의 강력함은 어쩔 수 없이 티가 나기 마련이지. 뭐, 아쉽기는 하지만 중요 한 것은 그 녀석들이 아니니까.”
어느새 사방에서 울리던 비명소리 들이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드넓은 사파리의 대지가 짙 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아란티아느의 뺨 또한 어떤 기대감으로 붉어지고 있 었다. 파신의 힘에 의해 타락한 그 녀는 자신이 이 왕국의 여왕이었다 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드디어 시작인가요? 비야르키나?”
“그래. 수많은 생명을 대가로 한 마법진을 이용해 창조신의 그랜드 라인에 균열을 만들 거다. 최소한 나와 비슷한 힘을 지닌 파신 서넛 정도는 건너올 수 있도록 말이지.”
“리그너스 대륙의 정벌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겠군요.”
아란티아느가 비야르키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고, 비야르키나는 천 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동자 에 불에 활활 타고 있는 사파리의 모습이 새겨지고 있었다.
수왕과 아란티아느. 자신이 평생 염원하던 것을 아쉬토에게 빼앗긴 그는 리그너스 대륙을 버리고 악신 카테지나의 종이 되었다.
카테지나의 힘으로 자신이 빼앗긴
것을 모조리 차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중 하나인 아란티 아느를 타락시켜 자신의 것으로 만 들었다. 이제 남은 것은 왕의 자리 뿐이었다.
“이미 여신 카테지나께서도 허락하 셨다. 당장은 수인들의 희생이 상당 하겠지만, 리그너스 대륙의 정벌이 끝나면 이 대륙에 새로운 수인들의 왕국이 세워질 거다. 바로 이 비야 르키나의 왕국이 말이지.”
그렇게 자신의 계획을 드러낸 비야 르키나는 고개를 돌려 멀리 떨어진 수인 왕국의 왕성을 바라보았다. 그 는 사파리의 중심부에 위치한 왕국의 왕성에 피의 마법진을 그릴 생각 이었다.
“그랜드 라인에 균열을 만들어낸 마법진을 완성시키는 데는 보름 정 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분명 이 대 륙의 녀석들이 가만히 보고 있지만 은 않을 거다.”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나요? 비야르키나. 사파리와 가장 가까이 에 있는 세력인 천족들도 여기까지 오려면 그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게 분명해요.”
아란티아느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천족 뿐 아니라 드워프들 또한 그들이 자랑하는 드워르기니를 이용한다 하더라도 보름 내에 사파 리에 도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우리를 방해할 수 있는 녀 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 알르 드 윤 호, 그 녀석이 수인들과 손을 잡고 우리를 공격해 올지 모른다.”
“알르드의 지배자는 소환자잖아요? 과연 그가 우리의 뜻을 방해할까 요?”
“물론이지.”
루베릭 대륙의 병사들이 건너오게 되면 리그너스 대륙이 전화에 휩싸 일 것은 분명한 사실. 한 나라의 왕 이라는 작자가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아무리 그가 자신들과 는 다른 차원에서 온 소환자라 해도 말이다.
그리고 비야르키나가 아란티아느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 다.
“내가 피의 마법진을 완성시키는 동안 아란티아느 당신이 킬리만자로 와 나의 군대를 통솔해 알르드의 군 대를 막아줬으면 해.”
“알겠어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무 슨 일이라도 할게요/아란티아느가 자신감에 넘치는 모 습으로 말했다. 킬리만자로들과 강력한 파신의 군대라면 알르드의 잡 졸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을 터였 다.
“갑자기 어디서 이상한 놈들이 툭 튀어나와서는……
사파리의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갑 작스럽게 열린 회의에서 호가 한숨 을 푹푹 내쉬며 말했다.
악신 카테지나와 루베릭 대륙이라 는 이레귤러.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 내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이 세력들 은 호가 노예상인에게서 구입한 하 이엘프 에어리스의 입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루베릭 대륙은 강 력한 병사를 좋아하는 플레이어라면 충분히 흥미를 끌 법한 EX등급의 병사를 소환할 수 있는 세력이었다.
하지만 강력한 힘에는 대가가 따르 는 법. 까다로운 조건도 있었다.
EX등급의 병사 하나를 얻기 위해 서는 엄청난 수의 병사를 제물로 희 생해야만 했던 것이다. 물론, 실제로 이런 병사들이 있다면 마장기보다도 강력한 루베릭 대륙의 병사를 얻기 위해 희생을 감수할 만한 플레이어 는 분명 적지 않을 것 같았다.
강력한 병사를 보유한다는 것은 곧 빠르게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갈 수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만약 지금의 상황이 단순한 가상현 실게임이라면 혹은 모니터에 나타나 는 숫자에 불과했다면, 호 역시 루 베릭 대륙의 병사를 소환했을 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 세계는 가상현실이 아닌 현실. 그리고 루베릭 대륙의 병사를 소환한다는 것은 곧 대륙의 공적이 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였기에, 호는 루베릭 대륙에 관한 메시지가 여러 번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가 볍게 그 메시지를 무시했었다.
그리고 현재 그 루베릭 대륙의 칠 제나 다름없는 파신의 공격에 수인 왕국의 수도 사파리가 죽음의 도시 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희생자가 몇이라고?”
“시시각각 전해지는 정찰병들의 보 고에 따르면 메트로폴리스급 규모의 도시에서 살아남은 수인의 숫자가 십분 지 일이 채 안 되는 것 같습 니다. 멍멍. 많아도 만이 넘을 것 같은 않다고 합니다. 멍.”
“미친??????
“그리고 생존자들의 입에서 파신 비야르키나와 아란티아느를 목격했 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호는 입을 꾹 다물었다. 로우덴의 말을 들은 다른 영웅들도 표정이 어 주웠다.
하지만 엄청난 수의 수인이 희생됐 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놀라는 이는 몇 없었다.
다들 루베릭 대륙의 존재가 나타났 을 때부터 이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 른다고 내심 짐작을 하고 있던 모양 이었다.
그리고 굳은 표정을 짓고 있던 한 천사, 니나 다니엘레가 앞으로 나서 며 말했다.
“악신 카테지나는 리그너스 대륙의 모든 존재를 말살시킬 겁니다. 그리 고 죽은 영혼의 힘을 흡수해 자신의 힘을 키우고, 창조신의 권위에 도전 하겠지요.”
호가 이마를 찌푸렸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 아니, 경험한 적이 있는 내용이었다.
라헬과 카테지나가 자매격인 신이 라고 했던가?
그래서 그런지 서로 하려는 행동
또한 비슷한 것 같았다.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진 엔딩 또한 방금 전 니나 다니엘레가 말했던 것처럼 홀 러갔었다.
“그것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 아내야 합니다.”
결의에 찬 니나 다니엘레의 목소리 를 들으며 호는 자신의 눈을 감았 다.
라헬에 이어 이제는 카테지나라는 강력한 세력까지. 아직 리그너스 대 륙의 통일은커녕, 대륙을 지배하려 는 일곱 세력 중 단 하나도 정복하 지 못했는데 걸림돌이 계속해서 튀 어나오고 있었다.
게다가 상대는 대륙의 모든 생명체 들을 말살시키려는 잔혹한 악신이었 다. 그것도 엄청나게 강력한.
‘내가 가상현실게임 드래곤볼을 플 레이하는 것은 아니겠지?’
계속해서 점점 더 강력한 상대들이 튀어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한 번 헛생각을 해본 호는 자신의 이마를 꾹꾹 내리눌렀다. 손 가락에 힘을 줄 때마다 짜릿한 통증 이 느껴졌고, 그럴 때마다 빠르게 생각이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일단 정리하자면……
수인 왕국과의 전쟁은 끝이 난 것
이나 다름없었다. 수왕 아쉬토가 포 로로 붙잡혔고, 살아남은 수인 군대 도 투항했다.
루베릭 대륙의 존재가 없다 하더라 도 이들은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