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그너스 대륙전기-417화 (417/522)

리그너스 대륙전기 417화

“온다!”

“빌어먹을 놈들! 대체 숫자가 얼마 나 되는 거야?!”

강변 너머 멀리 보이는 희끄무레한 생명체를 확인하며 실비 문 하나가 느리게 자신의 검을 들어올렸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전투에는 SSS랭 크인 그들도 지칠 수밖에 없었다.

“백? 천? 아니면 만 단위인가?”

“그보다도 더 많을 지도 모르

지……

위기 상황에서 나오는 수인 왕국의 저력일까? 전선에 투입되는 토끼 부 족의 숫자는 2군단장인 한시진 아 니, 알르드의 예상을 훌쩍 뛰어 넘 었다.

변변찮은 마장기 전력도 없는데다 가 기껏해야 A랭크 이하의 수준으 로 이루어진 군대였지만, 죽음을 도 외시하고 끊임없이 덤벼드는 토끼 부족의 공세는 알르드의 막강한 병 사들도 기가 질릴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한시진은 토끼 부족의 맹렬 한 반격으로 인해 레이빗 강을 방패 로 방어선을 구축하고는 앞으로 진군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토끼 부족이 알르드의 군대를 물러나게 하려고 계속해서 공세를 가하는 상 황이었다.

“토끼 녀석들이 강을 넘습니다!”

척후병의 외침이 병사들의 귀로 파 고들었다. 얼핏 봐도 천 단위는 홀 쩍 넘어 보였다.

강을 넘는 수많은 회색 생명체들로 인해 일순간이지만 강의 흐름이 멈 춰선 것 같은 착각조차 들 정도였 다.

“공격할까요?”

“사령부의 지시는?”

“마장기 편대가 준비 중이라는 말 을 제외하면 특별한 지시는 아직까 지 없었습니다.”

알르드의 엘프 영웅이 병사의 말을 들으며 정면의 적을 응시했다. 적들 에게 확실한 피해를 주려면 지금처 럼 도강을 하는 도중에 공격을 가하 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문제라면 적 들의 숫자가 아군의 몇 배를 뛰어넘 는다는 점이었다.

“주위의 브뤼헤아 비쉬, 드래곤 라 이더 편대에게 연락을 취하도록. 적 들이 강의 도하를 끝내기 전에 우리 가 먼저 공격을 한다.”

그러한 말한 엘프 영웅은 자신의 활을 들어올렸다. 신목의 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A등급 아이템 으로 무력 능력을 증가시켜 주는 활 이었다.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곧 있을 전 투를 준비하며 다른 엘프 병사들도 자신들의 무기를 점검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친 실버 문 편대가 조금씩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삐이이! 삑!

토끼 종족 특유의 요란한 신호와 함께 시간이 지날수록 강을 건너는 적들의 숫자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다. 몇 십, 몇 백에서 이제는 천 이상의 토끼 병사가 강을 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쪽에는 그보다 도 더욱 많은 토끼 부족의 병사가 진을 치고 있었다.

“공격한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선두의 토끼 병사가 뭍에 발을 디 디는 것을 보자마자 엘프 영웅이 토 끼 병사를 노리고 자신의 활을 당기 면서 외쳤다. 그리고 빠르게 쏘아져 나간 화살이 토끼 병사의 머리를 꿰 뚫는 것과 함께 실버 문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카카캉! 캉!

“삐이이익! 적들의 공격이다! 삑!”

“빨리빨리 건너! 삐이이이이!”

실버 문들의 공격에 강을 건넌 토 끼 병사들이 몇 합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땅으로 쓰러졌다.

강을 건너느라 체력이 많이 소모된 탓도 있지만, A랭크에 불과한 그들 의 공방 능력으로는 그보다도 몇 배 나 높은 실버 문들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진형을 넓게 펼쳐라! 적들이 땅에 올라오지 못하도록 해! 모조리 물에 수장시켜 버려라!”

엘프 영웅이 강을 건너는 토끼 병 사들을 향해 빠르게 연사를 날리며 외쳤다. 토끼 병사들의 어마어마한 숫자로 인해 강 전체가 회색빛을 띄 고 있을 정도라 아무렇게나 화살을 날려도 명중이었다.

“세계수의 분노를 받아라!”

“호님을 위하여!”

지휘관의 지시 없이도 실버 문들은 알아서 자신들의 무기를 휘둘렀다. 일단 보이는 것이 전부 적들이었다. 그런 실버 문들의 공격에 물속에서 제대로 몸을 가늠할 수 없는 토끼 병사들은 별다른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간간히 눈 먼 무기가 실버 문들에 게 상처를 입히기는 했지만, 회복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보병답게 실 버 문들은 자신의 마법으로 빠르게 상처를 치유하고는 다시금 전장으로 나섰다.

그렇게 계속되는 실버 문의 공격에 토끼 병사들의 시체가 강을 뒤덮었 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알르드의 전 선은 조금씩 뒤로 밀리고 있었다.

실버 문의 수비 범위에 닿지 않은 곳에 상륙한 토끼 부족의 병사들이 진형을 갖추고 상하에서 압박해오고 있던 탓이었다.

“도대체 몇 마리나 되는 거야?!”

“이 빌어먹을 토끼 놈들!”

실버 문들이 검을 한 번 휘두를 때 마다 어김없이 한 명의 토끼 병 사가 죽어나갔다.

급하게 병력을 투입하느라 훈련이 부족했던 모양인지, 처음 A랭크였던 토끼 부족의 병사들은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B랭크들밖에 보이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C랭크 병사들도 조금씩 눈 에 들어오고 있었다. 실버 문들이 눈을 감고 가볍게 검을 휘둘러도 베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의 격차 가 크게 나는 병사들이었다.

그러나 그 숫자가 많아도 너무 많 았다. 실버 문의 검에 한 명의 토끼 병사가 쓰러지면, 그 틈으로 서너 마리의 토끼 병사가 파고들었다. 오 히려 실버 문들이 지닌 무기들이 토 끼 부족의 피로 인해 점점 무뎌지는 판국이었다.

“제기랄! 이 녀석들의 지휘관은 생 명의 소중함 따위는 전혀 모르는 거 냐?!”

실버 문들을 지휘하는 엘프 영웅이 화살통의 화살을 갈며 욕설을 내뱉 었다. 물량공세라는 말이 이럴 때 쓰는 것이었던가?

정말로 압도적인 숫자였다. 사방에 서 조여드는 토끼 부족의 공세에 서 서히 위기에 빠지는 실버 문들의 숫 자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엘프 영웅에게는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한 수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전장에 거의 다 도착했다는 보고가 방금 전에 있었다.

콰콰쾅!

토끼 병사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는 자리에서 커다란 폭발이 터져 나왔 다.

뜨거운 화염의 열기와 함께 순식간

에 수십의 토끼 병사가 일거에 무너 졌다. 대규모 살상마법이었다.

“삐이?! 삐이이!”

“마법이 어디에서? 하늘?! 적! 적 이다!”

갑작스러운 폭발에 당황한 토끼병 사들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하늘 의 적을 발견하고는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힘없이 날아간 화살들은 브 뤼헤아 비쉬가 펼친 마력의 장막을 뚫지 못하고 그대로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법 빗자루를 탄

브뤼헤아 비쉬의 숫자가 조금씩 늘 어나기 시작했다. 물량으로 밀어붙 이는 토끼 병사들에게는 천적이나 다름없는 광역살상마법이 가능한 마 법병이었다.

“드디어 왔군!”

“아군이다!”

브뤼헤아 비쉬 편대의 등장에 지친 실버 문들의 얼굴에도 화색이 감돌 았다.

“이거 적들이 엄청나게 많은걸? 쇼 타임인가?”

브뤼헤아 비쉬 편대를 지휘하는 서 큐버스 영웅 멜리아 비쉬가 전장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는 토끼 병사들 을 보며 자신의 입술을 날름거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병사들을 향해 명 령을 내렸다.

“모두 불태워버렷!”

멜리아 비쉬의 명령과 함께 사방에 서 폭발마법이 토끼 병사들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잠시 후, 브뤼헤아 비쉬 편대와 함 께 드래곤 라이더들까지 등장하면서 학살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토끼 부족은 자신들이 죽어 나가는 숫자 그 이상의 병사를 전선 에 투입했다. 그리고 가랑비에 옷젖는다는 말처럼 막강한 알르드의 군대도 토끼 부족의 공격에 의해 하 나, 둘씩 목숨을 잃기 시작했다.

결국 마장기까지 전투에 투입되고 나서야 전투가 일단락되었다.

아무리 머릿수로 밀어붙인다 하더 라도 마장기가 등장한 마당에 계속 해서 공격을 감행하는 건 토끼 부족 의 입장에서도 자살행위나 다름없었 다.

이번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토끼 부족의 병사는 적어도 십만 이상. 그에 반해 알르드의 피해는 천이 조 금 넘는 숫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며칠만 지나도 토끼 부족은 오늘 잃은 숫자 그 이상의 병력을 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다.

“마로. 너 역시 토끼 부족이잖아? 지금의 상황에 대한 해결책은 없는 거야?”

“삐이이. 우리 종족의 번식력은 정 말로 놀라운 수준입니다. 이론상 한 쌍의 토끼 부족이 일 년에 팔백 마 리의 집단으로 자랄 수 있으니까요. 특히나 지금과 같은 위급한 상황에 서는……

“제가 수인 왕국에 있었을 시절, 기억하고 있는 우리 종족의 숫자는 이천만 정도였습니다. 삐이이이……. 그게 1 년 전이니 지금은 좀 더 많 이 늘어났겠네요.”

마로의 말에 한시진은 순간 상념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살짝 고개를 흔들어 빠르게 현실로 돌아왔다. 토끼 부족이 어째 서 죽음을 도외시하고 달려드는 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백 만, 몇 천만의 숫자가 토끼 부족에 게는 얼마 되지 않는 수준에 불과한 것이다.

토끼 부족의 압도적인 물량에 관해 서는 넌지시 호에게 들은 적이 있었 다. 그러나 한시진은 토끼들의 숫자가 이 정도나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도 못했다.

“후우. 마장기 편대를 앞세워 천천 히 방어선을 구축하며 전진한다. 어 차피 저 녀석들이 할 수 있는 건 머릿수로 밀어붙이는 게 전부야. 토 끼 녀석들의 근거지를 발견하면 모 조리 불태워 버린다.”

결국 한시진은 전격전으로 상대를 돌파하려는 자신의 계획을 중단하고 는 토끼 부족의 영지를 하나하나씩 초토화시키기로 결정을 내렸다. 압 도적인 물량을 뿌리부터 뽑아버릴 생각이었다.

더불어 토끼 부족의 식량 생산 또

한 근절할 계획이었다.

아무리 머릿수가 많다 하더라도 그 들을 먹여 살릴 식량이 없으면 머릿 수는 있으나 마나였다.

그렇게 호의 1군단과 마찬가지로 한시진의 2군단도 토끼 부족의 물량 에 의해 발이 묶어버렸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기사왕 이 레네 아르티아의 3군단은 계속해서 사파리로 진격을 하고 있었다.

호와 한시진의 경우와는 달리 수인 왕국의 북부에는 기사왕의 진군을 가로막을 지형적인 조건이나 토끼 부족과 같은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야옹! 냐아옹!”

기껏해야 묘인족의 영토였던 미아 스카가 요새 역할을 하며 이들의 진 군을 막을 수 있는 도시였지만, 묘 인족의 대탈출 이후 미아스카는 현 재 중 도시 수준의 영지로 전락해 버렸다.

게다가 미아스카에 남아 있는 묘인 족들은 수인 왕국에 충성심이 별로 없는 이들이었고, 그 규모 또한 소 규모 군락의 수준에 불과했다.

“패배! 패배! 패배! 승리를 했다는 보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군!”

웅족의 장로 쿰마가 쾅하고 탁자를 내려치며 말했다. 그리고는 병색이 완연히 보이는 수왕 아쉬토를 향해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가?! 북쪽 에서는 그 기사왕이, 서부에서는 알 르드의 막강한 군단이 진격해오고 있네. 리자드 부족과 토끼 부족이 분투를 하며 막아내고는 있지만, 그 들의 전력으로 알르드를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은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걸세!”

예전 같았으면 수인 왕국의 주도권 을 잡기 위해 아쉬토의 전술적인 역 량을 시험해 보려는 의도가 담겨 있 을 물음이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다급한 상황에 서는 누가 주도권을 잡을지가 중요 한 게 아니었다. 당장 수인 왕국이 무너질 판국이었다.

계속된 전쟁에서 그나마 멀쩡한 전 력을 지니고 있는 수인 왕국의 부족 이라곤 호인족과 웅족이 전부였다. 수인 왕국을 이루는 열두 부족 중 대부분이 알르드에 충성을 맹세하거 나 계속된 전쟁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크르릉.”

그리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 아쉬토 가 쿰마의 물음에 답했다.

“내가 직접 나서서 리자드 부족과 토끼 부족과 손을 잡고 윤 호라는 애송이의 목을 물어뜯겠네. 자네가 북쪽의 기사왕을 맡아주게. 크릉.”

“뭐, 뭣이?! 우리가 기사왕을?”

“무리라고 말하지는 말게. 자네 부 족의 주력이 멀쩡하게 남아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크, 크홈.”

웅족과 권력 다툼을 하며 아쉬토는 그들이 지닌 저력에 대해서 그 누구 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쿰마의 표정은 여전히 떨떠 름했다. 웅족의 모든 것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그 기사왕을 상대로는 승 리를 점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무파사와 스카를 붙여주도 록 하지.”

“뭐라고?! 자, 자네!”

그러나 아쉬토의 입에서 호인족이 자랑하는 용맹한 영웅들의 이름이 언급되자, 쿰마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둘이 응족을 도와준다면 기사왕을 상대로도 충분 히 해볼 만 했다.

그러나 이 두 영웅이 빠진다는 것 은 그만큼 호인족의 전력이 약화된 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쿰마가 의심스러운 표정으 로 아쉬토를 바라볼 때였다.

“그제였나? 아란티아느가 내 곁으 로 돌아왔네. 그녀가 나를 도와줄 거야. 크릉.”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수십 년이 나 웅족을 대표했던 노련한 곰 영웅 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