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8
리그너스 대륙전기 388화
“계획을…… 바꾸라고요?”
뜬금없는 밴더빌트의 말에 호의 눈썹이 절로 꿈틀거렸다.
드워프들이 아무리 털털하고 거침없는 성격이라 해도 지금의 말은 알르드를 무시하는 무례한 행동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호의 표정이 짐짓 심각하게 변해갈 때, 밴더빌트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알르드가 견인들의 나라인 바우를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네. 이미 윗대가리들은 알르드를 정벌해야 한다고 난리도 아니야. 하지만 대족장 골드 스트리안과 족장 쿠퍼쏘우가 그것을 막고 있는 상황이지.”
“…….”
알르드와 바우의 관계는 어차피 들킬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나 빨리 드워프가 양국의 관계를 알아차릴 줄은 몰랐다. 호가 말없이 밴더빌트를 바라보다가 느릿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째서입니까?”
“자네들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겼네. 자세한 것은 들어가서 설명해 주지. 이왕이면 시원한 맥주도 한 통 준비해주면 좋겠는데.”
호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밴더빌트의 말을 들어보니 드워프들은 분명 알르드와 바우에 관계를 괘씸하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 전쟁을 벌이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만약 그럴 거였다면 굳이 밴더빌트가 귀찮게 자신을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다만 알르드에게 바우와 관련된 일에 대한 대가를 어느 정도 선에서 받아낼 생각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게 무엇인지는 밴더빌트의 말을 좀 더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
‘이상한 요구라면 차라리 그냥 한 판 붙어야 되려나…….’
솔직히 말해 적당한 선까지는 드워프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다. 수인 왕국과 천족 그리고 미피츠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드워프라는 강력한 적이 늘어나는 건 분명 껄끄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요구가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거라면 어쩔 수가 없었다.
“캬아! 맥주는 우리 드워프들이 만든 게 최고지만 인간들의 맥주도 나쁘지는 않단 말이야? 맛이 조금 심심하기는 해도 말이지.”
“가실 때 몇 통 보내드리죠.”
“오오! 그거 고맙군.”
토슬치의 응접실에서 모에드 지방에서 생산되는 맥주를 마시던 밴더빌트가 호의 깜짝 선물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분위기가 살짝 풀어질 무렵, 호가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골드 스트리안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 겁니까?”
“아, 별거 아니야. 자네가 우리 왕국의 던전을 하나 공략해 줬으면 하네.”
밴더빌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하지만 그러한 밴더빌트의 행동이 오히려 호의 의심을 만들고 있었다. 별 게 아닌 던전이라면 자기네들이 공략하면 될 일 아니던가?
“던전이요? 드워프의 용맹한 전사들이 공략하지 못하는 던전도 있답니까?”
“그런 곳이 있을 리가 있나? 크흠! 어쨌든 칼라시니코프에 문제가 생겼어. 새로운 던전이 하나 생겨났단 말이지.”
“칼리시니코프?”
바리안스의 대지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드워프들의 땅을 다스리는 족장 쿠퍼쏘우의 본거지이자 그의 거대한 용광로가 있는 도시의 이름이었다. 바리안스의 대지에서 남쪽으로 직진을 할 경우 열흘이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영지였다.
그런 곳에서 문제가 생겼다? 디아린을 통해 그에 대해 딱히 들은 기억이 없는 것을 보면 최근에 생겨난 일인 모양이었다.
“드워프들의 족장인 쿠퍼쏘우의 도시 아닙니까? 또한 드워프들이 자랑하는 거대한 용광로 중 하나고요. 그곳에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 그리고 그게 던전과 무슨 상관입니까?”
“사실 문제가 생긴 지는 오래 됐네. 단지 드워프들이 쉬쉬하고 있었기에 다른 이들이 알아차릴 수 없던 것뿐이지.”
“……그런가요?”
호가 눈을 껌뻑였다. 생각해보면 알르드가 급격한 확장을 꾀하고 여러 일들을 겪을 동안 쿠퍼쏘우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게 그냥 쿠퍼쏘우의 조용한 성격 때문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문제가 뭡니까? 던전이 생겼다면서요?”
“아주 간단한 일이네. A와 B 다음에 C가 오는 수준의 일이지. 칼라시니코프의 용광로에 던전에 생겨났는데, 그것을 자네가 공략해줬으면 하네.”
밴더빌트의 말에 호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왜 자신들의 땅에 생겨난 던전을 우리가 처리해야 한단 말인가? 아니, 고작 그런 일 때문에 밴더빌트가 대족장 골드 스트리안의 명령을 받고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 자체가 의문스럽게 느껴졌다.
그런 호의 담긴 의문을 알아차린 것일까? 밴더빌트가 마시던 맥주잔을 내려놓고 진지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던전의 명칭은 칼라시니코프의 용광로. 위험난이도 SSS등급으로 추정되며 칼라시니코프의 용광로에 열기를 불어넣던 ‘불의 정령 이그니타’가 고대신의 타락에 물들면서 생겨난 던전이네. 그리고 우리 드워프들은 이미 칼라시니코프의 용광로를 몇 번이나 공략한 전적이 있네. 죄다 실패했을 뿐이지만.”
“고대신?!”
호가 놀란 목소리로 외치듯 말했다. 그리고 밴더빌트는 그 저주받은 존재의 이름을 놀라는 호의 행동을 충분히 이해했다. 소환자이긴 해도 알르드의 군주 정도의 자리에 있는 이라면 그 이름 정도는 들어봤을 터였다.
“설마 칼리시니코프의 용광로에 고대신이 있는 겁니까?!”
만약 그렇다면 문제도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고대신의 무시무시함에 대해서는 ‘검의 왕좌’를 통해서 충분히 경험한 바 있었다. 그리고 뒤이은 밴더빌트의 대답에 호는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지는 않네. 고대신의 힘에 이그니타가 타락했을 뿐이지, 고대신이 발견되었다는 보고는 없었어. 하하! 그리고 고대신의 본체가 발견되었다면 우리가 가만히 있었겠나? 대륙에 왕창 소문을 냈겠지. 고대신을 막으려면 칠제가 힘을 합치고 여신 라헬이 대륙에 강림하는 수밖에 없어.”
“……와우.”
말만 들어보면 거의 대륙의 존폐를 가늠하는 대재앙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힘이 다 빠지기는 했지만 그런 존재를 자신과 한시진 둘이서 물리쳤다니? 다시 생각해 봐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타락한 불의 정령인 ‘이그니타’를 물리치면 되는 겁니까?”
“맞네. 알르드는 이미 몇 번이나 SSS등급 던전을 공략에 성공한 전적이 있지 않은가? 어려운 일은 아닐 거야. 그리고 칼리시니코프는 알르드의 국경에서도 가까우니 자리를 오래 비울 필요도 없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밴더빌트의 표정에는 약간이지만 다급함이 서려 있었다. 오래 전에 벌어진 일이라고 하면 칼리시피코프의 용광로는 드워프들에게 꽤나 골치를 썩이던 문제였을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몇 번이나 공략에 실패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로 인해 희생된 마장기나 병력을 생각하면 엄청난 손실을 겪었을 게 분명했다.
“음…….”
순간 드워프들의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 그들에게 무언가를 더 뜯어낼까도 싶었지만, 바우의 문제로 인해 이미 감정의 골에 틈이 생긴 상황에서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딱히, 꼭 뜯어내야 할 것도 없었고 말이다.
게다가 EX 승급 관련 문제와 자신과 한시진의 SSS등급 클래스의 승급으로 인해 알르드가 아닌 외부의 위험난이도 SSS등급의 던전 공략이 필요한 상황이기도 했다.
호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자, 밴더빌트가 나름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네가 칼라시니코프의 용광로 문제를 해결해 준다면 우리는 바우의 국경에 배치된 병력을 뒤로 물리도록 하겠네. 이는 대족장 골드 스트리안의 전언이며 그는 이미 자신의 용광로와 망치를 걸고 맹세를 한 바가 있네. 그 빌어먹도록 골치 아픈 것만 처리해주면 우리는 여전히 자네를 친구로 대할 거야.”
드워프들이 그렇게 나온다면, 바우는 굳이 드워프와의 국경에 많은 수의 병력을 배치시킬 필요가 없었다. 또한 군사적으로 낭비되던 자원들을 영토의 발전에 사용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던전의 공략을 위해 당장 병력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아직 묘인족의 이주가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런 호의 사정을 들은 밴더빌트가 거침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묘인족의 이주 말인가? 한 달간 우리들의 장인들을 빌려주겠네. 우리 드워프들의 손재주라면 그 녀석들의 주거지쯤이야 뚝딱이지. 그래도 장인들의 임금 정도는 알르드에서 지불해 주면 좋겠네. 돈 보다는 끝내주는 맥주 정도면 충분할거야.”
하지만 칼리시니코프의 용광로 문제는 호의 생각보다도 훨씬 심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호는 골드 스트리안의 말을 가져온 밴더빌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미피츠와의 전쟁 전에 SSS등급의 던전 두어 곳 정도는 공략을 할 생각이었기에 나쁠 것이 하나도 없었다.
* * *
“찍찍. 드워프 왕국의 던전이요?”
다람쥐족 전용의 전설급 마장기 프랭스의 오너이자 토슬치의 영주인 라쿤이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당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드워프의 족장 중 한 명인 쿠퍼쏘우가 다스리는 칼리시니코프에 있는 던전이야. 고대신의 힘에 타락한 불의 정령이 칼리시니코프의 용광로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 모양인가 봐.”
“그곳을 우리가 공략해야 하는군요. 그런데 어째서 이 시기에…… 어엇?! 아! 그래서 최근 영지에 드워프 장인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던 겁니까?! 찍!”
“그래. 던전의 공략에 대한 대가를 미리 받은 셈이지. 출정은 묘인족의 이주로 인한 영토의 안정화가 끝난 이후니까……. 길게 두 달 뒤로 잡으면 될 거야.”
“그 정도야. 찍찍. 그래도 지금부터 미리 준비를 해놔야겠습니다.”
라쿤이 서류를 뒤적이며 영지의 현 상황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호의 경우에는 상태창을 이용해 간단하게 확인이 가능했지만, 대륙의 영웅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서류를 확인한 라쿤이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다.
“그리고 그 정도의 시간이라면 묘인족의 이주에 관련된 문제도 모두를 해결하는 것은 힘들겠지만, 급한 불 정도는 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찌익. 물론, 바리안스의 대지를 다스리는 패자가 도와줘야 하겠지만요.”
“묘인족의 이주에 관해서는 리셴르나에게 좀 더 무리한 요구를 해도 돼. 이 일이 누구 때문에 일어났는데.”
“찍찍.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은데 그게 생각보다 쉽지가 않습니다.”
호의 말에 라쿤은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머리를 긁적였다. 리셴르나는 과거 수인 왕국의 십이멀이었던 용장인데다가 알르드의 짬밥 역시 라쿤보다 훨씬 많이 먹은 영웅이었다. 그런 탓에 무엇을 요구하는 게 쉽지가 않았다.
“어쨌든 좀 더 많은 수의 묘인들을 바리안스의 대지로 이주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군트락에 묘인들이 많이 늘어나면서 우리 종족의 생활 반경이 크게 줄어들었거든요.”
“으응? 아!”
호가 탄성을 터뜨렸다. 쥐의 천적은 고양이다. 그리고 다람쥐 역시 쥐에 속하는 동물이었다.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묘인족은 ‘냥아치, 냥건달, 냥깡패’ 등 폭력성을 띤 다양한 수식어가 앞에 붙는 종족이었다.
자신들의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심술쟁이에 사고뭉치로 돌변하는데다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성질이 더러운 종족이었기에 견인족과 다람쥐족은 물론이고 조인족이나 토끼 종족도 묘인들과는 부딪치기 않기 위해 애를 쓰곤 했다.
그래도 원하는 것만 잘 제공한다면 말을 잘 듣는 종족이었고, 알르드에는 묘인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 비장의 무기가 하나 있었다. 바로 바리안스의 대지에서 생산되는 엄청난 양의 캣잎이었다.
그 어떤 고양이라도 캣잎이라는 절대 무기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현재 알르드에 임관한 묘인 영웅들 중 반수 이상은 돈이 아닌 캣잎으로 월급을 받을 수 있냐고 물어볼 정도로 캣잎에 대한 묘인들의 사랑은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두 달이라는 시간이 쏘아진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