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4
리그너스 대륙전기 384화
“음뭐어어!!!”
알르드의 영웅이자 카우셰드의 군주인 웃소의 창이 대기를 가르며 하늘을 수놓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휘둘러진 수십 번의 창격이 그를 향해 달려들던 수인 병사들을 순식간에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잠시 후, 웃소의 창끝이 바닥을 가리켰고, 몸 어딘가에 구멍이 하나씩 뚫린 적들은 살아 있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전보다 움직임이 더 매서워진 것 같네요?”
“아닙니다, 아쉬카로트 님. 음뭐어. 저는 아직 부족합니다.”
창날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웃소가 말했다. 그러자 그의 옆에 있는 나무 기둥에 몸을 기대고 있던 호인 여성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나저나 묘인들의 이주를 틈타서 함께 넘어오는 수인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음뭐. 이대로라면 호올스에 있는 주둔 병력만으로는 통솔이 힘들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카우셰드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디치 플레이스만과 페렛 습지대의 군주에서도 연락을 보냈으니 곧 응답이 올 겁니다.”
“음뭐.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소문을 듣자하니 내전이 벌어졌다고 하던데……. 정말로 수인 왕국이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는 겁니까?”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겠네요.”
대답과 함께 아쉬카로트는 가만히 사파리가 있는 남동쪽을 바라보았다.
지난 일주일, 호올스의 알르드 군은 국경을 넘어오는 묘인족과 다른 수인들을 통솔하느라 정신이 없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와 더불어 그들을 쫓아오는 수인 왕국의 군대를 계속해서 몰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묘인족의 이주는 지금도 현재 진행 중에 있었다.
그나마 웃소와 아쉬카로트 이 둘의 입장에서 다행인 점은 묘인족 대다수가 호올스가 아닌 군트락을 통해 알르드로 넘어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올스의 국경을 넘은 묘인족의 숫자는 벌써 칠십만이 넘어가고 있었다. 대도시 대여섯을 이룰 수 있는 인구였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수인 왕국의 힘든 생활에 지친 수인들 또한 이틈을 틈 타 알르드로 함께 넘어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적들입니다.”
“음뭐. 이거 쉴 틈이 없군.”
웃소와 대화를 나누던 아쉬카로트가 멀리서 느껴지는 살기를 파악하고는 자신의 마장기에 탑승했다. 웃소 또한 자신의 전용기인 타우러스에 올라탔다.
알르드는 이주를 시작한 묘인족들을 모조리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미 랙돌에게서 언질을 받은 터라 그들을 받아들일 준비 또한 대충이나마 해놓은 상황이었다.
리셴르나가 군주로 있는 바리안스의 대지에는 위로 층을 올린 빈 건물들이 팀 ‘심시티’의 지휘 아래에 하루에도 몇 채씩 지어지고 있었다. 또한 디아린 상단의 영웅들이 많은 양의 식량을 바리안스의 대지로 수송하고 있었다.
그런 묘인들의 행동을 강제적으로 막기 위해 수인 군대가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이주를 하는 묘인들을 지키기 위해 알르드의 군대가 나섰고, 수인 왕국의 영토 곳곳에 요새가 지어지면서 묘인들을 보호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 * *
“……후.”
견인족의 장로 말라뮤트가 한숨과 함께 눈을 떴다.
그러자 익숙한 풍경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텅 빈 사파리의 회의장이었다. 평소라면 각 종족의 장로들과 그들을 모시는 호위들로 인해 바글바글해야 했을 장소였다.
하지만 대 회의의 시작 시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회의장에 모습을 드러낸 종족은 견인족을 포함해 원래는 대 회의에 참가하지도 못할 중소 규모의 종족에서 나온 인원 네다섯이 고작이었다.
“이래서야 회의는 물 건너갔군.”
“아무래도 다들 각자 회의를 하려는 모양입니다. 이래서야 왕국이 어떻게 될지…….”
말라뮤트의 부관이 걱정을 가득 담아 말했다.
호인족과 웅족의 권력 다툼이 극에 오른 상황에서 수인 왕국의 위기는 극에 달해 있었다. 자신들의 터전에서 이주하라는 사파리의 결정에 불만을 품은 묘인들은 왕국을 등지고 알르드로 대이주를 감행하고 있었고, 남서쪽 국경에서는 드워프들이 점점 노골적으로 도발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드워프들을 막고 있는 종족은 다름 아닌 말라뮤트의 견인족이었다.
“어떻게든 지원군을 요청해야 하는데……. 이거 곤란하게 됐군.”
“호인족을 찾아가서 부탁을 하는 게 어떨까요? 장로님. 호인들이 웅족과 권력 싸움을 벌이는 중이라지만 우리의 위기를 모른 척 하지는 않을 겁니다. 자칫 드워프들과 전면전이라도 벌어지면 우리들만으로는 막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야지, 어쩔 수 없겠어.”
아쉬운 소리로 인해 자존심이 상하기에는 견인족의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부관의 말대로 드워프와 전면전이 벌어지게 되면 견인족은 결코 그들을 막아낼 수 없었다. 아무리 견인족이 수인 왕국의 대 부족 중 하나라지만 리그너스 대륙의 패권을 다투는 세력 중 하나인 드워프들을 상대하는 건 다른 종족들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욱이 견인족은 최근의 여러 전쟁으로 인해 많은 수의 전사들을 잃은 상황이기도 했다. 그렇게 빈 회의장을 지키고 있던 말라뮤트가 수인들의 왕을 만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지원군이 필요하다고?”
“그렇소.”
단지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압박감이 느껴지는 눈빛. 병상에 있으면서도 견인족의 장로인 말라뮤트를 긴장하게 만드는 그는 바로 수인들의 왕 아쉬토였다.
“드워프들이 우리의 땅을 노리고 있소. 당장이라도 병력을 이끌고 국경을 넘을 기세요.”
“허. 멍청한 난장이들이 땅 속에서만 있다 보니 드디어 정신이 나간 모양이로군.”
말라뮤트의 말에 아쉬토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웃을 일이 아니요. 국경을 지킬 병사 오십만과 마장기 백여 기가 필요하오.”
“음…….”
하지만 병력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말에 아쉬토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부상으로 인해 병상에 누워만 있는 상황이긴 했지만 그의 귀로 들리는 이야기는 굉장히 많았다. 그리고 현재 자신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권력 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호인들에게 그 정도 숫자의 병력을 빼라는 명령을 내리면 오히려 내가 위험해. 그렇다고 아란티아느가 있어 두 종족을 중재할 수 있으면 모르겠지만, 그녀마저 없는 지금 그대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군.”
자신의 부인 아란티아느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아쉬토의 얼굴에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현재 아란티아느는 실종 중이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녀의 실종이 대륙의 배신자 비야르키나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각 종족의 수뇌부라면 다들 알며 쉬쉬하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아란티아느가 비야르키나와 눈이 맞아 도망을 갔다는 이야기였다.
아쉬토가 큰 부상을 입은 이유 역시 파신이 되어버린 비야르키나와 그의 분신 킬리만자로가 나타났을 때 자신의 목숨을 도외시하고 덤볐기 때문이었다. 자세한 사실은 알 수 없지만, 비야르키나에 대한 아쉬토의 끝없는 분노는 아란티아느와 관련이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말라뮤트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아쉬토의 상처가 아니었다. 그의 상황이 안쓰럽기는 하지만 아쉬토는 수인 왕국의 왕으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아, 아니. 이건 왕국의 위기가 달린 상황이요!”
아쉬토의 말에 말라뮤트의 얼굴에 새하얗게 변했다. 아무리 권력 다툼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왕국이 무너지면 모든 게 끝이었다. 그러나 아쉬토는 말라뮤트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했다.
“나도 알아. 하지만 호인들은 부상을 입은 내 말을 듣지 않아. 그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건 오로지 강한 전사뿐이니까.”
아쉬토의 말에 말라뮤트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는 인상을 굳혔다. 이대로라면 자신들은 그 때의 비극을 또 마주할 지도 몰랐다. 인간들의 손에 견인족을 이루는 부족 하나가 전멸했던 끔찍한 사건, 지금은 ‘셰필드의 난’ 이라 부르는 사고였다.
‘아니, 그 때보다 더한 일이 벌어질 거다.’
드워프들의 힘은 셰필드의 난을 일으킨 발란스 가문보다도 훨씬 강한 세력이었다.
견인족은커녕 수인 왕국 전체가 힘을 모아야지만 상대가 가능했다. 두터운 장갑으로 무장한 그들의 병사는 웅족의 가죽보다도 질기고 단단했고, 묵직한 중장비는 수인 왕국의 보병을 어렵지 않게 분쇄시켰다.
“지금의 결정으로 인해 왕국은 분명 큰 후회를 하게 될 거요.”
“그렇겠지. 하지만 내가 왕으로써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큰 부상을 입은 상황에서 이미 나는 왕의 권한을 잃었으니…….”
아쉬토가 쓸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고 있어야 할 말라뮤트는 이미 자리를 벗어나고 없었다.
* * *
수인 왕국의 수도 사파리에 머무르던 말라뮤트가 아쉬토와의 대화를 마친 후 자신의 세력을 모두 이끌고 견인족의 영토로 돌아가고 있을 무렵, 호는 군트락의 주도 토슬치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 무려 수백만의 수인들이 이주를 해오는 이벤트였기에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림드 산맥에 가만히 앉아 다른 영웅들의 보고만 받을 수는 없던 탓이었다.
물론, 이 말고도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 같았다.
하지만 당장 묘인족의 이주 때문에 그 근방의 영지들은 곤경에 처해 있었다. 또한 급격하게 늘어나는 인구들로 인해 리스와 식량 상황도 말이 아니었다.
그뿐인가? 치안을 시작으로 주거, 환경 등 다양한 문제들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집? 북쪽의 주거지역 공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일단 나무 기둥에 헝겊만 덮어 놓은 천막에서라도 쉬게 한 후에 바로 바리안스의 대지로 보내도록 해.”
“묘인들끼리 싸우는 사고가 벌어졌다고? 하! 당장 실버 문들을 보내서 처리해. 그런 싸움을 그냥 지켜보면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야? 알르드에 발을 디딘 이상 묘인들도 알르드의 국민이다. 법대로 하라고.”
“뭐? 리스가 부족해? 음……. 일단 마장기의 생산을 중지하고 그쪽에 사용해야 할 돈을 다른 곳으로 돌려. 전쟁이 벌어지면 다른 영지의 마장기를 배치시키면 아무 문제도 없을 거다.”
“드레이크의 심장을 구했다고? 림드 산맥의 벨에게 보내. 그리고 이것을 사용하면 전직할 수 있다고 전하면 그녀가 알아서 처리할 거야.”
영지에서 일어날 법한 사고들은 이미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에서 질리도록 경험해 본 바 있기에, 영지를 정상화시키려는 호의 명령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 때문인지 호는 정치 능력 S 나 SS등급의 영웅들보다도 훨씬 빠르게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호의 정치 능력은 한계 수치 750의 SS등급이기도 했다. 게다가 알르드의 군주가 묘인들을 위해 토슬치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혼란스러웠던 영지의 분위기가 조금씩 차분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주가 진행되고 있는 국경은 전쟁 통이나 다름없었다. 하루에도 수만, 수십만에 달하는 수인들이 몰려오고 있었고, 그들을 막아서는 수인 군대의 등장으로 여기저기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후. 이거 뭐, 일분일초가 멀다하고 문제가 쏟아져 나오니…….”
“그래도 다행입니다. 군주님께서 오신 뒤로 병사들의 통솔에 따르는 묘인들이 많아졌습니다. 하하! 수인 왕국의 군대가 나타나는 빈도도 줄어들었고요.”
토슬치에 배치된 엘프 영웅의 말이었다. 호가 오기 전, 묘인들을 관리하느라 엄청나게 고생을 한 탓인지 첫 만남에는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 정도로 체력이 바닥을 기고 있던 영웅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피부에 불그스름한 색이 돌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엘프라는 종족과는 어울리지 않는 퀭한 얼굴이었다.
“현재까지 몇 명이나 이주했지?”
“삼백만 정도가 국경을 넘은 것으로 파악됩니다만, 묘인족이 아닌 다른 수인들의 수까지 합친다면 삼백오십 만에 가까운 숫자입니다.”
“휘유…….”
호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지만, 이건 뭐 숫제 디르시나를 제외한 림드 산맥의 도시 하나에 속한 인구가 통째로 이주해 오는 격이었다. 하기야 이러니 군트락을 비롯한 주위의 영지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리라.
“그러면 다시 문젯거리들을 해결해야겠군.”
엘프 영웅과의 짧은 대화를 끝내고, 호는 다시 밀려오는 메시지를 읽으며 서류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시간가량의 시간이 흘렀을까?
“알르드의 군주를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집무실을 찾은 하얀색 털이 매력적인 묘인 남성이 호를 향해 인사를 올렸다. 묘인족의 장로이자 SS등급의 영웅인 랙돌이었다.
그리고 호는 그런 랙돌을 보며 반가운 음성을 말했다.
“마침 좋은 타이밍에 왔는데? 그렇지 않아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이 많아서 말이야.”
“아……. 제 도움이 필요하신 겁니까?”
“물론이지.”
이미 랙돌의 능력은 상태 창으로 확인을 끝냈다. 그의 정치 능력은 A랭크.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장 영지의 일에 투입되는 것은 상관없지만 그보다도 먼저 드려야 할 말이 있습니다, 호 님.”
랙돌이 자신의 이마를 긁적였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그의 얼굴에는 난처함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