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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너스 대륙전기-383화 (383/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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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너스 대륙전기 383화

“장로님! 지금이라도 생각을 재고해 주십시오! 왕국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공허한 얼굴로 국경을 넘는 동족들을 바라보던 랙돌이 말을 꺼낸 이를 바라보았다. 젊은 묘인족 영웅이었다. 그는 분노한 얼굴로 랙돌을 노려보고 있었다.

“왕국을 버리다니? 누가? 오히려 우리 묘인들이 왕국에서 버림받은 종족이 아닌가? 우리의 터전인 미아스카를 떠나게 만든 이들이 대체 누구지?”

“그건 어쩔 수 없는 희생입니다. 왕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외세의 침입을 방어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우리 종족이 왕국의 방패로 선택되었을 뿐입니다!”

젊은 영웅의 말에 랙돌이 웃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사파리의 그런 결정으로 인해 원인, 조인, 우인, 마인(馬人)들처럼 왕국을 이루던 종족들이 적들의 공격을 받아 터전을 잃거나 왕국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제껏 그들이 최전선에서 적들과 싸우며 많은 희생을 치르는 동안 사파리에서는 무엇을 했지?”

“…….”

“기껏해야 병력 소수, 마장기 몇 기를 지원했을 뿐이다. 우리가 최전선에서 전쟁을 벌인다 하더라도 사파리에서 우리의 공을 알아줄까? 아니다. 그건 자네도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렇지만…….”

“그럴 바에는 우리 묘인들이 덧없는 희생을 치르는 것 보다 차라리 왕국을 버리는 것을 택하는 게 우리의 미래에 도움이 될 거라는 게 내 선택이었다. 그리고 알르드는 이미 많은 수의 묘인들이 살고 있는 왕국이다. 그 리셴르나도 있으니 정착에 어려움은 없을 거다.”

랙돌은 눈앞의 젊은 영웅을 향해 슬픈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미 이주가 시작되었지만, 그 역시도 수인 왕국을 떠나는 것에 복잡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묘인족의 장로로서 종족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라고 위안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장로님!”

두 영웅의 대화는 랙돌을 부르는 묘인 병사의 등장에 의해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수인 왕국의 S 랭크 보병 흑묘가 랙돌의 앞에서 한 쪽 무릎을 꿇으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인 왕국의 군대가 나타났습니다! 후방에서 라홀로프 상단의 병사들이 그들을 상대하고 있지만, 마장기의 차이 때문에 급속도로 밀리는 중입니다. 그 녀석들! 다짜고짜 우리를 공격했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래, 군대의 지휘관은 누구지?”

“정확한 정체는 밝히지 못했습니다만, 웅족의 영웅으로 추정됩니다.”

흑묘의 말에 랙돌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리적 위치상 웅족의 장로 쿰마가 직접 나서지는 않았을 테지만, 호인족과 내전을 벌이고 있는 웅족의 영웅이 이 먼 곳까지 나타났다는 사실이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깊게 생각을 할 시간이 없었다. 그들을 물리치지 못한다면 분노한 그들의 손에 얼마나 많은 묘인들이 죽어나갈지 알 수 없었다.

“캬사캬사를 준비해라. 내가 나가겠다.”

“저도 준비하겠습니다.”

랙돌의 옆에서 불편한 표정을 짓던 젊은 묘인 영웅도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웨어 타이거급 전용기인 카샤카샤에 탑승한 랙돌은 지체 없이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후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라홀로프 상단을 공격하는 수인 군대를 확인한 순간, 그의 입에서는 낮은 침음이 흘러 나왔다.

빼액곰과 함께 곰 형태를 지닌 B등급 마장기인 그리즐리가 다수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홀로프 상단의 병사들이 속절없이 밀리고 있는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상대는 수인 왕국 내에서도 호인족 다음으로 전투력이 뛰어난 웅족의 군대가 틀림없었다.

묘인족을 공격하는 수인 병사의 수는 이만 가량에 불과했다. 하지만 얕볼 수는 없었다. 알르드로 이주를 하고 있는 종족들을 통솔 및 보호하느라 많은 병사들이 흩어진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적군의 랭크 및 훈련 상황은 아군보다 나아 보였다. 마장기 전력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면으로 싸우면 승산이 거의 없었다.

“흑묘들은 방어진형을 펼쳐 적들의 돌격을 막고, 제 1, 2마장기 편대가 흑묘들을 돕는다! 켄타우로스 전사와 하피 쉴더는 좌, 우측으로 전장을 넓히며 적들의 시선을 끌고, 다람쥐 석궁수들은 후방의 궁병과 마법병을 위주로 화살을 발사해라! 난 뒤로 돌아서 기습을 가하겠다!”

수인 왕국의 이름난 용장 중 한 명답게 빠르게 전황을 파악한 랙돌이 명령을 내리고는 후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까 전, 그와 말다툼을 하던 묘인 영웅이 아군을 향해 달려드는 웅족 영웅을 막아섰다.

“캬아아앙! 미련 곰탱이들이 감히 우리들을 공격해?!”

묵직한 앞발 후려치기를 가까스로 막아낸 묘인 영웅이 날카롭게 발톱을 세우며 외쳤다. 그러자 그리즐리에 탑승한 웅족 영웅이 지지 않겠다는 듯 소리를 높였다.

“댕댕이보다 못한 배신자 녀석들아! 크와아앙! 네놈들이 왕국을 배신하고 알르드에 빌붙으리라는 것을 우리가 모를 줄 알았느냐!!! 이 쓸개도 없는 자식들! 하는 짓이 귀여워서 십이 종족에 넣어줬더니만 감히 우리의 뒤통수를 쳐?!”

웅족 영웅의 목소리에는 강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가 묘인족의 이러한 움직임을 파악하게 된 것은 운이 좋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호인족과의 세력 싸움이 본격화 되면서 묘인족에게 동맹을 제안하려고 이동하던 중 그들의 수상한 움직임을 발견하게 됐기 때문이었다.

“지랄! 원래의 십이 종족에는 네놈 같은 곰탱이들도 없었다! 그리고 네놈들이 뭘 잘했다고 큰 소리야!”

“충성심이라고는 털끝 하나만큼도 없는 녀석들이 말은 잘하는구나! 왕국의 십이멀인 리셴르나가 배신을 할 때부터 네놈들이 배신의 종족이라는 것을 알아봤어야 했다!”

“우리가 원래부터 이랬냐? 캬앙! 우리는 미래가 없는 왕국을 빠르게 손절하는 것뿐이다, 이 곰탱이 녀석아! 아니, 왕국이 흔들리게 된 것이 네놈들이 자랑하던 화이트베가 알르드를 공격했다가 병력을 갈아먹고 난 이후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겠지?”

“……큭!”

“그것도 몇 명이었더라? 무려 이백만이 넘었던 것 같은데? 피융신. 그리고도 땅 하나 못 뺏었다며? 오히려 알르드의 공격에 죄 없는 다람쥐들만 죽어나갔다지? 다람쥐 녀석들한테 가서 무릎 꿇고 사죄나 해라!!! 그러고도 네놈들이 할 말이 있어?!”

“크하악! 죽여 버리겠다!!!”

묘인 영웅의 도발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웅족 영웅이 미친 듯이 자신의 팔을 휘둘렀고, 그것을 시작으로 강철의 거인들이 서로의 목숨을 걸고 강렬하게 부딪치기 시작했다.

그리즐리와 웨어 타이거 편대의 대결. 묘인 영웅들은 시작부터 자신 있게 상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날렵한 움직임으로 상대의 급소를 공격해 무력화시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장갑이 단단한 그리즐리의 본체에 타격을 입히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마장기사들이 묘인 내에서도 이름이 난 엘리트라지만 웅족 영웅들의 실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리즐리들은 자신들의 단단한 장갑을 앞세워 날렵한 움직임을 자랑하는 웨어 타이거들을 조금씩 자신들의 공간 안으로 가두려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공간에 갇히는 순간….

“캬아아아아앙!”

콰직! 콰직!!!

여러 기의 그리즐리가 동시에 휘두른 강철의 손에 의해 웨어 타이거급 마장기가 그대로 찢겨져 나갔다. 무지막지한 파괴력이었다.

아군의 마장기가 순식간에 고철이 되어버리는 모습에 묘인 영웅들의 움직임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처럼 적극적으로 공격을 가하던 행동이 큰 폭으로 줄어든 것이다. 덕분에 웅족 영웅들은 자신감 있게 공세를 펼칠 수 있었고, 이는 곧 묘인 병사들의 피해로 이어졌다.

“이 자식들!”

기습을 하려다가 다급하게 달려든 랙돌이 아니었다면 적들의 보병을 막아내던 흑묘들은 그리즐리의 지원 포격에 그대로 전멸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랙돌이 전투에 참전했다 하더라도 전황은 딱히 나아지지 않았다. 그리즐리와 웨어 타이거. 이 두 마장기는 상성이 너무 좋지 않았다.

분노한 웅족 영웅들의 살기가 랙돌을 포함한 묘인들을 노리고 있었다. 바위처럼 다가오는 그들을 보며 묘인 영웅들의 얼굴에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생겨났다. 도망을 치려면 도망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자리를 뜨게 되면 몇 명이나 되는 동족이 목숨을 잃을지 알 수 없었다.

잔뜩 화가 난 그들은 묘인족의 사정 따위는 봐주지 않고 무기를 휘두를 게 분명했다. 더욱이 웅족의 포악성은 호인족과 비슷한 수준이라는 말이 돌 정도로 유명했다. 하지만 모든 이가 여기서 목숨을 잃을 수는 없었다.

“랙돌 님!”

젊은 묘인 영웅이 랙돌의 이름을 불렀다. 여기서 빠져나가라는 말이었다. 수백만이 넘는 묘인족을 제대로 통솔하기 위해서는 랙돌의 존재는 필수였다. 그 순간, 웅족의 날카로운 발톱이 동시에 랙돌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들 역시 묘인족의 장로인 랙돌을 여기서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이놈들!!!”

묘인족의 장로답게 분노한 랙돌은 웅족 영웅들을 거칠게 몰아붙였다. 하지만 그 시간은 길지 못했다. 카샤카샤의 무기는 그리즐리의 단단한 장갑을 뚫어낼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카샤카샤의 동체에 흉측한 상처가 만들어졌고, 랙돌의 내쉬는 숨 또한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쿠워어엉! 이때다!”

“큭! 이런?!”

그리고 그리즐리의 기습적인 공격에 당한 랙돌의 카샤카샤가 오른쪽 다리를 잃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렇게 랙돌을 포함한 묘인 영웅들의 얼굴에 암운이 드리워질 때였다.

귀청을 찢는 소리와 함께 하늘 위에서 마장기 한 기가 랙돌의 숨통을 끊어내기 위해 접근하려던 그리즐리를 그대로 깔아뭉개며 떨어져 내렸다.

“저건……? 코우랄라?”

원인과 비슷한 생김새를 한 황금색의 마장기.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랙돌은 자신들의 눈앞에 나타난 마장기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알르드 소속인 저 마장기의 주인은 인간과 수인의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영웅이었다. 그리고 그 무용은 수인들의 왕 아쉬토를 떠오르게 할 정도로 대단하다고 했다.

“다 덤벼! 이 자식들아! 약한 놈들 괴롭히지 말고 나랑 싸워보자!!!”

그리고 그 소문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쿠왓!

SSS등급의 영웅이자 EX등급의 무력을 자랑하는 브로리의 어마어마한 마력이 주위로 폭포수처럼 뻗어나갔다. 그 순간, 이제까지 묘인 영웅들을 몰아붙이던 웅족 영웅들의 기세가 꺼져 가는 촛불처럼 사그라졌다. 브로리의 힘을 느낀 그들의 입에서는 절로 신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괴성과 함께 코우랄라가 그리즐리들을 향해 달려들었고, 그리즐리들은 묘인들을 애먹였던 단단한 장갑이 무색하게 코우랄라의 주먹 한 방을 버티지 못하며 그대로 침묵했다.

“알르드가 이렇게나 적극적으로 우리를 도와줄 줄이야. 정말 다행이에요.”

라홀로프의 상단주인 페이샬은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정말로 위험했던 상황이었다. 몬스터들을 상대로 든든한 실력을 자랑하던 상단의 병사들은 제대로 된 정규군 앞에 순식간에 쓸려 나갔다.

“분명 우리에게 원하는 게 있을 겁니다. 의미 없는 선행은 없습니다.”

젊은 묘인 영웅은 아직까지도 불만이 많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전투가 일어나기 전과는 달리 힘이 잔뜩 빠져 있었다. 그리고 랙돌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알르드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웅족의 손에 목숨을 잃었을 거다.”

알르드의 영웅인 브로리는 자신들이 고전한 상대인 웅족의 마장기들을 눈 깜짝할 사이에 전멸시켰다. 대륙에 떠도는 소문이 무색할 정도로 가공할 실력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나타난 실버문과 브뤼헤아 비쉬로 이루어진 알르드의 군대가 수인 왕국의 병사들을 몰아내고는 웨이하 숲에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말로는 묘인들의 이주를 돕기 위한 작업이라고는 하지만 랙돌은 그런 알르드의 움직임이 웨이하 숲과 웨이하 숲에 있는 영지들을 차지하기 위한 속셈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나저나 브로리는 왜 이런 타이밍에 용의 계곡으로 떠난 거죠? 굳이 그 쪽의 드레이크들을 건드릴 필요가 있을 까요?”

페이샬이 물었다. 그녀의 말대로 웅족의 병사들을 물리친 브로리는 자신을 따르는 소수의 마장기와 함께 곧바로 용의 계곡으로 떠났다. 랙돌과 페이샬에게 제대로 된 인사도 건네지 않고 말이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하던 랙돌이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다.

“용의 계곡을 지나 드워프의 영토를 통과할 수 있다면 여기서 곧바로 리셴르나가 있는 바리안스의 대지에 도착할 수 있소. 계곡의 지형이 험해 군대는 지나갈 수 없겠지만 이주를 하려는 이들이라면 크게 상관이 없겠지. 그렇게 되면 굳이 모든 묘인들이 군트락으로 넘어가기 위해 애를 쓸 필요가 없을 거요. 아마 윤호의 명령이 있었을 겁니다.”

“……아?!”

“그런 길이 있었습니까?”

랙돌의 말에 두 영웅이 기함하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 랙돌의 예상대로 브로리는 윤호의 명령에 따라 위험난이도 A등급의 던전인 용의 계곡을 공략하고 있었다. 하지만 묘인들을 위해서 용의 계곡을 처리하는 게 아니었다. 용의 계곡에서만 얻을 수 있는 특수한 아이템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심장 조심해! 제대로 빼내란 말이야!”

알르드의 군주 중 한 명이자 림드 산맥을 다스리는 영웅. 아스트리드 벨의 S등급 클래스인 ‘룰러-아스트리드 벨’의 전직을 위해서는 용의 계곡에서만 등장하는 드레이크의 심장이 50개나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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