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6
리그너스 대륙전기 376화
“타깃 바꿔! 본체가 아닌 촉수를 노린다!!!”
상황을 파악한 지휘관들도 빠르게 명령을 바꿔 내렸다.
그에 따라 운트리온의 등껍질을 노리던 브뤼헤아 비쉬의 광역 마법이 운트리온의 촉수, 정확히 말하면 운트리온의 등 가운데에 나 있는 촉수들을 향해 펼쳐졌다.
풀 버프 상태로 공격력이 크게 높아진 브뤼헤아 비쉬의 연이은 마법 세례가 쇠약해진 고대신의 촉수 몇 개를 끊어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이어서 강력한 산성액이 운트리온의 등껍질을 타고 눈으로 파고들면서 고대신이 비명을 내질렀다.
-카아아아악! 이놈들!!! 가만두지 않겠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것일까? 촉수들이 운트리온의 몸체 앞에 둥글게 모여들어 방어막을 만들어내었다. 하지만 그러한 운트리온의 행동은 오히려 자신의 눈이 약점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려주는 꼴 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촉수가 눈을 가리게 되면서 운트리온의 공격 중 가장 조심해야 하는 공격인 안광이 봉인되었다. 결국 운트리온은 제 손으로 제 발을 묶은 모양새가 된 것이다.
‘저 자식……. 신 치고는 되게 멍청한데? 전투 경험이 얼마 없는 거 아니야?’
호는 그런 운트리온의 대응이 굉장히 어설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자신의 산성액에 본인이 피해를 받는다니?
고대신이라는 엄청난 존재치고는 약점이 너무나도 황당했다.
그러나 그런 운트리온의 움직임과 약점에 대해 깊게 의미를 두고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 무조건 저 녀석을 쓰러뜨려야 한다는 점이었다. 힘을 회복한 고대신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존재인지는 지금의 전투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어설프게 나오면 오히려 환영이었다.
“한시진!”
“알았어요!!!”
호의 외침에 담긴 뜻을 알아챈 시진이 데스 사이더를 움직여 빠르게 운트리온의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운트리온의 촉수 몇 가닥이 그런 한시진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움직였지만, 몇 가닥 되지 않는 촉수들은 한시진의 낫에 잘려 땅바닥을 뒹굴었다.
‘저 녀석에게 피해를 주려면……. 눈처럼 본체의 내부를 직접 타격해야 돼.’
한시진의 눈동자가 빠르게 운트리온의 몸을 훑었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려면 단단한 껍질과 촉수를 방패삼아 몸을 웅크리고 있는 녀석의 약점을 어떻게든 끌어내야만 했다.
껍질 속에 숨겨져 있는 운트리온의 눈을 뜨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한시진이 선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이 남아 있었다.
‘한 번에 내부까지 공격하는 거야.’
시진은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데스 사이더의 낫에 마나를 잔뜩 불어넣어 그대로 본체까지 찔러 넣을 생각이었다.
예전의 능력이라면 모르겠지만, 검신의 힘을 지닌 지금이라면 충분히 운트리온의 두꺼운 껍질을 뚫고 내부까지 엉망으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시진에게는 믿는 한 수도 있었다.
만약 운트리온의 안광이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과감한 생각을 가지고 움직이기는 힘들었을 터였다. 하지만 운트리온은 현재 자신의 약점이자 강력한 공격 수단인 눈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봉인한 상황이었다.
“하아아압!”
뱀처럼 꿈틀거리며 몰려오는 촉수를 베어내며 데스 사이더가 운트리온의 본체까지 접근했다.
그렇게 얼마나 가까워졌을까? 손만 뻗으면 서로 닿을 정도까지 가까워진 거리에서 한시진의 기합성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이어서 데스 사이더의 낫이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세차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띵동.
-한시진이 검의 길을 발동했습니다. 그녀의 공격은 앞으로 5분간 상대의 방어력을 무시합니다.
그리고 그녀의 능력인 검의 길이 발동되는 것과 동시에 데스 사이더의 낫이 그대로 운트리온의 껍질을 내리찍었다.
푸욱!
데스 사이더의 낫이 운트리온의 단단한 껍질을 두부처럼 파고들며 내부를 무참하게 후벼 파기 시작했고, 고대신의 피로 추정되는 파란색의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캬아아아아악!!! 죽여, 죽여 버리겠어!!!
끔찍한 아픔을 느낀 운트리온이 분노에 찬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미친 듯이 촉수를 휘두르며 데스 사이더를 휘어잡아 내동댕이치려고 했다. 하지만 시진은 오히려 촉수들의 사이로 파고들며 자신의 낫으로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베어버리고 있었다.
“시진이를 서포트해!!!”
고대신의 촉수를 상대로 무쌍을 찍고 있는 한시진을 활약을 보며 호 또한 그녀를 노리는 촉수들을 향해 마력 폭탄을 날리기 시작했다. 브뤼헤아 비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공격 마법과 제어마법이 촉수들을 향해 퍼부어졌다.
그리고 데스사이더의 낫이 또 한 번 곡괭이처럼 운트리온의 껍질을 내리찍으며, 다시 한 번 고대신의 내부를 갈라버렸다.
-캬하아아아아악!!!
또다시 터져 나오는 운트리온의 비명 소리를 들으며 호는 고대신을 상대로 한 이번 전투에서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모두들 집중한다! 여기서 대륙의 평화를 위협하는 고대신을 쓰러뜨린다!!!”
“호우! 호우!! 호우!!!”
“호 님을 위하여!!!”
병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륙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호 님을 위해 실버 문과 브뤼헤아 비쉬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한계 그 이상까지 발휘하고 있었다.
* * *
-나의 자식들아! 나의 뜻을 거스르는 미개한 녀석들의 영혼을 물어뜯어라!!!
-저놈들을 타락시켜!!! 타락의 웅덩이에 빠뜨려라!!!
한시진의 낫이 본체를 휘저으면서 생명력에 크나큰 피해를 입기 시작한 운트리온은 자신의 부하까지 부르며 왕좌의 자리에서 호를 비롯한 알르드의 군대를 밀어내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호의 지휘 아래 기계처럼 움직이는 병사들의 대응에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괴물들이 달려들어도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실버 문과 브뤼헤아 비쉬의 진형을 뚫어낼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들은 ‘리그너스–온리원’만이 사용할 수 있는 창조신의 축복을 받은 존재들. 제대로 힘을 회복하지 못한 운트리온의 자식들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이, 이 몸이 회복만 되었어도!!!
눈앞의 녀석들은 벌레처럼 짓누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검의 왕좌’를 타락시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힘을 소모한 게 운트리온의 패착이었다.
-리그로우도 세리너스도 없는 상황에서 이 몸의 앞을 가로막는 녀석이 나타날 줄이야!!!
심지어 그 둘의 자식인 라헬과 카테지나가 세계의 힘을 손에 넣기 위해 다툼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녀들 몰래 세계를 타락시키기에는 지금만큼의 좋은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크아아아아!
데스 사이더의 낫이 번뜩일 때마다 단단한 껍질이 갈라지며 운트리온의 내부를 진탕시켰고, 거기에 호의 마력폭탄이 파고 들어가며 폭발을 일으킬 때면 고통으로 인해 영혼까지 찢겨져 나가는 것 같았다.
“하아아압!”
운트리온이 뭐라고 중얼거리던 말든 한시진은 눈앞의 괴물을 쓰러뜨리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한계까지 발휘하고 있었다. 눈앞을 가로막는 수십의 촉수를 잘라내며 본체를 향해 계속해서 자신의 낫을 내리 찍었다.
호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시진이 만들어낸 틈 사이로 신기에 가까운 컨트롤을 발휘하며 마력 폭탄을 집어넣었고, 연달아 운트리온의 내부에서 폭발시키며 고대신의 생명력을 바닥까지 끌어내리고 있었다.
실버 문과 브뤼헤아 비쉬들은 그 둘의 움직임에 보조를 할 뿐 직접적으로 나서지는 않고 있었다. 사방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산성액을 버텨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세계를 타락시키려는 나의 야망이……!!!
데스 사이더가 만들어낸 커다란 상처에 대 여섯 기의 마력 폭탄이 푹하고 틀어박혔다. 마력 폭탄의 접근을 차단해야 하는 촉수들은 데스 사이더의 낫에 모조리 잘려진 상태.
“이제 좀 뒤지라고!!!”
그리고 한시진이 몸을 빼는 순간 엄청난 폭발이 왕좌의 자리를 뒤흔들었다.
띵동.
-EX등급 던전 타락한 검의 왕좌에서 ‘고대신 운트리온’을 물리쳤습니다.
-전투성과를 결산 중입니다. 3…… 2…… 1. 결산 완료. 이번 전투의 등급은 S랭크입니다. 경험치를 16231750 획득했습니다.
-총대장으로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20%의 경험치를 추가적으로 획득합니다.
-EX등급 던전 ‘타락한 검의 왕좌’를 완벽하게 클리어 했습니다. 경험치 1000000을 획득했습니다.
-‘신을 물리쳤다고? 이거 실화냐?’의 업적 보상으로 카오스 큐브 10개를 획득합니다.
-‘고대신? 내 상대는 아니야’의 업적 보상으로 신의 파편을 획득합니다.
-…….
운트리온이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띵동 거리는 소리가 호의 귀를 왕왕 울리기 시작했다. 고대신이라는 신적 존재를 물리친 까닭일까? 메시지가 호의 눈앞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본체의 죽음에 힘을 잃은 촉수들이 그대로 바닥으로 쿵쿵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에 잠시나마 긴장을 하던 시진은 운트리온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천천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병사들을 공격하던 그의 자식들 또한 운트리온의 사망과 동시에 끈 떨어진 인형처럼 철퍼덕 쓰러졌다. 그러고는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 이겼다!”
“와아아아!!!”
“호 님 만세!!! 호우! 호우!!! 알르드 만세!!!”
그 모습에 병사들이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환호성을 외쳤다. 과도한 마력의 사용으로 탈진한 몇몇의 브뤼헤아 비쉬들이 전투가 끝났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대로 쓰러졌고, 실버 문들이 그녀들을 향해 회복 마법을 펼치는 모습이 호의 눈에 들어왔다.
목숨을 건 싸움은 전우의 사이를 가깝게 해준다고 했던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은 것이 왠지 모르게 오늘 밤은 조금 시끄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이게 끝인가?”
혹시나 싶어서 마력 폭탄 하나를 운트리온에게 던져 봤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는지 큼지막한 살점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운트리온은 아무런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고대신을 쓰러뜨리는 목표를 달성했으니 자신들에게 강제적으로 깨달음을 안겨다 준 레나 또한 모습을 드러낼 법했지만, 전장의 정리가 끝날 때까지 레나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녀의 역할은 자신의 깨달음을 나눠준 것으로 끝이었던 모양이었다.
“힘든 싸움이었어요.”
옆으로 다가온 한시진의 말에 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하지만 얻은 것도 제법 많았지.”
“네. 한계를 뛰어넘는 내 모습을 보며 조금 더 많이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느꼈으니까요. 빨리 더 강해지고 싶어요.”
“그러려면 전직 조건을 빨리 달성해야지.”
“전직 조건은 이미 끝냈어요.”
“그래? 그것 참 잘됐……. 어, 어? 뭐라고?”
너무나도 태연한 한시진의 목소리에 고개를 주억이던 호가 잠시 멈칫하고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검제의 전직 조건 중에 검강에 대한 깨달음과 ‘검의 왕좌’를 공략하라는 것만 남아 있었는데……. 고대신을 물리치면서 둘 다 만족시켰거든요. 이제는 저도 SS등급의 소환자랍니다.”
시진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호가 그녀의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축하해! 그러면 이제 검제 한시진인가? 이야! 내 여자 친구 대단한데?”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해요. 이미 그 이상의 경지를 느꼈는데, 검제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요.”
“최대한 빨리 그 이상의 단계로 가는 방법을 찾아보자.”
호가 시진의 손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그렇게 잠시 시진과 눈빛을 주고받은 호는 고대신을 물리치고 난 이후 나타난 메시지의 내용들을 하나하나씩 확인하기 시작했다.
먼저 경험치를 획득했다는 메시지는 가볍게 넘겨 버렸다.
이 세계에 떨어진 초창기에는 능력치의 상승을 위해 조금의 경험치라도 얻기 위해 난리를 피웠었지만, 지금 경험치는 퍼도 줄어들지 않는 바닷물처럼 남아도는 존재에 불과했다.
중요한 것은 고대신을 물리치고 획득한 아이템과 업적의 보상으로 떨어진 아이템들이었다.
그리고 호는 운트리온을 물리치며 획득한 아이템 중 하나인 카오스 큐브를 손에 들어올렸다. 카오스 큐브는 육각형 모양의 투명한 보석의 형태를 하고 있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 대단치 않아 보이는 아이템이었다.
그러나 무려 고대신을 물리치고 획득한 업적에서 나온 보상이었다. 분명 심상치 않은 아이템일 게 틀림없었다.
‘그나저나 이거 정보창으로 관찰이 되려나?’
하지만 카오스큐브는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아이템이었다. 그런 탓에 조금 불안한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호는 카오스 큐브에 대한 정보창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