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3
리그너스 대륙전기 373화
‘그나저나 얘는 뭘 믿고 우리가 운트리온을 쓰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호는 레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감긴 눈과 죽은 지 오래된 시체와 다름없는 레나의 외형은 호로 하여금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짐작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
한숨과 함께 뒤를 돌아보니 실버 문과 브뤼헤아 비쉬들이 전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충성스러운 그들은 자신이 어떤 명령을 내리던 간에 그대로 따를 터였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다름없는 고대신을 향해 공격하라는 명령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나마 위안이라도 삼자면 그들을 지휘하는 영웅들은 S, A등급 영웅으로 다들 통솔 능력이 뛰어난 이들이었다.
‘골치 아프네.’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의 상황에서는 뒤로 물러나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다.
따르는 추종자가 SS등급의 보스급 몬스터일 정도로 고대신의 힘은 이제까지 만난 적과는 차원을 달리할 게 분명했다. 아무리 약해졌다 하더라도 지금의 전력으로 자신이 쓰러뜨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고대신이 자신에 대해 강한 분노를 느끼고 있다는 메시지가 호의 선택을 주저하게 만들고 있었다.
‘지금 쓰러뜨리지 않으면…….’
힘을 회복한 운트리온이 어떠한 재앙으로 다가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모르긴 해도 예상을 뛰어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만큼 분명했다.
게다가 퀘스트 내용의 마지막 문장, ‘지금이야말로 그를 쓰러뜨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문장이 계속해서 호의 불안을 부추기고 있었다. 마치, 지금이 아니면 운트리온을 쓰러뜨릴 수 있는 기회가 없을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 운트리온! 기억났어요! 그…… 그! 재앙의 성채에서 만났던 괴물 녀석이 말했던 이름이에요!”
이제야 생각이 난 듯 입을 여는 한시진의 모습에 호는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필이면 그 이름이 떠올랐을 때 운트리온이 자신을 주시하기 시작했다는 메시지가 나타났을 게 뭐람.
“그렇다는 이야기는 그 고대신이라는 괴물. 우리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겠네요?”
“분명히 그렇겠지?”
호의 고개가 다시 한 번 끄덕여졌다. 굳이 짐작할 필요도 없이 메시지를 통해 확실하게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러면 답은 정해져 있네요. 고대신 녀석, 검의 왕좌에 있다고 했죠? 힘이 약해진 지금이야말로 기회예요. 그 녀석을 쓰러뜨리러 가요, 오빠.”
“응? 너 상대가 어떤 녀석인지는 알고 이야기하는 거야?”
“고대신이잖아요? 그럼 그 괴물이 힘을 회복할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한시진의 모습에 호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는 고대신.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진보스인 여신 라헬과 동급의 존재로 추정되는 괴물이었다.
그뿐인가? 그의 힘에 타락한 검의 왕좌의 SSS급 보스 몬스터들도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을 것이다.
그런 호의 불안에도 불구하고 한시진은 얼굴을 싱글거리며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그리고 호에게 레나가 다가와 말했다.
“무리한 부탁이라는 것은 알지만 부디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저 역시 당신들을 돕겠습니다.”
“그런 모습으로요?”
호가 자신의 코를 매만지며 레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도와준다면 던전의 공략이 조금은 수월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냉정히 말해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레나는 한시진의 데스 사이더도 홀로 당해내지 못하는 준 보스급 몬스터에 불과한 존재. 보스 몬스터와는 실력의 차이가 상당했다.
그런 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레나가 힘주어 말을 이었다.
“오랜 세월동안 저는 저를 지배하려는 운트리온의 타락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토록 원했던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죠. 슬프게도 그 깨달음을 제대로 활용하기 전에 운트리온의 타락한 힘에 물들고야 말았지만……. 만약 그대가 운트리온을 물리치겠다면 당신들에게 저의 깨달음을 나눠 드리겠습니다.”
‘깨달음을 나눠 준다고?’
호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말이 무슨 소리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게이머의 경험상 짐작을 해보면 던전을 공략하는 이들에게 레나가 어떤 버프를 걸어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주위의 환경들이 지금 당장 운트리온을 물리쳐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호가 깊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검의 왕좌에 도전해보도록 하죠. 하지만 저희들이 생명이 위험하다고 판단될 경우, 도전을 중지하고 바로 물러나겠습니다.”
호의 말에 레나는 말없이 고개만을 끄덕였다. 나중에야 어쨌든 지금 당장 호가 운트리온을 물리치겠다고 말한 것 자체가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렇게 호를 바라보던 레나의 몸이 천천히 제자리에서 둥실 뜨기 시작했다.
“어?”
갑작스러운 레나의 행동에 호가 놀란 목소리를 내었다.
우우웅!
그때, 레나의 미간에서 푸른색의 빛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빛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짙고 커져가기 시작했다.
“무슨……?!”
갑작스러운 빛에 놀란 병사들이 하던 행동을 멈추고는 빛이 일어나는 레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한시진 역시 어느새 호의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 순간에도 레나의 몸에서 시작된 빛은 점점 더 커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커져가던 푸른색의 빛이 두 남녀와 일만의 병사를 포함해 검의 왕좌 전체를 뒤덮었다.
띵동.
-레나의 도움을 받아 신비로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업적 ‘한계 그 너머’를 달성했습니다. 업적 보상으로 ‘검의 왕좌’를 공략하는 동안 클래스 등급이 두 단계 상승합니다. 던전에서 나가면 깨달음은 사라집니다.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왕–미솔로지(SSS)의 전직에 성공했습니다.
-리그너스-온리원(EX)의 전직에 성공했습니다.
-등급 변경에 따라 능력치의 한계가 상승했습니다.
-신비로운 깨달음에 영향을 받아 세부 능력이 새로이 설정됩니다.
순식간에 메시지가 주르륵 올라간다. 호는 이 순간이 짧으면서도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는 하나하나가 심상치 않은 정보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검의 왕좌를 에워쌌던 푸른빛이 사그라졌을 때 레나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플레이어 정보(Status)>
1. 이름 : 윤호
2. 성별 : 남(32)
3. 종족 : 인간
4. 소속 : 알르드
5. 레벨 : 2000
6. 직업 : 리그너스–온리원(EX)
“하…….”
제 정신을 차리고 정보창을 확인해 보니 정말로 직업 등급이 바뀌어 있었다. 그것도 기존의 직업인 오버 로드와 비교해 무려 두 단계나 상승해 있었다. 하물며 EX등급의 직업은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직업이었다.
“와, 깨달음이라는 거 정말 엄청나요! 힘이 넘쳐나는 것 같아!”
“너도 전직했어?”
“네. ‘검의 왕좌’ 한정이지만요. 저 검제를 뛰어넘어 무려 검신이라는 직업을 얻었어요.”
한시진이 손으로 브이자를 그리며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듣던 호가 입을 벙긋했다.
검신. 기억 속에 있는 직업으로 근접 전투 계열 클래스의 최고봉이나 다름없는 직업이었다.
“이런 힘이라면 그 고대신 녀석도 때려잡을 수 있겠죠?”
“그렇다고 해도 그리 만만한 녀석은 아니겠지만…….”
여전히 상황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EX등급의 클래스 때문일까? 어느 정도는 할 만하지 않을까 하는 자신감이 조금은 들었다. 그리고 그런 호의 생각은 ‘검의 왕좌’의 보스급 몬스터 쾌검의 르슐을 만나는 순간 확신으로 변했다.
* * *
“캬아아아악!”
위험도 SSS등급 던전의 보스 몬스터답게 시뻘건 살의가 폭사되듯이 뿜어져 나온다.
고대신 운트리온의 힘에 타락한 영향인지 움직임이 조금 부자연스럽게 보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앞의 적은 결코 쉽사리 생각해서는 안 될 무서운 상대였다.
그렇게 르슐이 자신의 장검으로 실버 문들을 베어버려는 찰나 데스 사이더가 그 사이로 뛰어들었다.
“나이스 타이밍!!!”
호가 한시진을 향해 외쳤다. 아직 버프를 받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르슐의 검이 휘둘러지는 순간 수백의 실버 문들이 그대로 쓸려 나갔을 상황이었다.
그리고 르슐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상대를 베어버릴 생각으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카카캉! 캉!
쾌검이라는 별칭이 붙은 몬스터답게 섬뜩한 광채가 사방으로 튀었다. 하지만 그의 검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데스 사이더의 낫이 모두 막아버린 것이다.
“이 힘……. 중독되면 위험하겠는데?”
시진이 몸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각성제라도 먹은 양, 상대의 움직임이 훤히 보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감싸고 있던 껍질이 몇 꺼풀 벗겨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워낙 공격이 빨랐던 터라 원래의 실력이었다면 데스 사이더의 동체에 상대의 공격 몇 번은 허용했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금 이 순간이라면 기사왕 이레네 아르티아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 덤벼보라고! 이 미친 괴물 자식아!”
“카아아아악!”
자신의 검이 막혔다는 사실에 화라도 난 듯 르슐이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며 데스 사이더를 향해 달려들었다. 어그로가 끌린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확인한 호가 병사들을 향해 자신의 능력을 발동했다.
침착하라, 아크 스피릿, 전장의 노래부터 시작해 오버로드 클래스로 전직하면서 획득한 스피릿 발할라까지. 여기에 SSS등급과 EX등급의 스킬까지 사용하자 실버 문과 브뤼헤아 비쉬들은 리그너스 대륙에 등장하는 일개 병사라고는 말할 수 없는 공, 방 수치를 지닌 괴물이 되고야 말았다.
“이건…….”
“호 님께서 달빛여신의 축복을 내려주셨다!”
“이것이야말로 기적! 호 님을 위하여!! 적을 물리치자!”
“호우! 호우!! 호우!!!”
그렇게 사라진 빛 무리와 몸에 충만한 기운에 잠시 어안이 벙벙하던 병사들은 자신들을 통솔하는 영웅들의 명령에 따라 르슐을 향해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카하악! 하찮은 녀석들이!!!”
한시진과의 싸움 도중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병사들을 확인한 르슐이 귀찮은 듯 실버 문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자신의 상대는 눈앞의 마장기뿐이었다. 일개 병사 따위가 낄 싸움이 아니었다. 그렇게 르슐은 자신이 날린 검풍에 상대의 병사들이 갈가리 찢겨나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장 앞서서 달려들던 실버 문들에게 브뤼헤아 비쉬의 방어 마법이 펼쳐졌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르슐의 검풍을 가볍게 상쇄시켰다.
“이것이 우리들의 능력!”
“꺄하하!”
거기에 이어지는 브뤼헤아 비쉬의 비웃음까지.
“이 연놈들이 날 무시해?!”
화가 머리끝까지 난 르슐이 자신의 검을 세차게 휘둘렀다. 그러나 르슐의 공격은 브뤼헤아 비쉬의 방어 마법과 실버 문의 단단한 방어를 뚫어내지 못했다. 원래대로라면 몇 십, 몇 백은 쓸어버렸어야 할 공격이 버프로 인해 능력 수치가 상승한 병사들의 방어력을 이겨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르슐의 근처까지 접근한 실버 문들이 그를 거칠게 몰아붙이는 모습을 보며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던 호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 참.”
버프를 받은 SSS랭크의 병사들이 강력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능력치가 몇 배나 뻥튀기나 되었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상대는 SSS등급 던전의 보스급 몬스터였다. A등급 마장기가 다수 있어야지만 공략이 가능한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병사의 랭크가 아무리 높아도 그 한계라는 게 있었다. 특히나 던전에서 보스 몬스터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마장기 뿐이었다. 그게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했던 호의 상식이었고 경험이었다.
하지만 EX등급의 클래스 ‘리그너스–온리원’은 격이 달랐다.
그 증거로 EX등급의 버프를 받은 다수의 병사들은 ‘검의 왕좌’의 보스 몬스터 중 하나인 쾌검의 르슐을 상대로 조금씩 피해를 누적시키고 있었다. 비록 죽어나가는 병사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았다.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결코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