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2
리그너스 대륙전기 372화
-제…… 발, 제발…….
잠시 후, 소름끼치는 쇳소리가 모두의 귀에 파고들었다.
“공격!!!”
불길함이 가득 담긴 음색을 듣는 순간 호는 반사적으로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레나의 찢어지는 목소리가 공동에 울려 퍼졌다.
“내 머리에서 나가!!! 제발!!! 날 그냥 내버려 둬!!!”
자신의 머리를 붙잡고 세차게 흔들기 시작하는 레나를 보며 호는 주저하지 않고 어깨의 덮개를 열었다. 한시진 또한 데스 사이더의 낫에 자신의 마나를 불어넣었다.
콰콰쾅!
곧이어 호의 의지에 따라 날아간 마력 폭탄이 레나의 주위에서 폭발했고, 먼지구름과 함께 거대한 울림이 검의 왕좌를 강타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잠시 간의 정적.
하지만 호의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이제까지의 전투 경험이 이게 끝이 아니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의 분위기가 일변하기 시작했다.
“한시진!!”
“하아아압!”
호의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시진의 데스 사이더가 앞으로 움직였다. 그리고는 레나가 묶여 있던 곳을 향해 먼지를 뚫고 강하게 낫을 휘둘렀다.
카카캉!
A등급 마장기의 거대한 무기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무언가에 가로막혔다. 쇠사슬을 손에 든 뻥 뚫린 눈두덩이 데스 사이더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오빠. 나 진짜 얘랑 싸우기 싫은데…….”
조종석의 카메라를 통해 레나의 징그러운 모습이 확대되어 보이자 한시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통신을 보냈다.
하지만 대답해야 할 호는 다른 곳으로 시선이 쏠려 있었다. 자신들이 들어온 입구의 반대 방향에서 또 다른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놈들은 대체 뭐야?”
호가 침을 꿀꺽 삼켰다. 뭐라고 표현을 해야 할까? 촉수 인간? 촉수 맨?
간단히 정리하자면 모습을 드러낸 괴물들은 온 몸이 징그러운 촉수로 된 이족 보행형 몬스터였다. 검의 왕좌에 등장하는 몬스터는 결코 아니었다. 문어의 발처럼 동그란 빨판까지 달린 촉수가 흔들릴 때 마다 끈적끈적한 점액에 바닥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 몬스터들의 머리 위에는 ‘운트리온의 자식’라고 적혀 있었다.
‘운트리온?’
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 보는 이름은 아니었다. 분명 어디선가 봤던 이름이었다.
하지만 기억을 더듬을 시간이 없었다. 괴이한 소리와 함께 촉수 괴물들이 자신들을 향해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얼핏 봐도 수백은 되어 보이는 숫자였다. 게다가 문지기 레나 또한 한시진을 향해 쇠사슬을 휘두르고 있었다.
“실버 문 3, 4, 5부대는 한시진을 도와 문지기 레나를 막는다! 브뤼헤아 비쉬 6, 7부대가 지원하도록! 나머지는 나를 따라 저 촉수 괴물 녀석들을 막는다!”
다행이라면 아군의 수 또한 적지 않다는 점이었다. 마장기는 두 기 밖에 없지만 병사는 만 명 가까이 있었다. 물론, SSS등급 던전의 보스로 추정되는 몬스터를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전력이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행여나 사고가 터지면 바로 튀면 그만이었다.
-으어어어어어어!!!
마장기의 조종석을 향해 날아드는 촉수를 붙잡은 호가 꽈악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촉수를 잡아당겼다. 이어서 괴물의 몸이 딸려오자 라이온레인의 커다란 주먹이 괴물의 얼굴을 후려쳤다.
-으어어어!
우두둑하는 소리와 사방으로 움직이던 촉수가 추욱 늘어졌다. 하지만 괴물은 죽지 않았다. 촉수의 끝이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게 카메라를 통해 호의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A등급 마장기의 주먹에 얻어맞고도 살아있는 것을 보니 제법 질긴 생명력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고작 마장기의 주먹 공격에 얻어맞고 빈사 상태가 될 정도의 상대에 불과하다는 말이었다.
이 정도라면 아군의 병사들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굳이 자신이 나설 필요가 없는 것이다.
호는 재빨리 고개를 들어 한시진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불길함과 익숙함이 섞인 기운이 서로 부딪치고 있었다. 그리고 둘의 모습을 확인한 호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문지기 레나가 보스가 아니었나?”
등장 자체는 보스급 몬스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괴상하고 기이했다. 하지만 한시진의 데스 사이더는 홀로 레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녀의 낫이 휘둘러질 때마다 레나의 쇠사슬이 잘게 부서지고 있었다. 아무리 한시진의 무용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레나가 SSS등급의 던전 ‘검의 왕좌’의 보스급 몬스터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호각이라면 모를까, 저렇게 일방적으로 압도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레나가 보스급 몬스터가 아닌 준보스급의 몬스터였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모습이었다. 던전에서 이 둘의 차이는 어마어마하게 컸다.
-으어어어어!!!
호와 한시진은 문지기 레나를 비롯해 깊게 뚫린 구멍에서 날 법한 소리를 내는 촉수 괴물들을 어렵지 않게 물리칠 수 있었다.
괴기한 등장과는 달리 상대는 생각 외로 약했다. 문제는 이 다음이었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고 앤 스탑?”
“잠시만.”
한시진의 통신에 호는 빠르게 ‘관우는 내 여자’의 공략본을 열었다. 그리고는 검의 왕좌에 대한 정보를 빠르게 훑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읽었던 정보 이상의 내용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방금 전과 같은 이상한 상황은 공략본에 한 줄도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느낌이 싸하긴 한데…….’
그렇다고 그냥 돌아가기에도 뭐했다. SSS등급의 던전에 등장하는 보스급 몬스터의 능력을 파악해야 하는데, 기껏 상대한 거라곤 준보스로 추정되는 괴물뿐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아는 ‘검의 왕좌’에는 등장하지 않는 이레귤러인 촉수 괴물들의 정체도 파악해야만 했다.
그리고 호가 마장기에서 내려서 검으로 괴물들의 시체를 휘적거리는 한시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시진아. 너 운트리온이라는 이름 알고 있어?”
“운트리온요? 어……?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데…….”
호의 말에 한시진이 순간 멈칫했다. 그러다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지 으으하며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 때였다.
“이 대륙을 타락으로 물들이려는 고대신의 이름입니다.”
어디선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고, 한시진이 검을 고쳐 잡고는 뒤로 찔러 넣었다. 하지만 철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검이 가로막히자 재빠르게 상대의 거리에서 몸을 뺀 시진이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리고는…….
“꺄아아아아아악!”
비명을 내질렀다. 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재빠르게 조종간을 당겨 한시진과 괴물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방금 전, 한시진에게 말한 이는 자신들이 물리쳤다고 생각한 문지기 레나였다. 그리고 뻥 뚫린 그녀의 눈이 호와 한시진을 번갈아 보고는 천천히 감겼다.
“먼저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그대들의 덕분이 잠시나마 제정신을 차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끔찍한 외형은 그대로였지만 아까와는 판이하게 달라진 레나의 목소리에 한시진이 시선이 호에게 향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던 호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술을 떼었다.
“대체 이 ‘검의 왕좌’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 * *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설정집에는 고대신에 대한 설명이 한 줄 가량으로 짤막하게 등장한다. 창조신이 만들어낸 존재가 아닌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존재이며 이 세계를 타락으로 물들이려는 사악한 신이라는 게 내용의 전부였다.
사실 고대신에 대한 설명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리그너스 대륙전기’는 여신 라헬의 음모를 막는 게 주목적인 게임이었다. 실제로 고대신이라는 존재가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세계는 달랐다.
“그 고대신 중 하나인 운트리온이 검의 왕좌를 타락시켰다고요?”
한시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솔직히 말해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증거가 눈에 뻔히 보이고 있었다.
“맞아요. 이곳은 무에 대한 궁극의 무를 깨달으려는 수련자들이 모인 장소였어요. 하지만 궁극의 경지에 대한 깨달음은 수련자들에게 쉽게 찾아오지 않았죠.”
레나의 말에 호와 한시진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깨달음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찾아오는 거였으면 벌써 많은 이들이 리그너스 대륙에서 궁극의 무를 펼치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운트리온은 궁극의 무에 대한 깨달음을 찾는 무인들의 조급함을 이용하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하나, 둘씩 무인들이 타락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힘을 얻은 운트리온은 자신의 자식을 풀어 이 검의 왕좌를 오염시키기 시작했습니다.”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은 아닐 텐데. 아이리스 성국에서는 이상함을 눈치 채지 못한 겁니까? 라헬교도라면 고대신의 존재를 그냥 두고 볼 리 없었을 텐데요?”
“그들은 ‘검의 왕좌’가 이상하게 변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신경을 끄기 시작했죠.”
“도움이 안 되는 쓰레기 같은 놈들.”
호가 땅을 발로 차며 말했다.
성자를 포함해 아이리스 성국의 교황까지. 죄다 전장에서 죽여 버린 녀석들이기에 그들을 찾아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어쨌든 요약하자면 현재 이 ‘검의 왕좌’는 운트리온의 손에 오염된 상황이라는 말이었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던전의 난이도 역시 SSS등급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최소한 그 이상이었다.
“일단은 물러나야겠는데…….”
마음 같아서는 조금이라도 정보를 획득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레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대들의 실력이 대단한 것은 알고 있어요. 그대들의 추종자 또한 말이죠. 부디 운트리온을 물리치고 이 ‘검의 왕좌’를 구원해 주셨으면 합니다.”
“어, 엉?”
“무슨……?! 상대는 고대신입니다! 고작 이 정도의 병력으로 고대신하고 싸운다? 그건 우리보고 죽으라는 이야기입니까?”
레나의 말에 호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고, 한시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레나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그대들은 해낼 수 있습니다. 고대신의 힘에 의해 타락한 이들은 깨달음은커녕 예전에 지닌 무의 반도 안 되는 실력으로 퇴보했고, 그들을 타락시키며 검의 왕좌를 오염시킨 고대신 운트리온은 자신의 힘 대부분을 소모하고 왕좌의 꼭대기에서 자신의 힘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그가 힘을 찾기 전에 운트리온을 무찔러야 합니다. 기회는 지금 뿐입니다.”
레나의 말에 호는 바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의 상황은 천운과도 같은 기회였다. 그러나 힘이 빠진 고대신이라도 고대신은 고대신이었다.
만만한 상대가 아닌 것이다. 게다가 레나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도 진위여부를 알 수가 없었다.
만약 이게 함정이라면? 꼼짝없이 당하는 셈이었다. 게다가 굳이 자신이 고대신을 물리쳐야 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몇 번 고대신의 추종자를 없애기는 했지만…….
‘재앙의 성채!’
호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크게 치떠졌다. 어쩐지 익숙한 이름이었다. 미피츠에 있는 SS등급의 던전 재앙의 성채. 그곳에서 호는 운트리온의 대사제 오릴리오를 물리친 적이 있었다.
띵동.
-고대신 운트리온의 눈동자가 당신을 주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대신 운트리온이 자신의 대사제를 죽인 당신에 대해 강한 분노를 가집니다.
“X발.”
때마침 나타나는 메시지에 호의 입에서 절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더라니.
띵동.
-‘고대신 운트리온을 물리쳐라’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대륙을 타락시키려는 고대신 중 하나인 운트리온은 자신의 추종자를 만들기 위해 호시탐탐 검의 왕좌를 노려왔습니다. 그렇게 운트리온의 사악함에 영향을 받은 무의 기재들은 운트리온의 뜻에 따라 검의 왕좌를 무너뜨렸고, 운트리온은 검의 왕좌를 손에 넣어 대륙을 타락시킬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무의 기재들을 타락시키느라 많은 힘을 쓴 운트리온은 자신의 힘을 회복시키기 위해 왕좌의 끝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운트리온이 약해진 지금이야 말로 그를 쓰러뜨릴 수 있는 유일한 기회입니다.]
그러나 메시지는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메시지를 확인한 호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결국은 고대신과 한 판 붙으라는 말과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기사왕하고 브로리하고 다 데리고 오는 건데…….”
하지만 이미 늦은 후회였다.
결국 자신과 한시진 그리고 일만의 병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