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8
리그너스 대륙전기 368화
‘모에드의 총사령관이 독특한 정신의 소유자라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자신의 앞에서 감히 알르드를 공격하겠다고 한다. 호는 뭐라 말도 안 나오는 듯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힐몽거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계속된 전쟁의 피해로 약소국으로 전락한 모에드쯤은 알르드 아니 림드산맥에 주둔하고 있는 전력만 움직여도 상대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칠왕국의 연합체도 아니고 고작 나라 하나쯤은 간단히 찜 쪄 먹을 수 있었다.
일단 마장기 전력에서 차이가 너무나도 났다. 일반 병사도 마찬가지였다. 랭크의 차이가 컸다. 비록 힐몽거가 유능한 장군이라고는 하지만 림드 산맥의 영웅들도 그 못지않은 수준이었다. 그리고 몇 번이나 알르드와 전쟁을 함께한 모에드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무슨 사정이 있는 건가요?”
험악해진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한시진이 나서서 말했다. 그녀의 등장에 살기에 가까운 기운를 거칠게 흩뿌리던 기사왕 역시 자신의 기세를 갈무리했다.
“모에드의 총사령관인 힐몽거 장군이 선전포고를 하려고 홀로 적국을 찾아왔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고. 방금 전 분명 모에드를 도와달라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현재 모에드는 내전이 벌어지기 일촉즉발의 상황입니다. 국왕파와 귀족파가 나뉘어서 권력을 잡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힐몽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또 귀족들이 문제였다. 이쯤 되면 인간들의 대륙 통일을 막는 것은 다른 세력이 아니라 인간들의 귀족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기사왕도 호와 비슷한 마음인지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대의 말은 그대가 모시는 국왕인 칼스 모에드가 귀족들을 휘어잡지 못한 무능한 왕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인가?”
“아닙니다. 국왕 폐하의 영민함은 이 힐몽거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귀족들은 제 2 왕위 계승권자인 놀만 모에드를 국왕의 자리에 올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허수아비 왕을 세운 후에 모에드를 자기들 마음대로 주무르려고 하는 것이죠. 전부 미피츠에게 돈을 받은 놈들입니다.”
“미피츠?!”
“아니, 그 이름이 여기서 왜?”
호와 기사왕이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퀘스트의 해결을 위한 목표이자 그나이 칼츠만의 원수나 다름없는 국가의 이름이 최근 여러 곳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모에드는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서 상업 왕국 미피츠를 통해 천 억 리스의 돈을 빌렸습니다. 하지만 최근 미피츠의 퉁 파오가 보낸 이가 군사를 일으켜서 알르드를 공격한다면 빌린 돈 중 일부를 탕감해준다고 대놓고 제안을 해 왔습니다.”
“듣자하니 칼스 모에드는 그 제안은 거절했군요.”
“그렇습니다. 영민한 칼스 폐하께서는 모에드가 동맹이나 다름없는 알르드를 공격하는 행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퉁 파오의 제안을 단번에 거절했습니다.”
“힐몽거 장군이 이렇게 나를 찾아온 것을 보아하니 귀족들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군요.”
“……돈의 유혹에 넘어간 겁니다. 그리고 칼스 폐하를 몰아내기 위해 놀만 모에드를 앞세워 군사를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씁쓸한 표정을 짓는 힐몽거의 모습에 호는 고개를 주억였다. 모에드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는 대략적으로 짐작이 가고 있었다.
“모에드의 상황은 알겠습니다. 일단 먼 길을 오셨는데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머지 이야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부디 폐하의 자비를 모에드에도 펼쳐주셨으면 합니다.”
허리를 숙이고 물러가는 힐몽거를 보며 호는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겼다. 모에드군을 이끌었던 총사령관인 힐몽거가 직접 그것도 비밀스럽게 홀로 알르드를 방문한 것을 보면 모에드의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한 모양이었다.
‘그건 그렇고……. 얘네들 진짜 단합 안 되네.’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했을 때 호는 인간들의 세력으로 시작해 빠르게 왕국들을 통일하고, 대륙으로 세력을 뻗는 루트로 엔딩을 봤었다. 귀족들이 이렇게 날 뛸 시간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골든 크로우의 기사왕 이레네 아르티아라의 강력한 카리스마는 골든 크로우 뿐 아니라 다른 귀족들의 행동에도 큰 영향을 줬었다. 그러나 이 세계는 달랐다. 천족의 계략으로 인해 기사왕은 왕위를 내려놓았고, 그녀의 가장 큰 조력자였던 그나이 칼츠만은 다른 세력도 아닌 같은 칠왕국 미피츠에서 목숨을 잃었다.
‘모에드까지 신경을 쓸 겨를은 없는데…….’
당장은 아니지만 미피츠를 향한 전쟁이 한창 준비 중에 있었다. 게다가 블루 스케일의 움직임 또한 계속해서 호의 감을 건드리고 있었다. 엘프나 수인 왕국의 동향도 주시해야 했고, 천족들에 대한 경계도 늦출 수 없었다.
하지만 힐몽거의 말대로 모에드의 귀족들이 칼스 모에드를 몰아내게 되면 동맹국은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관계였던 왕국 하나가 적국으로 돌아서게 되는 셈이었다.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됐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모에드를 점령해 알르드에 편입시키는 게 귀찮음을 더는 일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심각한 모습을 하는 호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눈치 챈 이레네 아르티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모에드는 인간들의 왕국 중에서 광산 국가 토란과 함께 유이하게 미스릴이 채굴되는 국가다. 미스릴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무리를 해서라도 알르드의 품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거다.”
“하지만 그건 같은 칠왕국을 공격하는 일 아닙니까?”
“그대의 국가가 칠왕국은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칠왕국의 결속은 진즉에 깨졌다. 이대로라면 우리 인간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대륙의 다른 세력들에게 밀려 역사에 그 이름이 지워질 것이다.”
씁쓸하게 말을 하는 기사왕의 얼굴에는 아쉬운 표정이 잔뜩 배어 나왔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향한 아쉬움인지는 호는 쉽게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레이자가 자신의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했다.
“맞아요. 저도 비슷한 생각이에요. 통일된 제국도 아니고 쪼개진 인간들의 나라는 다른 종족의 상위 권력자 수준의 세력밖에 되지 않아요. 더욱이 인간들을 지키는 방패였던 골든 크로우도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상황이죠.”
“맞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 누군가에게 흡수될 운명이지.”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저희들이 먼저 움직이는 것이 그들에게도 더욱 좋은 결과가 될 거예요. 적어도 호님은 다른 종족을 우대하고 인간들을 차별하시는 정책을 펼치시지는 않잖아요?”
무거운 대화가 이어지자 막사에 있는 영웅들이 모두들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생각만큼은 다들 비슷했다. 레이자의 말대로 알르드는 종족의 차별이 없는 이상향이나 다름없는 국가였다. 그리고 호가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일단 칼스 모에드에게 망명을 할 의사가 있는지 의향을 물어보도록 하죠. 만약 망명을 하겠다고 하면 모에드의 한 지역을 다스리는 군주로 임명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레이자의 말에 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힐몽거처럼 능력이 있는 영웅라면 충분히 군주로 임명할 생각이 있었다. 게다가 자신들을 다스리던 이가 그대로 있을 테니 모에드 국민들의 혼란도 크게 줄어들 터였다.
그렇게 모에드의 운명을 결정지을 몇 가지 이야기가 끝나고 호는 다시 힐몽거를 불렀다.
“……지금의 위기를 어떻게 넘긴다 하더라도 모에드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일 뿐입니다. 당장 천족의 지원을 받은 신성 제국이 군사를 일으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미피츠에서 갑자기 돈을 회수한다고 하면요?”
“그, 그런! 모에드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휴식을 취하고 다시 호를 만난 힐몽거는 칼스 모에드와 함께 망명을 하지 않겠냐는 호의 충격적인 제안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알르드의 화살이 급작스럽게 자신들을 향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힐몽거가 도움의 눈으로 기사왕을 바라봤지만, 그녀는 냉정하게 고개를 두어 번 가로 지을 뿐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위협하는 모에드의 현 상황을 그리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크윽.”
“결속이 깨진 칠왕국은 다른 세력들의 맛좋은 먹잇감이 될 뿐이죠. 장군도 그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못하시라 생각합니다.”
호의 말에 힐몽거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그 뜻을 짐작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힐몽거가 힘겨워 보이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으으음. 호님의 뜻을 폐하께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낮은 신음 소리를 내며 힐몽거는 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홀로 치린트 성을 떠났다.
열흘 후, 모에드 왕의 서신이 알르드에 도착했다. 서신을 전달한 이는 B 급 인간 영웅이었는데, 갑옷의 핏자국이 눈에 띌 정도로 다급한 모습으로 알르드의 국경을 넘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를 쫓아온 일련의 무리들이 덩달아 알르드의 국경을 넘으며 수비대와 교전이 벌어졌다. 당연하지만 인간 영웅을 추격하던 무리들은 실버 문과 브뤼헤아 비쉬의 협공에 의해 모조리 땅에 매장되었다.
망설임이 잔뜩 담겨져 있는 편지는 알르드로 망명을 하겠다는 말과 함께 신성 왕국과 손을 잡은 귀족들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내용이 칼스 모에드의 친필로 적혀 있었다. 그리고 호가 대전에 있는 영웅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칼스 모에드가 망명 의사를 전해왔다. 그리고 현재 신성 왕국의 라헬교와 손을 잡은 귀족들이 십오만 가량의 군대를 갖추고 모에드의 수도로 진격중이라고 한다. 힐몽거 장군이 어떻게든 막아내고 있기는 한 모양이지만 전황이 상당히 불리한 모양이다. 당장 전쟁 준비를 하고 칼스 모에드를 구출하는 한 편, 쓸모없는 귀족들의 세력을 뿌리 뽑도록 한다.”
“어엇?!”
“전쟁이로군!”
호의 말에 영웅들의 눈이 등잔만큼 커졌다. 레이자나 기사왕 역시 조금은 놀란 표정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을 하기는 했지만, 이렇게나 빨리 칼스 모에드가 망명 의사를 보내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신성 왕국이 이번 일이 끼어들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것이다.
“미피츠의 수작에 넘어간 귀족들이 천족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신성 왕국의 광신도들과 손을 잡았다고? 조금 이상하지 않아요?”
한시진이 인상을 쓰고는 입을 열었다. 갑작스레 신성 왕국이 끼어들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호는 그 이유에 대해 아주 간단하고 단순하게 결론을 지어 보였다.
“미피츠와 천족이 원래부터 손을 잡고 있던 사이라면 이해되는 일이야.”
“그렇다는 이야기는…….”
호의 눈동자가 힐끔 기사왕에게로 향했다.
“그나이 칼츠만의 죽음 역시 천족과 관계가 있다는 이야기겠지. 아무래도 그들에게는 눈엣가시와도 같은 인물일 테니까…….”
추측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호는 분명 그나이 칼츠만이 천족의 손에 죽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SS등급의 던전 의뢰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 벌어진 천족과 수인 왕국의 협공, 마로의 이야기, 골든 크로우의 지원을 거부한 행위 등 미피츠의 이상한 행보는 천족이 뒤에 있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퉁 파오의 성격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그리고 이야기가 계속되는 동안 주먹을 불끈 쥐며 눈을 감고 있던 기사왕이 호를 향해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믿고 군대를 맡겨주었으면 한다. 내가 직접 모에드의 쓰레기들을 처리하고 신성 왕국을 점령하겠다.”
선언에 가까운 아르티아의 말에 전쟁으로 공을 세우고 싶어 하던 영웅들이 종족을 가리지 않고 모두들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주위로 섬뜩한 기세가 맹렬하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기세가 얼마나 흉악한지 호는 자신의 피부가 따갑게 느껴질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