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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너스 대륙전기-367화 (367/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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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너스 대륙전기 367화

스르릉.

은빛의 검신에 나선형으로 룬 문자가 빼곡하게 새겨진 장검이 서늘한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과거 무적의 육군을 이끌었던 블루 스케일의 공작 펠리오페의 애검인 S등급의 무기 아르마다였다.

그리고 수백 년의 시간이 지나 현재 명검 아르마다의 주인이 된 인물은 알르드의 공작 한시진이었다.

그런 한시진을 앞에 두고 은빛의 플레이트 갑주로 무장한 미모의 여인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자신의 대검을 양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렇게 두 여인이 들고 있는 무기가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자 음소거가 된 듯 주위가 조용해졌다.

그렇게 서로 전투 자세를 취한 상황에서 한시진이 먼저 몸을 움직였다.

“어엇!”

어디선가에서 터져 나온 탄성이 끝나기도 전에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한시진이 두터운 플레이트 갑옷의 이음새를 노리며 정확하게 자신의 장검을 찔러 넣었다.

카캉!

하지만 상대는 최근 리그너스 대륙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한시진보다도 훨씬 예전부터 대륙의 강자로 공인된 영웅.

그런 한시진의 공격에 기사왕 이레네 아르티아는 자신의 몸을 살짝 틀어 검의 경로에 갑옷의 두터운 부위를 가져다 대었고, 금속 특유의 소음과 함께 먼저 공격을 가했던 한시진의 검이 위로 튕겨져 올라가며 그녀의 균형이 무너졌다.

그리고 그 순간, 기사왕의 대검이 거친 바람소리를 내며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어졌다.

쿠아앙!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흙더미와 자갈조각이 사방으로 날아서 흩어졌다. 조그마한 크레이터가 생겨날 정도로 위력적인 공격이었지만 한시진은 재빨리 자리를 피해 기사왕의 사정거리 밖으로 벗어난 뒤였다.

“발이 재빠르군.”

“원래는 느린 편이었는데 이 세계에서 마나라는 힘을 깨달았거든요. 그나저나 나름 마나 운용에 대해서도 자신이 있었는데, 지금 보니 당신 보다는 못한 것 같네요. 그 짧은 시간에 특정 부위에 마나를 집중시켜 제 공격을 튕겨낼 줄이야…….”

“기사왕이라는 허명은 그냥 얻은 게 아니다.”

“그래도 이제부터는!”

띵동.

-한시진이 검의 길을 발동했습니다. 그녀의 공격은 앞으로 5분간 상대의 방어력을 무시합니다.

스킬을 발동한 한시진이 다시 기사왕을 향해 달려들었고, 좀 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녀의 공격을 막으려던 이레네 아르티아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칠제라는 기사왕의 명성은 딱지치기로 딴 게 아니라는 듯 아르티아의 움직임도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고, 서로의 검이 연달아 부딪치면서 금속의 울부짖음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호는 그런 두 영웅의 격돌을 보며 손에 땀을 쥐고 있었다.

‘설마 다치지는 않겠지?’

혹시나 하는 사태를 대비해 회복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실버 문과 브뤼헤아 비쉬들이 뒤에서 대기 중이었지만, 결투가 완전히 끝나기 전까지는 마음이 편할 것 같지가 않았다.

서로를 향한 공격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위력적이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럽게 두 여인이 검을 맞대게 된 이유는 별거 없었다. 무력시위에도 불구하고 블루 스케일의 반응이 너무나도 잠잠하자 찝찝함을 느낀 호가 한시진을 데리고 치린트를 방문했고, 그 자리에서 서로의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두 검사가 호승심이 동한 것이다.

그래도 마장기전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마장기를 이용한 일기토가 펼쳐졌다면, 그 수리비가 만만치 않을 터였다. 완파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로의 승부욕을 생각하면 반파까지는 갔을 테니까.

어쨌든 자신의 세계에서 제국을 대표하는 기사단을 이끌었던 여인과 리그너스 대륙의 정점에 있는 강자. 한시진과 이레네 아르티아의 결투는 이제까지 호가 목격했던 다른 영웅들의 싸움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날카롭고, 위력적이었다. 둘 다 S등급 이상의 클래스를 지닌 영웅들다웠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장난이 아닌데……?’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스피드로 서로를 향해 검을 휘두르는 둘의 모습에 호는 천재라는 족속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적어도 평범한 재능을 가진 이들은 평생을 노력해도 저런 움직임을 보일 수 없었다.

아니, 저런 움직임을 보일 수 있을 때까지 노력을 하는 것 자체가 천재가 지닌 재능 중 하나였다.

결국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움직임으로 모두에게 충격과 감탄을 준 둘의 결투는 기사왕 이레네 아르티아의 승리로 끝이 났다.

한시진도 분전하기는 했지만 이레네 아르티아가 자신의 스킬 검신을 발동하자 순식간에 결투의 균형이 무너진 것이다.

“크윽. 다음에는 제가 이길 거예요!”

자신이 졌다는 사실이 쉽사리 믿기지 않는지 좌절한 듯 땅바닥에 앉아 있던 한시진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이레네 아르티아를 향해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시진의 얼굴에는 미묘한 기쁨이 담겨 있었다. 그녀가 검사라는 것을 보여주는 표정이었다.

‘슬슬 시진이도 SS등급의 클래스로 전직을 해야 할 텐데…….’

소드 다크니스 혹은 검제.

현재의 등급이 S등급인 만큼 상위 클래스로 향하는 전직 퀘스트의 난이도는 당연히 쉽지 않았다.

그렇게 천천히 전직 퀘스트를 하는 동안 각각의 SS등급 클래스가 보여주는 매력에 여러 번이나 마음이 바뀌었던 그녀였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을 보아하니 둘 중 어떤 클래스로 전직을 하던 간에 슬슬 본격적으로 한시진의 전직 퀘스트를 진행해야 할 것 같았다. 잠시 군주의 자리를 내려놓더라도 말이다. 군주로써의 그녀의 능력은 대신할 이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그러니 이제는 본인 개개인의 능력을 높일 차례였다.

그리고 그게 호에게도 더욱 도움이 되었다.

“검제로 전직할 거예요.”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더니……. 너 검제에서 소드 다크니스로 마음이 바뀐 거 아니었어? 그런데 다시 검제로 돌아가는 거야?”

임시 막사 안에서 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한시진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대일보다는 일대일이 더욱 좋을 거 같아요. 검으로써 내가 최고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요. 게다가 기사왕이 사용한 그 무지막지한 능력이 검신이라는 스킬이었죠? 검제로 승급하고 그 윗 단계의 클래스가 되어 그보다도 더욱 강한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깨달음을 얻을 거예요.”

“검신보다 강력한 스킬이라……. 어머어마하겠네.”

검신은 무려 EX등급의 스킬이었다. 그것보다 높은 등급이라면? EX+1이 되어야 하나? 아니면 각성 EX?

“꼭 얻을 거예요. 무조건요. 최근 안이해진 감이 없잖아 있었는데, 오늘부터 검술 수련에 들어가야겠어요.”

호의 목소리에 떨떠름함이 섞여 있었기 때문일까?

한시진이 입술을 삐죽이더니 의욕을 불태우며 말했다. 그런 둘의 앞에 레이자가 투명한 액체가 담긴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라임향이 강하게 하는 차로 엘프들의 특산품인 푸 차(Tea)였다.

“고마워요, 레이자. 그나저나 블루 스케일은 아직도 별다른 움직임이 없나요?”

“네. 최근에는 국경 지대의 방어 시설 건설에 투입되던 인부들도 완전히 철수를 시켰어요. 솔직히 그냥 건설을 진행해도 우리로서는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텐데……. 은근히 눈치는 보는 모양이더라고요.”

“분명 우리의 움직임에 항의하기 위해 블루 스케일의 귀족들이 와도 벌써 몇 번은 와야 정상인데…….”

스완의 귀족들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참으로 궁금했다. 슬쩍 호의 시선이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이레네 아르티아에게 향했지만, 그의 시선을 받은 기사왕은 좌우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괜히 자원을 낭비할 필요도 없고, 슬슬 군사를 철수시킬까…….’

치린트의 화력 훈련으로 사용되는 전투 물자들은 공짜가 아니다. 하루에도 몇 십만에서 몇 백만 리스가 허공에 흩뿌려지는 것이다.

게다가 블루 스케일은 자신의 기분을 건드렸던 국경지대의 방어시설도 공사를 중단한 채 철수했다. 그렇다면 더 이상의 화력 훈련은 분란을 일으키겠다는 말과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호는 거기까지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면 군대를 철수시키고 이레네 아르티아에게 해군의 훈련을 레이자는 정치능력이 괜찮은 편이니까 함선을 건조하는 장인들의 관리를 맡겨야겠다.’

그리고 자신은 천천히 한시진의 승급 퀘스트를 위한 준비를 하면 될 것 같았다. 쉽지는 않겠지만 공략본의 힘을 빌리면 어떻게든 성과는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호가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하던 도중이었다.

“호님!”

막사 안으로 실버 문 한 명이 들어와 호의 이름을 불렀고, 레이자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무슨 일이지?”

“정찰대가 자신을 모에드의 귀족이라고 우기는 수상한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모에드의 귀족? 혼자였나?”

호의 반문에 실버 문은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기세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기는 한데……. 이름을 물어보니 힐몽거라고 말하더군요.”

“힐몽거?”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었다.

“모에드의 총사령관이잖아?!”

그리고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호가 이름의 정체를 떠올리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외치듯 말했다. 호만이 아니었다. 갑자기 사레가 들렀는지 레이자가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크게 기침을 시작했고, 이레네 아르티아 또한 눈을 동그랗게 떴다.

* * *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폐하. 무례를 범하고 갑작스럽게 찾아온 저를 반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찰대가 발견한 수상한 이는 사기꾼이 아니라 정말로 모에드의 장군 힐몽거가 맞았다. S등급의 영웅으로 통솔 능력이 SS등급인 장군형 영웅이었다. 그렇게 호에게 예의를 차려 인사를 한 힐몽거는 호의 곁에 있는 기사왕 이레네 아르티아를 보고는 다시 한 번 고개를 꾸벅였다. 인간들의 수호자였던 위대한 영웅을 향한 예의였다.

“바라테이온과 천족과의 전쟁에서 활약한 장군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소환자로 대륙에 제국을 세우신 호 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헛된 명성일 뿐입니다.”

“후후. 감사합니다. 그러나 서로의 얼굴에 대한 금칠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고.”

호가 옅게 웃으며 힐몽거를 바라보았다.

“모에드 왕국과 우리는 칠 왕국의 기치 아래에서 함께 피를 나눈 전우로 몇 번의 전쟁을 동맹국으로 함께했지만 딱히 서로에 대한 교류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힐몽거 장군이 저를 찾아올 일이 없단 말이죠.”

“맞습니다, 폐하.”

“그런데 갑자기, 그것도 공식적인 사신단이 아닌 힐몽거 장군께서 혼자서 비밀스럽게 저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도직입적인 호의 물음이 공격적으로 느껴진 것일까? 힐몽거는 바싹 말라있는 자신의 입술을 실룩였다. 그리고는 큰 결심이라도 한 듯 무릎을 꿇었다.

“그, 그게……. 제발 저희 왕국을 도와주십시오, 폐하!”

갑작스러운 힐몽거의 행동에 호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영문을 모르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이유부터 말하면 뭐라 이야기라도 하지, 무릎부터 꿇으니 입에서 아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대의 행동이 오히려 알르드의 주인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가?! 당장 일어나라.”

그 때, 기사왕의 목소리가 막사 내를 강하게 울렸다. 그러자 힐몽거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당황함에서 벗어난 호가 눈으로 이레네 아르티아에게 감사를 표했다.

“도와 달라? 전쟁이라도 일어났습니까?”

“아닙니다. 하지만 곧 일어날 겁니다.”

“모에드가? 아이리스 성국과의 전쟁입니까? 두 국가 모두 계속된 전쟁으로 전쟁을 치를 여력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제 생각이 틀렸습니까?”

“아이리스 성국과의 전쟁이 아닙니다. 모에드가…… 알르드를 공격해야 합니다.”

웅성웅성!

힐몽거의 충격적인 말에 막사 내에 있는 모든 영웅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그리고 호가 나서기도 전에 기사왕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대들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 온지 모른단 말인가?! 칼스 모에드가 미치기라도 했단 말인가?!”

기사왕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 담겨 있었다. 서로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멍청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하려는 인간 국가들에 대한 실망감이었다. 골든 크로우부터 블루 스케일 이번에는 모에드까지.

왕국들의 한심스러운 행태에 그녀의 얼굴이 흥분으로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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