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6
리그너스 대륙전기 366화
“일부러 우리를 도발하는 몰상식한 행동입니다! 모두들 알다시피 알르드의 영토가 얼마나 넓습니까? 그런데 에레브 그것도 우리 국경과 인접해 있는 영지인 치린트에서 훈련이라뇨?!”
“병사들의 말에 따르면 폭발로 인한 흙더미들이 국경을 넘을 정도랍니다! 대체 얼마나 가까이에서 무기를 사용하고 있다는 겁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알르드와 전쟁이라도 해야 합니까?”
“허어……. 갑자기 알르드가 왜 우리들을…….”
“하아.”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흘러나오는 귀족들의 말에 블루 스케일의 여왕 세이라 클리퍼드가 미간 사이를 좁혔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알르드의 도발에 골치가 아픈 상황이었다. 다만, 알르드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짐작 아니 확신하는 요인이 있었다.
“분명 무슨 의도가 있는 행동일 겁니다. 사신을 보내 알르드의 군주인 윤호의 의향이 뭔지 알아내야 합니다.”
“전에 이레네 아르티아 폐하가 알르드의 영웅들과 방문했을 때 했던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 아니요?! 왜 괜히 그 일을 거절해서는…… 에잉!”
알르드의 군사 행동에 겁을 먹은 귀족들은 해결책은 내놓지 않고 계속해서 소리만을 높였다. 마치 겁을 먹은 병아리들이 삐약삐약 거리는 꼴이었다. 당연하지만 회의가 끝날 때까지 제대로 된 대책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귀족들이 물러나자 블루 스케일의 공작인 스퀴드 수운다가 세이라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전에 깨진 기술 협약과 이번에 알르드의 국경에서 방어 시설이 건설되는 모습이 윤호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습니다.”
“후우. 방어 시설은 그렇다 치더라도 기술 협약 건은 우리의 의지가 아니었는데 말이죠.”
“그렇다고 그 사실을 밝힐 수는 없지 않습니까? 대부분의 귀족들도 모르는 내용입니다.”
스퀴드 수운다의 말에 세이라 클리퍼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주변 상황에 대한 불안정함이 무거운 왕관을 쓴 그녀의 머리를 강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거뭇한 눈가가 그녀가 지금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잘 말해주고 있었다.
“그 때 천족들의 제안을 거부해야 했어요.”
“……어쩔 수 없었습니다. 트렛슈의 제안은 귀족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을 정도로 매력적이었으니까요.”
“그리고 그게 우리의 발목을 붙들고 있죠.”
세이라 클리퍼드가 힘없이 입꼬리를 올려보였다. 자조적인 미소였다.
바라테이온과의 전쟁에서 멸망의 위기에 빠졌던 블루 스케일은 호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오히려 전쟁이 끝난 후, 자원이 풍족한 바라테이온의 영토 네 개를 손에 넣을 수 있었는데 이는 전부 호가 점령했던 땅이었다.
그리고 전쟁에서 별다른 공을 세우지 못한 블루스케일이 이 영토들을 자신들의 품에 안을 수 있던 과정에는 바로 천족과의 비밀스러운 거래가 있었다.
- 과거는 잊고 서로 함께 앞으로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이 도와드리겠습니다.
거한 트렛슈가 스완의 궁성을 찾아와 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의 혀에 넘어간 귀족들은 바라테이온의 영토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천족들에게 무려 1000억 리스라는 어마어마한 자금을 빌리는 데 합의했다.
그리고 그 돈의 무게가 지금 블루 스케일의 어깨를 꽈악 내리누르고 있었다.
“기술 협약을 파기하는 대가로 얼마를 탕감 받았죠?”
“50억 리스입니다.”
“우리와 알르드의 관계가 엉망이 되는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네요. 적어도 100억 리스는 깎는 줄 알았는데요?”
“그것도 이자를 포함해서 깎은 돈이라 원금만 따지고 보면 막상 탕감 받은 돈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하아. 이래서 돈은 함부로 빌리는 게 아니라고 했는데…….”
세이라 클리퍼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덕분에 블루 스케일의 재정은 완전히 엉망이나 다름없었다. 걷어 들이고 있는 세금 중 반이 조금 안 되는 돈이 천족들에게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원이 풍족한 바라테이온의 영토와 스퀴드 수운다 공작의 발전된 영토에 나오는 세금이 아니라면 이미 파산을 해도 일찌감치 했을 상황이었다.
“디아린 상단에게 당해놓고 똑같은 실수를 또 하게 되다니. 아마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왕이 있다면 바로 저 일거예요.”
“폐하가 바보 같은 게 아닙니다. 이 나라의 귀족들이 바보인거죠. 물론, 저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스퀴드 수운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신세 한탄은 여기까지였다. 당장 중요한 것은 알르드와의 관계를 어떻게 푸느냐는 점이었다.
“천족과의 관계를 밝히고 양해를 구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불가능한 일이라는 건 폐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바로 날아오는 타박에 세이라가 쩝하고 입맛을 다셨다. 공작의 말대로 나라의 체면이라는 게 있었다.
게다가 그 사실을 천족들이 알게 되어 문제로 삼아 물고 늘어지면 그보다도 더 곤란한 일이 없었다. 결국 두 남녀가 곰곰이 머리를 맞대어 봤지만 목소리만 시끄러웠던 귀족들처럼 뾰족한 수가 딱히 나오지 않았다.
* * *
“뭐라고?! 다시 말해봐!”
퉁 파오의 호통소리가 화려한 대전에서 울려 퍼졌다. 그리고 한 상인이 허리를 넙죽 숙인 채 쩔쩔매며 말했다.
“서른 개나 되는 상단이 케리아 시장과 경매장에서 철수를 하겠다고 통보해 왔습니다. 우리와의 거래도 더 이상 진행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무, 무슨!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상단이 철수한다니? 왜?!”
“그게…….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르겠습니다.”
“이잌! 아니, 네놈은 왜 그걸 잠자코 보고 있었단 말이야?! 바짓가랑이를 붙잡던 협박을 하던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했어야지! 이 쓸모없는 자식아!!!”
두꺼비처럼 늘어진 퉁 파오의 턱이 푸르르 떨렸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온 몸으로 자신의 분노를 토해내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철수하던 상단의 직원을 통해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상한 이야기? 그게 뭔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던 퉁 파오가 분이 풀리지 않는 얼굴로 소리를 지르듯 물었다.
“토란의 중형 상단에서 일하던 말단 직원이었는데 그 녀석, 자신들의 상단이 알르드로 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최근 알르드의 림드 산맥 지방에 우리의 케리아 시장과 비슷한 상업 지구가 생겼다고…….”
“뭐라?! 아이고!”
퉁 파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지만 본인의 육중한 몸무게로 인해 끄응거리는 소리와 함께 다시 주저앉아야만 했다.
어쨌든 서른 개의 상단이 철수했다는 사실은 가볍게 여길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중에는 수인 왕국의 상단 중 가장 영향력이 큰 거대 상단인 라홀로프 상단도 끼어 있었다.
그런 라홀로프 상단의 철수는 다른 수인 왕국의 상단에게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칠 게 틀림없었다.
‘기사왕이 알르드로 망명했다는 보고는 받았는데…….’
그나이 칼츠만의 일 때문에 그녀의 동태를 주시하던 퉁 파오였다. 하지만 시간이 제법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잠잠한 모습만을 보였기에 최근 들어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기사왕과 손을 잡은 알르드 놈들이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눈 게 분명해 보였다.
“빌어먹을……. 그냥 있을 수는 없지!”
욕설을 내뱉으며 퉁 파오는 이를 갈았다. 탐욕스러운 성격인 그는 자신의 것을 빼앗기는 게 그 무엇보다도 싫었다.
“일단 미피츠를 방문한 모든 상단에게 일시적으로 세금을 감면하겠다고 말해. 그리고 뒤로 수인 놈들에게는 좀 더 세금을 깎아주겠다고 얘기해 놔. 아, 천족도.”
이러한 사안은 원인부터 그 요소를 완전히 없애 버려야만 똑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다른 상단의 마음이 뜨는 것을 막는 일이었다. 괜히 알르드로 가겠다고 설쳐대는 녀석이 생겨나면 골치가 아팠다.
그 다음은 문제를 일으킨 놈에 대한 징벌이었다. 문제는 미피츠가 군사를 일으켜 알르드를 공격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점이었다. 해상 전력도 미비할뿐더러 육상 전력 역시 알르드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라이온레인을 위시한 알르드의 마장기 편대의 위력은 이미 대륙에 소문이 나 있었고, 기사왕까지도 합류한 상황이었다.
“으음…….”
퉁 파오는 자신이 앉아있는 자리의 오른쪽을 살짝 흘겨보았다. 흰 날개를 지닌 영웅이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과의 거래를 위해 찾아온 천족 영웅이었다.
하지만 알르드를 공격하는 데 있어 천족의 도움을 바랄 수는 없었다. 천족들과 거래를 시작하면서 퉁 파오가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그들이 자신 만큼이나 탐욕스러운 존재라는 점이었다. 천족들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목에 쇠줄을 채우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설령 도움을 받는다 하더라도 문제였다. 자칫하다가는 미피츠가 배신자로 낙인 찍혀 알르드를 포함한 다른 왕국에게 연합 공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아! 방법이 있었군.’
머리를 굴리던 도중 문득 하나의 생각이 떠오르자 퉁 파오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여전히 허리를 넙죽 숙이고 있는 상인을 향해 호통을 치듯 말했다.
“지금 당장 뛰어가서 모에드의 루빅 자작을 불러와!”
자신의 명령에 후다닥 달려 나가는 상인의 뒷모습을 보며 퉁 파오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기 시작했다.
미피츠가 직접 알르드를 공격할 수 없다면 다른 이를 이용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모에드는 계속된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미피츠에 상당한 양의 돈을 빌린 국가였다.
‘공짜로 빛을 탕감해주는 건 아깝긴 하지만…….’
모에드에게 빌려준 돈을 생각하니 절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제까지 조용히 앉아있던 천족 영웅이 모호한 웃음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곤란한 일이 벌어졌군요. 우리들이 도울 수도 있을 것 같다만?”
천족 영웅의 말에 퉁 파오의 눈썹이 한 번 움찔했다. 이어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우리가 알아서 할 일이요. 알르드의 애송이쯤은 굳이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기게 만들 수 있지.”
“과연 미피츠를 장악한 대상인다운 말이로군요. 하지만 알르드의 윤호는 쉽게 생각할 소환자가 아닙니다. 골든 크로우와의 전쟁에서 레모스 님이 그에게 당했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퉁 파오가 잠시 움찔할 정도로 스산한 목소리가 천족 영웅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골든 크로우와의 전쟁에서 세라핌과 함께 폭사한 레모스의 사고는 아직까지도 천족들에게 있어 큰 충격으로 남아 있었다.
하물며 천족들은 윤호의 손에 의해 십 천사 중 셋을 잃기까지 한 터라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는 원수나 다름없는 사이였다.
“으음……. 하긴 알르드의 군사력이 확실히 대단한 수준이기는 하지. 그렇기에 나는 모에드 왕국을 이용해 알르드와 전쟁을 하게 만들 생각이요. 모에드에 빌려준 돈이 있거든.”
“오호? 괜찮은 생각인데……. 잘하면 우리가 도와줄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군요.”
“도와줄 일?”
퉁 파오의 되물음에 천족 영웅은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돈을 뜻하는 제스쳐였다.
“블루 스케일에 지어둔 빚이 있소. 적어도 그들이 알르드를 향해 전쟁을 시작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은 되는 빚이지.”
“그래서 모에드와 블루 스케일이 연합하게 만든 후에 알르드를 공격하자?”
“그렇소. 물론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이득이 돌아가야지만 블루 스케일에게 이야기를 할 것이오. 적어도 고위 천사들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은 돼야겠지. 상업 왕국의 재력을 생각하면 무리인 수준은 아닐 거요.”
“큿!”
결국 돈을 달라는 천족 영웅의 말에 퉁 파오가 인상을 쓰며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나 눈앞의 천족에게서 흘러나온 제안은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너무나도 달콤해서 독인 걸 알면서도 삼켜야 할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며칠 뒤, 천족의 수도 프리테븐에서 십 천사의 위를 지닌 영웅 한 명이 출발해 블루 스케일을 방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