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4
리그너스 대륙전기 364화
상업 왕국 미피츠의 상인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그들은 한 가지 큰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바로 리그너스 대륙의 모든 특산품은 미피츠에만 몰려들며 미피츠가 아니면 대륙 곳곳에서 활동하는 다른 종족의 상단들과 연을 틀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만큼 자신들이 쌓아올린 상업 왕국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것이리라.
호는 그런 미피츠 상인들의 착각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여기고 있었다. 적어도 리그너스 대륙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특산품이 미피츠를 거치고 지나간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하지만 미피츠가 아니면 대륙에서 활동하는 다른 종족의 상단과 거래를 틀 수 없다?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
림드 산맥만 하더라도 엘프, 인간, 수인, 드워프의 상단이 주로 오가며 큰 시장을 이루고 있었다. 거기에 큰 이익을 기대하며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오는 작은 규모의 정령과 마족의 상단들도 가끔씩 볼 수 있었다.
물론, 미피츠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숫자이기는 했다.
“그래서 리그너스 대륙의 무역 중심지인 미피츠의 역할을 우리 알르드가 가져오겠다고요?”
“그렇지. 솔직히 위치는 나쁘지 않잖아?”
‘종족의 배신자’ 퀘스트와 이레네 아르티아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미피츠를 공격해 퉁 파오를 처단해야만 했다.
상업 왕국이라고 해봤자 그들의 군사력은 형편없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알르드의 전력이라면 한 달 아니 일주일정도면 미피츠를 대륙의 지도에서 지워버릴 수 있었다.
‘문제는 미피츠를 공격하게 되면 대륙의 모든 상단이 나에게 등을 돌릴 거라는 점이지.’
상업 왕국을 공격하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이들은 누굴까? 바로 상단들이었다.
그렇기에 전쟁이 벌어지면 상단들은 당연히 자신들에게 손해를 입힌 알르드에게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될 테고, 그것은 호에게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왔다.
대륙의 통일을 이뤄낸 게 아닌 이상 영웅들의 승급에 필요한 특산품을 구매하려면 어쩔 수 없이 다른 종족 상단들의 힘을 빌려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영지에 필요한 자원들 역시 알르드 내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품목이 아니면 다른 상단의 손을 빌려야만 했다.
대표적인 특산품이 바로 실버 문의 양성과 유지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달빛의 가루였다.
만약 미피츠를 공격해 정령 상단과의 관계가 나빠진다면? 달빛의 가루를 구할 수 없어 실버 문의 훈련도 불가능해질 터였다.
괜히 빈대 잡다가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었다.
그리고 동일한 특산품을 취급하는 상단들을 찾아 서류를 정리하던 디아린이 호의 말에 기지개를 쭈욱 펴고는 말했다.
“뭐, 좋은 편이죠. 대륙의 남동쪽으로 위치가 좀 치우쳐 있기는 하지만 카틀라스 항구나 디치 플레이스만을 통해 해상을 통해 방문할 수도 있고, 여러 세력들과도 함께 부대끼고 있어 그쪽의 상단도 쉽게 만날 수 있으니까요. 적대 세력인 천족은 좀 그렇지만……. 게다가 시장이 엄청 크잖아요?”
알르드의 어마어마한 인구는 상인들이라면 군침을 흘릴 수밖에 없는 요소 중 하나였다.
다른 도시에서 물건 백 개를 팔 수 있다면 알르드에서는 이백 개, 아니 천 개도 넘게 팔아재낄 수 있었다. 하지만 알르드의 장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일단 안전해요. 상인들이라면 언제나 몬스터나 도적들에 대한 습격에 조심을 할 수밖에 없는데…….”
SSS랭크의 실버 문, 브뤼헤아 비쉬를 비롯해 S+랭크의 기병대인 윙드 훗사르까지 주둔을 하고 있는 곳이다.
그만큼 알르드의 치안은 소규모의 도적단이나 소형 몬스터조차도 활동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안전했다. 행여나 상인들을 위협하는 무리들이 나타난다면 하루도 지나지 않아 토벌될 게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쁘지 않네요? 아니, 상당히 괜찮은데?”
서류를 바라보던 디아린의 눈동자가 새초롬하게 빛났다.
“거기에 일정량의 세금 면제와 특산품을 보관할 수 있는 창고를 빌려주고, 백 명 수준의 호위 병력까지 지원해준다면 어때? 상인들이 좀 찾아오겠어?”
“이런 미친! 당연한 거 아니에요?! 그런 조건을 뿌리치고도 알르드에 오지 않는다? 그런 놈들은 상인이라고 부를 자격이 없어요!”
호의 입에서 나온 파격적인 조건에 흥분한 디아린이 빽 하고 소리를 높였다. 그러고는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호의 모습에 민망한 듯 자신의 코를 슬쩍 긁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그런데……. 세금 면제와 호위 병력 지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익숙한 것을 무너뜨리려면 충격적인 게 필요하지. 최소 몇 년 아니 수십 년 동안이나 상업 왕국을 통해 거래를 튼 상단들이야. 그런 이들의 마음을 돌리려면 그들을 유혹할 수 있는 확실한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겠어?”
“맞는 말이네요. 그런데 그거와 이 끔찍한 서류의 산더미를 정리하는 우리와는 무슨 상관관계가 있을까요?”
“더욱 매력적인 서비스로 상업 왕국의 명성을 완전히 무너뜨리자는 거지.”
“매력적인 서비스?”
호는 대답대신 디아린이 정리하던 서류의 맨 앞장을 슥 빼들었다.
“게코 상단. 주로 취급하는 품목은 식료품인 달걀과 드워프제 창?”
서류를 읽던 호의 말끝이 살짝 올라갔다. 달걀과 창이라니?
아무리 상인들의 특성상 별별 품목을 다 취급한다지만 이 두 가지 품목은 괴리감이 너무 컸다.
“수인 왕국의 리저드 부족 상단이에요. 거기 나왔다시피 달걀은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주식이고, 창 또한 리저드 부족이 가장 선호하는 무기에요. 당연히 단단한 드워프제를 좋아하죠. 주로 갑옷의 제작에 사용되는 반짝이는 비늘을 특산품으로 판매하는데 보통 물물교환을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물건을 손에 넣는 편이에요. 뭐, 다섯 개 안팎의 특산품만을 교역하는 중, 소형 규모의 상단이에요.”
한 상단의 상단주답게 디아린은 게코 상단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늘어놓았다.
“그렇다면 창을 취급하는 드워프 부족 상단은?”
“음……. 당장 기억나는 건 트라이덴트 상단밖에 없네요. 그런데 그건 왜요?”
“바로 그런 이들을 우리 알르드가 연결시켜 주는 거야. 게코 상단은 창을 구매할 수 있어서 좋고, 드워프 상단 역시 주기적으로 자신들의 물품을 판매할 수 있는 구매자를 구해서 좋고.”
“이미 미피츠의 플락티에서 그런 역할을 하고 있을 걸요? 게다가 상단들의 분점도 있고요.”
“거기는 경매장이잖아. 매번 시세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곳이라고. 그리고 대륙의 모든 상단들이 미피츠에 분점을 냈어?”
“그건 아니죠.”
대륙에서 활동하는 상단들의 숫자는 어마어마하다. 미피츠의 시장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들을 모두 받아들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알르드는 달랐다. 림드 산맥의 디르시나만 하더라도 1000 만의 인구가 넘는 에큐메노폴리스 등급의 영지였고, 디르시나의 위성 도시인 에스타라다, 해머스, 킬리드, 베코바와 같은 영지도 인구수 500만이 넘는 메갈로폴리스 등급의 영지였다.
그에 반해 전에 SS 등급의 던전을 토벌하러 잠깐 들렀던 미피츠의 규모는 메트로폴리스 등급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상단의 분점을 유치할 수 있다고.”
호의 말에 디아린의 눈빛이 떨렸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상인으로 잔뼈가 굵은 그녀는 호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지 빠르게 알아차리고 있었다.
“일단은 시장 주변의 도로 정비부터 새로 해야겠네요. 그리고 벨 님과 이야기를 해서 상단들을 위한 건물도 지어야겠어요.”
“건물들의 크기를 전부 동일하게 해서는 안 돼. 대형 상단은 위치가 좋고 넓은 장소를 원할 테고, 중소형 상단은 건물의 크기보다는 임대료가 싼 곳을 좋아할 테니까.”
“그 정도는 기본이죠.”
과한 염려에 디아린이 피식 웃었다. 호의 말대로 잘만 하면 상업 왕국이라는 명성을 빼앗아 올 수 있는 기회였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상인들의 꿈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각 상단들에 대한 정보가 적혀져 있는 서류의 정리였다.
“철광석? 목재? 철재? 공업품을 다루는 전형적인 드워프 상단인데, 거래량이 상당하네?”
“아, 최근 드워프들이 새로운 광산을 발견했나 봐요. 소문으로 듣자하니 그 크기가 수도에 있는 콜스타인 광산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거대하다고 해요. 게다가 미스릴까지 발견되면서 드워프들은 현재 축제 분위기에요.”
“걔네들 마족과 전쟁 중 아니었어?”
“전쟁은 전쟁이고, 광산을 발견한 건 발견한 거죠.”
“역시 광부들답네. 그나저나 리그너스 대륙에 콜스타인 광산보다 더 큰 광산이 있다고?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내 기억이 잘못됐나……?”
호가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허공에 손가락질을 하며 무언가를 보는 것 같은 이상한 행동을 시작했지만, 림드 산맥을 대륙의 상업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팔린 디아린은 그런 호의 모습에 신경을 끄고는 서류의 정리에만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단들을 빼앗아 미피츠를 고립시키고, 블루 스케일과의 연구 협약을 통한 기술 획득으로 건조한 함대를 내보내 그들을 짓밟겠다는 호의 계획은 시작부터 어그러졌다.
* * *
“뭐, 뭐라고요?”
“면목이 없다. 세이라 클리퍼드가 내 부탁을 거절할 줄이야. 운송선과 관련된 기술 협약은 가능하지만 전투함은 힘들다고 하더군. 게다가 운송선과 관련된 기술 협약 역시…….”
이레네 아르티아가 씁쓸하게 웃었다. 블루 스케일은 운송선과 관련된 기술 협약의 조건으로 마장기의 제작기술을 요구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아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요구를 한 거죠?”
“천족과 골든 크로우의 전쟁을 보고 깨달은 게 있다고 하더군. 해상전력에 비해 부족한 육상전력을 끌어올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에 대해 알르드의 도움을 바라는 눈치였다.”
“깨달음?”
호의 물음에 기사왕이 힘없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골든 크로우가 무너지는 것을 보며 칠왕국의 결속이 깨졌다는 것을 느낀 거다. 다른 왕국들을 믿을 수 없다는 거겠지.”
덤으로 칠 왕국이라는 방패가 사라진 상황에서 인접한 국가들 중 가장 강력한 군사 국가인 알르드에게 경계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당장 급한 것은 함선의 건조죠? 엘 브릭을 부를게요. 연구소로 사람을 보내면 금방 올 거예요.”
“……어쩔 수 없겠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벨이 그렇게 말하고는 연구소로 병사를 보냈다. 그 모습을 보며 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현재 연구 중인 용족 병종과 관련된 연구들을 모조리 중단하고 배와 관련된 기술 개발을 처음부터 시작해야만 했다.
‘아, 나쁜 놈들.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멸망당할 뻔한 블루 스케일의 위기를 구해준 게 몇 번이나 되는데?!’
호의 입술이 빼죽 튀어나왔다. 당장이라도 스완으로 달려가 세이라 클리퍼드에게 우리의 사이가 이것밖에 되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다.
물론, 그들의 결정이 아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호 역시 자신이 그런 상황이었으면 비슷한 결정을 내렸을 테니까. 하지만 혈맹이나 다름없는 동맹국이라고 생각했던 사이에게 냉정한 거절의 말을 들으니 기분이 찝찝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정말로 리그너스 대륙의 패권을 다투던 종족 중 하나인 인간들에게 큰 위기가 찾아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인간들은 지금의 위기를 이겨낼 수 없을 거다.'
칠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단단하게 뭉쳐도 다른 종족과 비등비등한 마당에 왕국끼리 각자 살려는 움직임이라니?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일까? 이레네 아르티아의 한숨 소리가 더욱 커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비례해 어느새 머리를 차갑게 식힌 호도 앞으로의 계획을 수정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