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3
리그너스 대륙전기 363화
“파신. 카테지나의 뜻을 따르는 반신이라고 알려진 존재답게 나를 비롯한 대륙의 강자가 모두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섣불리 우세를 장담할 수가 없었다.”
잠시 눈을 감고는 호흡을 가다듬어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킨 아르티아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그때의 치열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런 기사왕의 모습에 호는 목구멍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가 아닌 이 세계의 칠제는 SSS등급을 비롯해 게임 내에서는 구현도 되지 않은 EX등급의 능력을 보유한 무시무시한 존재들이었다.
하물며 그들이 보유한 스킬은 어떠한가? 상태창을 보면 눈이 호강을 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능력을 지닌 칠제들은 평범한 실력을 지닌 마장기사가 탑승한 A등급 마장기 두, 세 편대 정도는 어렵지 않게 증발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기사왕은 그런 칠제가 모두 모였는데도 불구하고 파신을 상대로 승리를 장담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아니, 그게 말이 돼?! 오버 밸런스도 적당해야 되는 거 아니야?’
솔직히 믿기 힘든 이야기였지만, 강직한 이레네 아르티아의 성격상 그녀가 과장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분신이자 전략 병기나 다름없는 파신의 병사들은 이 대륙의 가장 강력한 병기인 마장기의 힘을 능가한다. 그게 우리가 파신을 상대로 우세를 생각할 수 없게 만든 가장 큰 이유지.”
“파신의 분신이라면……. 혹시 썬더 퓨리나 익스큐션 스워드, 헬리오스 아쳐와 같은 존재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순간 이레네 아르티아의 눈동자에 이채가 맴돌았다. 정확하게 명칭을 이야기하는 호의 모습에 제법 놀란 모양이었다. 그리고 호가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알르드에는 엘프만이 아니라 루베릭 대륙에서 넘어온 하이 엘프도 한 분 계십니다. 그녀를 통해 자세히는 아니지만 간단한 이야기 몇 가지 정도는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 맞다. 파신의 분신……. 그들은 악신 카테지나에게 바쳐진 제물로 인해 탄생한 비극적인 존재들이다.”
제물이라는 말에 호는 순간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썬더 퓨리를 양성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설명에서 그들을 소환하기 위해서는 성스러운 엘프의 전사 실버 문의 마력과 원소와 마나의 모든 이치를 알고 있다는 마족의 마법사 브뤼헤아 비쉬의 마력이 필요하다는 문장을 봤었기 때문이었다.
하이 엘프 에어리스도 루베릭 대륙의 강력한 EX등급의 병사를 소환하는 방법에 대한 설명에서 제물이라는 단어를 썼었다.
그것도 무려 이만이나 되는 생명이 필요하다고 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만약 기회가 있었을 때 그들을 소환했다면? 지금 자신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뭐, 지금의 그대들이 신경을 써야 할 일은 아니다만…….”
말끝을 흐린 아르티아가 호와 그의 옆에 있는 다른 두 소환자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악신 카테지나와 그녀를 따르는 반신 격의 존재인 파신들이 호시탐탐 이 대륙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어도 나쁘지 않을 거다. 그들은 그대와 적대하는 천족들보다도 위험한 존재들이다.”
기사왕의 말에는 루베릭 대륙에 대한 경고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띵동.
-리그너스 대륙을 수호하려는 의지가 느껴집니다.
-‘EX등급의 전설’로 향할 수 있는 실마리가 발동됩니다. 3……2……1……. 성공.
-SSS등급 영웅 이레네 아르티아의 성장이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이레네 아르티아에 대한 스캔을 시작합니다.
-이레네 아르티아가 지닌 재능의 색이 황금색입니다. EX등급으로의 승급이 가능합니다.
‘갑자기 무, 무슨! 너무 뜬금없잖아?!’
순간적으로 나타난 메시지에 호가 헉하는 소리와 함께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자신에게 집중되는 사람들의 시선에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여보이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이 엘프를 통해서도 카테지나의 잔인함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주의하겠습니다.”
솔직히 그들이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진정한 흑막이자 악역인 여신 라헬보다 자신에게 위험한 존재인지는 잘 알 수 없었다.
기사왕은 리그너스 대륙의 존재지만 자신과 같은 소환자들은 라헬에 의해 강제적으로 끌려온 존재가 아니던가?
그러나 카테지나가 하이 엘프들에게 한 행동과 썬더 퓨리와 같은 루베릭 대륙의 병사들을 소환하는 데 엄청난 수의 제물이 바쳐야 하는 것을 보면 분명 정상적인 존재들은 아닐 것 같았다.
“수인 왕국의 사나운 호랑이를 반죽음 상태로 만들어 놨다니 확실히 조심을 해야겠네요. 그나저나…….”
한시진이 호와 이레네 아르티아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기사왕이라 불리는 인간들의 영웅이 왜 이 자리에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앞으로 우리와 함께하기로 했어.”
“응? 뭐?! 미친! 잠깐 기사왕은 골든 크로우의 왕 아니었어?! 요?”
호의 대답에 얼마나 놀랐는지 한시진의 입에서 순간적으로 욕설과 반말이 함께 튀어나왔다. 다시금 호와 기사왕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의문이 해소되기는커녕 혼란스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스트리드 벨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정이 있어서 왕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나를 따르는 이들과 함께 그대의 연인인 호와 함께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알르드의 행보에 민폐가 되지는 않겠다.”
“아, 아뇨. 기사왕이라면…….”
한시진은 재빠르게 손을 내저었다. 폭풍 바람의 신전에서 함께했던 그녀의 무위는 아직 S등급에 불과한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대단했다. 그런 영웅이 대체 무슨 사정이 생겨서 알르드와 함께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호에게 이야기를 들으면 될 일이었다.
“어쨌든 그런 사정이 있는 줄은 몰랐지만, 수인 왕국의 대응이 영 변변찮아서 계속해서 수인 왕국의 영토를 점령하며 진격해 나갔었어요.”
“그래서? 마인족을 무너뜨리고 사파리를 향해 진격했다면……. 오크와 흡사하게 생긴 돼지들이 나타났을 텐데?”
“네. 자신들을 가리켜 저족이라고 하더라고요.”
돈이 아니라 저다. 간단하게 돈은 집돼지를 가리키고 저는 멧돼지를 가리킨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수인 왕국을 이루는 부족 중 하나인 저족은 멧돼지들답게 오크만큼 포악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문제는 돼지가 포악해 봤자 돼지라는 점이었다.
“제법 많은 군대를 끌고 왔는데……. B, C랭크 위주의 병사들인데다가 마장기도 몇 기 없어보여서 가볍게 밟아주기는 했지만요.”
하지만 한시진은 능히 일군을 지휘할 수 있는 뛰어난 통솔력을 지닌 엘리트 마장기사였다. 게다가 알르드 군은 SSS랭크의 병사들. 저족이 아무리 난리를 쳐봤자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많은 시간이 흘러 수인 왕국의 기술 발전도가 엄청나게 높아진 상황이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저족을 물리치고 계속해서 진격을 하려고 했는데,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점령한 영토를 내주고 뒤로 물러나야만 했어요.”
“갑자기 후퇴해야 할 일이라면……. 보급선이 무너졌나 보네.”
“네. 랙돌과 말라뮤트? 만만치 않은 수인 영웅들이 군사를 끌고 나타났거든요.”
“그렇군.”
여러모로 알르드에게 얻어맞으며 땅과 인구, 재화와 영웅까지 알아서 바치는 호구나 다름없는 수인들이지만 수인 왕국은 오래 전부터 리그너스 대륙의 패권을 다투던 일곱 세력 중 하나였다.
한가락 하는 이들이 없을 리 없었다.
그리고 랙돌과 말라뮤트는 묘인족과 견인족의 장로들로 우인족의 왕인 수소와 비슷한 능력의 영웅들이었다.
골든 크로우로 따지면 황금기사단의 단장과 비슷한 수준의 영웅. 아무리 한시진이라 할지라도 그 둘을 상대하기에는 조금 버거웠을 터였다. 더욱이 보급선이 길게 늘어져 불리한 상황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결국 호올스까지 물러나야만 했죠.”
“잘했어. 나쁘지 않은 선택이야. 만약 호올스 너머로 진격을 했으면 국경이 길게 늘어져 수인 왕국의 종족들에게 포위당하는 형세였을지도 몰라. 그랬다면 또 전쟁이 일어났겠지.”
호가 시진을 보며 기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결과적으로 수인 왕국의 십이멀 중 하나를 처리했고, 다수의 영토를 박살냈으며 호올스라는 마인족의 영지도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역시 능력이 있는 영웅을 휘하에 두면 일이 이렇게도 편했다.
“그나저나 남쪽은?”
“거기도 끝났어요. 갑자기 천족들이 물러나면서 수인 왕국의 군대도 전쟁을 지속할 힘을 잃어버렸는지 바로 병력을 후퇴시켰거든요.”
“갑자기 천족들이 물러났다?”
아마 세라핌 요새를 무너지고 자신들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걸 깨달은 순간 바로 병력을 뺀 게 틀림없었다.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 천족다운 행동이었다.
* * *
한시진의 이야기를 통해 호는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알르드에 어떤 사건들이 일어났는지를 전부 들을 수 있었다.
딱히 크게 문제될 만한 것도 그렇다고 어떤 지시를 내릴 필요도 없었다.
각 영토의 군주들은 자신들의 능력에 따라 알아서 영지를 잘 다스리고 있었고, 발전에 필요한 재화와 자원들 역시 림드 산맥의 군주 아스트리드 벨과 디아린 상단의 디아린이 조절하며 운송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호는 영지의 발전에 신경을 쓰는 것보다 영웅들의 인사 배치와 그들의 능력을 더욱 끌어올릴 수 있는 승급과 관련된 아이템을 모으는 데 관심을 가졌다.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영웅의 SSS 승급이 이뤄질 때 마다 나타나는 메시지, 일명 황금색 재능과 EX등급의 전설에 대해 관심이 잔뜩 가고 있었다.
“일단 모든 영웅이 EX등급으로 진화를 할 수 있는 것 아니야.”
그 기준이 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SSS등급의 영웅인 니나 다니엘레의 재능은 황금색이 아닌 붉은색으로 그녀의 경우 EX등급으로 진화가 불가능하다는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브로리와 이레네 아르티아의 재능은 황금색. EX등급으로 진화가 가능했다. 그리고 알르드의 천재 군사인 로우덴은 아직 메시지가 나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EX등급으로 승급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도 어떤 계기가 필요한가 보네.”
확신을 할 수는 없지만 느낌상 그랬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 SSS 의 영웅들을 EX등급으로 승급시킬지에 대해서도 어림잡아 예상이 가는 게 있었다. 바로 던전이었다.
로우덴의 SSS 승급 같은 경우 흑왕의 무덤을 공략하면서 운 좋게 획득한 이레귤러 은하수 볼을 통해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EX등급과 관련된 아이템 또한 던전에 있을 가능성이 굉장히 컸다. 그것도 SSS 급 위험한 난이도의 던전에 있는 게 틀림없었다.
“뭐, 지금 SSS등급의 던전을 공략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군사를 일으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그나이 칼츠만을 죽이고 인간들을 배신한 미피츠의 퉁 파오를 징벌하는 일이었다.
이미 이레네 아르티아가 블루 스케일로 향하는 사신단에 포함되어 떠났다. 골든 크로우의 왕 자리는 내려놓았지만 기사왕이라 불리던 그녀의 영향력과 세이라 클리퍼드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어렵지 않게 함선과 관련된 연구 기술 협약을 맺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미피츠와 거래를 하는 상단들과 그들이 취급하는 특산품 그리고 어디서 특산품을 구매하고 유통하는지에 대해 조사를 끝냈어요.”
쿵하는 소리와 함께 호가 앉아 있던 집무실의 책상이 흔들렸다.
“어? 제법 많았을 텐데 고생했어.”
“제법? 제법요? 리그너스 대륙에 상단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디아린이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호는 애써 그 시선을 외면하며 디아린이 내려놓은 보고서를 확인했다. 그리고는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회사원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저주하는 더블에이의 그것이 세 박스 분량 정도의 높이로 쌓여 있었다. 결코 혼자서는 확인할 수 없는 분량이었다.
잠시 후, 호와 디아린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은근한 눈싸움이 이어졌고, 결국 디아린이 푹하며 고개를 숙였다.
“일 끝나면…… 휴가 좀 보내주세요……. 이러다가 죽을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