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2
리그너스 대륙전기 362화
이레네 아르티아가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선언을 하고 일주일이 지났다. 그 기간 동안 골든 크로우의 귀족들은 어떻게든 기사왕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녀를 설득하려고 했다. 하지만 기사왕의 결심은 꺾이지 않았고, 모든 준비를 마친 오늘 드디어 알르드로 향하는 이동이 시작되었다.
이대로 가서는 아니 되옵니다!
골든 크로우의 수많은 백성들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레네 아르티아 폐하! 어찌하여 우리들을 버리십니까?! 폐하가 안계시면 천족들이 어떻게 나올지 걱정도 안 되십니까!
일부 귀족들이 왕궁을 떠나려는 기사왕의 앞을 가로막기는 했지만 호를 비롯한 알르드의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러나야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기사왕의 입에서는 또 한 번의 한숨이 흘러 나왔다.
“재상이나 그랜달, 치토크와 같은 용맹하고 충성스러운 기사들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앞을 막아섰을 거네.”
“그랬다면 기사왕께서도 저와 함께 알르드로 가시지 않으셨겠죠.”
“후후. 그것도 그렇겠군.”
이레네 아르티아가 특유의 알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나저나 먼 길을 가기엔 괜찮은 날씨야. 알르드는 여기보다 좀 더 따뜻한 지역이라고 들었네.”
“그렇습니다. 수풀이 울창한 곳이 많으며 수인 왕국의 영토였던 지방에는 늪지대나 정글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죠. 아, 바리안스의 대지 지방은 다릅니다. 그쪽에는 제덴 사막이 있으니까요.”
“사막이라……. 생명체가 살 수 없는 불타는 땅이라고 들었다. 마족들의 고향인 마계와 다름없는 곳이라고 하던데?”
“하하하.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사막에도 많은 생명들이 살고 있습니다.”
“멍? 날씨? 뭐가 좋다고?”
날씨와 기후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호와 이레네 아르티아를 보던 로우덴은 슬쩍 하늘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언제나 힘차게 움직이던 꼬리가 기운을 잃은 듯 축 늘어져 있었는데, 방금 전까지도 하밀레온에는 비가 내렸던 탓에 주위의 공기가 축축하게 변한 게 그 원인이었다.
그렇게 아르티아와 함께 이동을 하면서 호는 기사왕을 따르기 위해 알르드 군을 찾아온 몇몇의 인간 영웅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다들 기사왕을 따라 알르드에 투신을 하려고 찾아온 이들이었는데, 내심 그들을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기사왕의 모습에 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영웅들은 어디든 쓸데가 있었고, 알르드는 언제나 영웅 부족에 시달리는 국가였다. 그리고 개 중에는 포르테와 같은 유능한 이들도 있었다.
* * *
골든 크로우를 떠난 호와 일행들은 모에드와 블루 스케일을 지나 별 문제없이 알르드의 최북단인 쿠투스 평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호가 블루 스케일의 귀족들에게 떼인 돈 대신 받은 영토 중 하나인 쿠투스 평원은 ‘아름다운 사파이어’라는 뜻을 지닌 레진이라 불리는 도시가 주도인 넓은 평야지대였다. 하지만 천족과 블루 스케일의 전쟁 그리고 귀족들과 알르드 군의 전쟁으로 인해 엄청난 인명 및 재산 피해를 입은 지역이기도 했다.
그러나 알르드의 인간 영웅 중 최고참이자 S등급의 영웅인 메크링거가 쿠투스 평원의 군주로 임명이 되고, 유능한 내정형 영웅들이 적재적소에 배치가 되면서 쿠투스 평원은 빠르게 전쟁의 상처를 회복해 나갈 수 있었다. 거기에 중앙 정부의 대대적인 투자가 이뤄지면서 최근 엄청난 발전을 이루는 곳이기도 했다.
당연히 그런 지시를 내린 알르드의 군주인 호에 대한 영지민들의 신임과 지지도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정도로 쿠투스 평원의 수많은 주점에서는 블루 스케일의 영향에서 벗어나 알르드의 백성이 된 것에 대해 신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올리는 이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호님께서 돌아오신다!”
그리고 레진의 성벽 위에서 마장기를 발견한 병사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이미 연락을 받은 메크링거가 서둘러 영주성에서 나와 호에게 예의를 표하며 일행들을 반겼다. 레진의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색색의 종이가 꽃가루처럼 하늘에서 흩뿌려졌고, 많은 수의 주민들이 알르드의 국기를 흔들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더군다나 호의 마장기 ‘라이온레인–플레임’은 라이온레인 특유의 거대한 덩치와 새빨간 붉은색 도장 위에 그려진 노란색의 화려한 문장으로 쉽게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마장기이기도 했다.
“엄청난 환영 인파로군.”
호가 손을 흔들 때 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오는 것을 보던 이레네 아르티아가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골목골목마다 인파가 가득한 것이 레진에 살고 있는 사람들 전부가 여기에 모인 게 아닐까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쿠투스 평원이면 블루 스케일의 영토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알르드 아니, 우리나라의 국기가 걸려 있는 겁니까?”
“뭐, 일련의 사정이 있기는 하지. 몇 년 전, 알르드가 빌려준 돈을 떼어먹은 블루 스케일의 귀족들이 배상금을 갚지 못해 영지를 내놓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바로 쿠투스 평원이다.”
“허! 돈을 갚지 못해 영지를 내놓다니……. 멍청하다 못해 한심한 녀석들이로군요.”
아르티아의 대답을 들은 포르테는 얼굴 가득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블루 스케일의 귀족만큼 인간들의 수호자나 다름없던 기사왕을 쫓아낸 골든 크로우의 귀족도 만만치 않게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포르테는 그러한 자신의 생각을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 레진이라는 곳은 상당히 발전된 곳으로 보입니다. 하밀레온과 비슷한 대도시 수준의 규모로 보이는데요?”
“적들의 침입을 대비한 방어 시설 면에서는 하밀레온보다 낫군.”
기사왕의 눈이 레진의 성벽으로 향했다. 높디높은 레진의 성벽에는 마장기의 포격을 막아낼 수 있는 값비싼 마법 방어진과 적들의 접근을 차단하는 무시무시한 방어 시설들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성의 중앙에 세워진 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동포 이제르론. 리그너스 대륙에 존재한다는 최강의 방어 시설 중 하나가 레진에 건설되어 있었다.
“히, 히익?!”
골든 크로우에서 군사 관련 부분을 맡았던 한 영웅이 이제르론을 보며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었다. 리그너스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방어시설 중 하나답게 이제르론의 건설에 필요한 비용과 자원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골든 크로우에서 가장 부유하다고 알려진 영지의 반년치 수입을 쏟아 부어야지만 건설이 가능했다.
하지만 레진을 지나 알르드의 다른 영지를 방문하면서도 각 도시마다 이제르론이 건설되어 있는 것을 확인한 골든 크로우의 망명 영웅들은 놀라다 못해 허탈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그리고 인구수가 천만이 넘어 에큐메노폴리스라는 SSS등급의 도시이자 알르드의 가장 큰 도시인 디르시나에 도착한 순간 골든 크로우의 영웅들은 물론이고 이제르론을 보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기사왕 이레네 아르티아도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절로 입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미 알르드를 한 번 방문한 경험이 있기는 했지만, 그때는 급한 사정으로 인한 마장기의 거래 때문에 거의 스쳐 지나간 수준의 방문에 불과한 터라 디르시나의 위용을 제대로 감상할 여유가 없었었다.
“이런 거대한 도시가 대륙에 존재할 줄이야……. 정말 우물 안 개구리가 따로 없었군. 알르드에 대한 믿기 힘든 소문은 여러 번 들었지만, 이 도시를 보면 그 이야기들이 헛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겠다.”
“여기가 A등급 마장기 라이온레인을 제작하는 공장입니까? 어마어마하게 크군요.”
“초대형 시장이 이렇게나 많다니! 한 때 상인으로 일했던 제 경험으로 말미암아 감히 단언하자면 미피츠는 알르드 아니 이 도시의 시장만 놓고 봐도 상업 왕국이라는 명성을 알아서 가져다 바쳐야 할 겁니다. 케리아 시장은 비교도 안 될 정도입니다!”
기사왕을 비롯해 디르시나를 처음 방문한 인간 영웅들의 과한 찬사에 호는 절로 낯이 뜨거워졌지만 내색하지 않으며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익숙해야 할 모습들이었다.
하기야 골든 크로우는 군사력만 대단했지 국가의 생산력과 관련된 상업 면에서는 대륙 전체를 놓고 봤을 때 평범하다 못해 낮은 편에 속하는 나라였다.
애당초 인간들의 수호자로 칠왕국의 지원을 받으며 다른 종족과 싸움을 벌이며 비정상적으로 성장한 결과였다.
그리고 디르시나의 집무실에서 호는 의외의 인물을 마주할 수 있었다.
* * *
“오빠!”
“하, 한시진? 네가 어떻게 여기……. 아니, 다친 곳은 없어?”
림드 산맥의 군주 아스트리드 벨의 옆에서 자신에게 손을 흔드는 시진의 모습에 수인 왕국과의 전쟁이 생각나 그에 대해 입을 열려던 호는 순간 악귀처럼 변하는 한시진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말을 돌려야만 했다.
“전쟁의 결과가 아니라 오빠의 연인인 저부터 걱정을 해주셔야죠. 저 안 보고 싶었어요?”
“생각은 매일 했지.”
“헤헤. 거짓말인건 아는데 듣기는 좋네요. 어쨌든 전쟁은 끝났어요. 그리고 오빠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점령지에 대한 굵직굵직한 사안만 마무리를 한 뒤에 나머지는 웃소에게 맡기고 급하게 올라온 거예요.”
“여기에 있는 것을 보니 승리했나보네.”
“당연하죠. 용맹한 무장과 훈련이 잘 된 정병들과 함께 하는데 수인 왕국 따위에게 질 리가 없잖아요?”
시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옆에서 벨이 하물며 화랑기사인데 라고 중얼거리는 말이 조그맣게 들려왔다.
“그나저나 점령지라니?”
“오빠가 떠나고 난 뒤에, 마인족의 영토를 공격해서 호올스를 손에 넣었어요.”
“응?”
호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하지만 한시진의 이야기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마인족은 수인 왕국의 주류 세력 중 하나로 부족원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지만 기병대를 자랑으로 하는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부족이었다.
하지만 알르드와의 전쟁에서 마인족의 십이멀 서러브레드가 자리를 비운 사이 보니타의 멍청한 행동이 이어졌고, 그 틈을 노린 한시진의 공격에 결국 마인들의 보금자리이자 주도인 프리지안이 함락된 것이다.
그렇게 그 근방에서 가장 세력을 자랑하는 마인족이 무너지자 수인 왕국의 수도 사파리로 가는 길이 환하게 열려버렸고, 알르드의 파죽지세와도 같은 진격이 시작된 것이다.
심지어 한시진은 사파리로 진격하는 와중에 호올스에서 도망을 치던 보니타의 군대와 만나 그의 목을 베어버리기까지 했다고 했다.
“잠깐, 그런데도 아쉬토가 가만히 있었다고?”
그리고 한시진의 이야기를 듣던 호가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아쉬토라면 그런 상황에서 결코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흉폭하고 잔인하며 리그너스 대륙의 모든 영웅 중 가장 폭력적으로 설정된 호랑이가 바로 그였다.
그때, 호의 의문을 해결해 줄 대답이 뒤에서 흘러 나왔다.
“수인들의 왕은 몸소 전장에 나설 상태가 아닌 거다.”
“네? 이레네 아르티아님. 그게 무슨?”
“뭐, 그때 쉐르난비체와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아예 모르지는 않을 테니……. 말을 꺼내도 상관없겠지.”
호의 물음에 아르티아는 대답대신 무언가를 고민하는 표정으로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결정했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루베릭 대륙이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겠지?”
기사왕의 말에 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 나왔다.
하이 엘프 에어리스를 통해서도 시스템 메시지 때문에라도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게다가 EX라는 충격적인 병과와 관련이 된 이름이기도 했다.
“아쉬토는 루베릭 대륙의 파신이라는 존재에 의해 큰 부상을 당했다. 그의 전용기 킹 타이거가 완전히 박살이 날 정도의 부상이었지.”
“아!”
호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알르드를 대표하는 상단의 주인인 디아린을 통해 그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분명 리그너스 대륙의 최남단에 위치한 영토 켐벨에서 루베릭 대륙으로 연결되는 차원관문을 건설하던 파신과 그의 분신인 킬리만자로와 칠제가 맞붙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레네 아르티아는 그때의 전투를 직접 경험한 영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