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8
리그너스 대륙전기 358화
골든 크로우의 새로운 수도는 하밀레온으로 선정되었다.
알트라가 천족들에게 점령당한 상황이기에 어쩔 수 없이 내려진 결정이었지만, 기존부터 골든 크로우의 제2의 수도라 불리던 대영지인 데다가 주변에 곡창지대 넓게 펼쳐져 있어 수도로서의 입지 자체는 나쁘지 않은 괜찮은 결정이었다.
그러나 골든 크로우의 많은 귀족들은 그런 기사왕의 명령에 반발을 하고 나섰다.
“수도를 포기하겠다는 이야기입니까?!”
“알트라의 수많은 백성들이 우리의 도움을 바라고 있습니다, 폐하!”
“하밀레온의 근처에는 적성국가인 아이리스 성국이 있습니다. 백성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는 수도의 위치는 안전한 곳으로 삼아야 합니다!”
목에 핏대를 높이며 반대를 표하는 귀족들은 대부분이 알트라에 지지기반이 있는 고위 귀족들이었다. 거기에 하밀레온을 주름잡고 있던 기존의 토착 귀족들도 함께하고 있었다.
더욱이 그들의 뜻을 따르는 하위귀족들까지 나서서 설치기 시작하면서 이레네 아르티아는 국정을 제대로 운영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뜻에 반하는 귀족들을 모조리 처단할 수도 없었다.
그녀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기사단들은 천족과의 전쟁에서 대부분 목숨을 잃었고, 황금기사단 역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반에 전쟁통에서도 열심히 빼돌린 재물로 군사들을 끌어들인 귀족들의 세력은 왕실의 병력을 월등히 능가하고 있었다.
“오늘도 자재가 도착하지 않았다면서?”
“폐하의 명령인데도 불구하고 크루통 남작의 상단이 자재 수송을 거부했다더군. 정신이 나갔어.”
“기사왕께서 가만히 있지 않으실 텐데……. 다시 또 큰 싸움이 나는 거 아니야?”
왕궁에서 시작되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영지민들의 얼굴에는 불안감이 맴돌기 시작했고, 사소한 이유로 싸움을 벌이는 일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치안도가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현상이었다. 하지만 하밀레온에는 그런 치안을 바로잡아야 할 인재도 병사도 없었다.
경제 사정도 좋지 않았다. 천족들의 공격으로 인해 기반시설이 모조리 무너진 터라 리스와 식량의 상황은 최악을 가리키고 있었고, 수도를 옮기겠다는 명령에 반발하는 귀족들로 인해 회의실에서는 연신 고성이 터져 나올 뿐 생산적인 회의는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는 터라 왕실의 자금만으로는 하밀레온의 복구공사를 진행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귀족들이 직접 나서지도 않을 테니……”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는 말이로군.”
이레네 아르티아의 말에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하고 앉아 먼저 이야기를 꺼냈던 그나이 칼츠만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재상의 그런 모습을 보며 이레네 아르티아가 답답하다는 듯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우리를 도와줄 이가 있을까?”
“먼저 칠 왕국에게 지원을 요청해 볼 생각입니다.”
“칠 왕국?”
그나이 칼츠만의 말에 아르티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연……. 하지만 그들이 우리를 도와줄까? 칠 왕국의 결속은 빛이 바랜지 오래다. 바라테이온의 빅터는 우리가 이런 꼴이 된 것을 즐기고 있을 테고, 모에드와 세이라는 여력이 없을 테지. 키리네 공국 또한 우리와 비슷한 상황이라고 들었다.”
윤호였다면 엘프나 드워프와 같은 다른 종족에게도 도움을 요청하는 선택지도 생각했을 테지만 기사왕의 머릿속에는 다른 종족의 이름 따위는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그나이 칼츠만도 마찬가지였다.
알르드 역시 하나의 선택지였다. 하지만 골든 크로우는 현재 알르드에게 너무나도 많은 것을 의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상업 왕국 미피츠가 있습니다.”
“최악의 선택이로군. 미피츠의 그 놈은 믿을 수 없는 녀석이다.”
상업 왕국을 지배하고 있는 퉁 파오를 떠올리며 이레네 아르티아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 탐욕스러운 괴물은 자신의 이익에 따라 박쥐처럼 행동과 태도를 바꾸는 녀석이었다. 게다가 이번 전쟁에서 골든 크로우는 미피츠에게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기까지 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도움을 요청할 겁니다. 칠 왕국의 결속을 깬 대가로 말이죠.”
“그것도 우리가 힘이 있을 때나 가능한 협박이지. 퉁 파오라면 누구보다도 우리의 사정을 잘 알고 있을 거다.”
“분명 그럴 겁니다. 미피츠의 돈은 대륙의 어디에나 있으니까요.”
자신의 말에 순순히 동의를 하는 그나이 칼츠만의 행동에 아르티아의 눈이 몇 번 깜빡였다. 그리고 한동안 뭔가를 생각하던 그녀는 자신의 에메랄드빛 머리카락은 몇 번 매만지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호가호위를 할 셈이로군. 알르드에게 도움을 요청할 건가?”
“그렇습니다.”
현재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지푸라기에라도 손을 뻗어야 할 참이었다. 하물며 골든 크로우에는 알르드 왕과 그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천족이 자랑하는 십 천사 중 하나인 레모스와 백 만의 대군을 단숨에 증발시켜버린 강력한 군대였다.
미피츠의 금력이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알르드의 군사력은 그런 미피츠의 금력을 가볍게 짓누를 수 있었다. 하물며 알르드는 미피츠 만큼이나 부유한 나라였다.
“하지만 알르드의 윤호가 순순히 우리의 뜻대로 움직여 줄까?”
“이미 확답을 들었습니다. 가벼운 군사 행동이라면 충분히 연기를 해주겠다고 하더군요.”
“……쓸모없는 귀족들보다는 훨씬 낫군. 하지만 우리가 그들에게 진 빚이 많다는 것을 잊어서는 곤란해.”
말은 가벼운 행동이라지만 수십만에 달하는 병사들을 움직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사왕이라 명성을 떨치며 전장에서 반평생을 보냈던 그녀인터라 더욱 더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무리겠지만 호가 알르드로 귀환하기 전에 그와 알르드의 제장들을 초대해 연회를 열어야겠다. 가능하겠지? 그나이 칼츠만.”
“가능하게 만들겠습니다.”
자신들을 도와준 이들을 위해 성대한 연회도 벌일 수 없을 정도로 골든 크로우의 재정 상황은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나이 칼츠만의 입에서 나온 긍정적인 대답에 이레네 아르티아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렇다면 지금의 일을 끝내고 미피츠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최근 미피츠의 움직임이 이상하다고 들었다. 호위병을 많이 데리고 가는 게 좋을 것 같군.”
“알겠습니다. 하지만 별 일이야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 노구도 검은 어느 정도 휘두를 줄 압니다. 하하.”
“그대의 검술 실력은 나도 잘 알고 있지만……. 그리 자신을 표할 정도로 뛰어나지는 않지 않나? 어쨌든 퉁 파오는 교활하고 믿을 수 없는 작자다. 몸조심하도록.”
기사왕의 걱정 어린 말에 그나이 칼츠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며칠 후, 그를 포함한 백여 명으로 이루어진 사절단이 미피츠로 향했다.
* * *
상업 왕국이라는 명성답게 미피츠는 지리적인 장점을 이용한 해상무역과 엘프와 드워프, 수인, 천족의 상단들을 상대로 중개업을 하며 엄청난 부를 벌어들이고 있었다. 미피츠에서 가장 규모가 큰 케리아 시장에서는 대륙의 모든 특산품을 구할 수 있었으며, 플락티라 불리는 경매소에서는 돈만 있다면 그 어떤 것이라도 구매할 수 있었다.
그런 미피츠의 총독은 파오 상단의 주인인 퉁 파오. 그의 저택에는 대륙의 희귀한 금은보화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수백 척에 달하는 상단의 배에도 각종 물자와 식량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퉁 파오는 최근 여러 전쟁으로 인해 돈이 필요한 인간들의 왕국 및 귀족들을 상대로 막대한 차관을 빌려주어 조금씩 자신의 영향력을 높여가고 있었다. 이미 모에드 왕국인 미피츠의 경제적인 속국이나 다름없는 상태였고, 바라테이온 역시 지금의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미피츠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어마어마하군요.”
“대륙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라는 소문은 들었습니다만……. 하밀레온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모습입니다.”
미피츠에 도착한 골든 크로우의 사절단은 미피츠의 화려한 경관에 잠시 넋을 놓아야만 했다. 그나마 침착한 이라고는 여러 번 미피츠를 방문한 경험이 있는 그나이 칼츠만 뿐이었다.
‘폐하의 말마따나 칠왕국의 결속은 완벽하게 깨져버렸군. 이 정도의 성세를 자랑하고 있으면서도 골든 크로우의 위기를 그냥 지켜보았단 말인가? 퉁 파오?’
현재 이레네 아르티아의 상황은 최악이나 다름없었다. 그녀의 권위를 유지시켜주던 강력한 군대는 천족과의 전쟁에서 전멸했고, 계속된 전쟁으로 인해 왕실의 국고는 텅텅 비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귀족들은 왕실에 충성을 하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자신들끼리 파벌을 만들어 세력 다툼에 열중하고 있었다.
덕분에 피해를 보는 이들은 아무 죄도 없는 일반 백성들뿐이었다. 아무리 이레네 아르티아 개인의 무용이 출중하다 쓸 수 있는 돈이 하나도 없는 이상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그나이 칼츠만? 그 늙은이가 함께하고 있다고?”
골든 크로우의 사절단이 도착했다는 보고에 퉁 파오는 곧바로 사절단을 만나기로 했다. 골든 크로우의 부리와 발톱이 모두 잘린 상황이라지만 사절단에 포함된 명재상 그나이 칼츠만이라는 이름은 퉁 파오도 관심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이거 마침 잘됐군.”
게다가 인간들의 명재상 그나이 칼츠만이라면 최근 자신과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는 한 세력에게 좋은 선물이 될 게 분명했다. 그렇게 퉁 파오와 그나이 칼츠만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돈이 필요하다고?”
번쩍이는 황금과 보석으로 치장된 대전에서 툭 튀어나온 퉁 파오의 말에 골든 크로우쪽 인물들이 몸을 흠칫했다. 한 나라의 사절단 그것도 골든 크로우의 재상 그나이 칼츠만을 앞에 두고 한 말이라기엔 너무나도 건방진 어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나이 칼츠만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퉁 파오의 오만함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 그런 도발에 넘어갈 정도로 나이는 헛으로 먹은 게 아니었다. 오랜 시간동안 골든 크로우의 재상을 역임하면서 이보다 더한 꼴도 봤었다.
“그렇소. 천족과의 전쟁에서 파괴된 하밀레온과 그 주변 영지를 복구하는 데 필요한 자금으로 당장 100억 리스 정도가 필요하오.”
“100억 리스? 그 정도면 10년 만기로 계산했을 때 한 달에 이자만 4억 정도가 될 거 같은데……. 골든 크로우가 그 정도의 돈을 갚을 수 있을까?”
“4억?”
그나이 칼츠만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만큼 퉁 파오의 입에서 나온 숫자는 현실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죽음의 상인이라 불리는 라홀로프 상단도 그 정도의 이율은 부과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소.”
“그러니까 라홀로프 상단이 나의 파오 상단보다 규모가 작은 거 아니겠나? 게다가 100억 리스야. B등급 마장기 열 기를 구입하고 운용할 수 있는 돈이라고.”
“우리 골든 크로우가 B등급 마장기 열 기보다 못하다는 이야기인가?”
“설마? 하지만 지금의 골든 크로우가 난처한 상황이라는 것은 아주 잘 알고 있지.”
퉁 파오의 말은 협박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런 퉁 파오의 태도에 그나이 칼츠만은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적대 세력의 사절을 앞에 둔 모습이 이러할까? 퉁 파오가 아무리 오만하고 건방진 인물이라 해도 지금 그가 보여주는 모습은 분명히 이상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퉁 파오.’
그나이 칼츠만이 입을 다물며 장내에 긴장이 찾아들었다. 양 측의 인물들이 서로를 응시하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짧은 침묵의 시간이 지나고 그나이 칼츠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의 목에 알아서 목줄을 채우는 멍청한 짓은 할 필요가 없지.”
당장 돈이 급한 상황이기는 했다. 하지만 미피츠에게 돈을 빌렸다가는 나라의 경제가 완전히 무너질 거라곤 불을 보듯 뻔했다. 알르드의 움직임을 곁들어 협박을 해볼까도 생각했지만, 왠지 주위의 공기가 심상치 않았다. 당장이라도 이곳을 벗어나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퉁 파오가 자신의 두툼한 입 꼬리를 슬쩍 말아 올렸다.
“이거 먼 길을 찾아온 보람이 없겠어. 정말 안타까운 일이야.”
“골든 크로우는 결코 이번의 일은 잊지 않겠다, 퉁 파오.”
“뭐, 마음대로 해.”
어깨를 으쓱이는 퉁 파오의 행동에 이제껏 잠잠했던 그나이 칼츠만의 얼굴이 기어코 일그러졌다. 분노로 인해 주먹에 힘이 꽉 들어갔지만 지금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나이 칼츠만이 홱 하고 뒤로 몸을 돌릴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