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7
리그너스 대륙전기 357화
“퇴각?! 하밀레온의 성벽을 코앞에 두고 천족들이 물러나고 있다고?”
“멍멍. 라이프린의 눈에서 피눈물이 쏟아지고 있겠군요.”
“이번에야 말로 인간 종족의 세력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까요. 솔직히 기사왕이 이렇게까지 밀릴 거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거예요. 정말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어요.”
“멍! 하지만 이제부터는 다른 종족의 지도자들도 천족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할 겁니다.”
레이자와 로우덴의 말을 들으며 호는 엘프와 정령들의 지도자를 떠올렸다.
모르긴 해도 그 둘은 현재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천족이 인간들의 세력을 흡수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모르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심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다른 종족의 소환자들까지는 파악할 수 없었지만 천족의 소환자는 확실하게 오너 시스템을 사용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천족의 여왕 라이프린은 그 오너 시스템을 이용해 이 대륙을 손에 넣으려고 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처럼 말이다.
‘이제부터는 천족이 아닌 인간과 천족의 연합 세력이 대륙을 짓밟으려고 들 거다.’
이번 전쟁에서 천족들에게 포로로 잡힌 인간 영웅이 없을 리 없었다. 그리고 천족의 소환자는 오너 시스템을 이용해 그들의 강제적인 충성을 받아냈을 터였다. 그에 대한 대비는 지금부터 해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적이 되면 가장 피곤한 영웅 중 하나인 대륙의 칠제, 기사왕 이레네 아르티아가 무사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큰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골든 크로우 또한 멸망의 기로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인간들이 예전의 칠왕국과 같은 결속력으로 한 데 뭉치는 것을 보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멍멍.”
로우덴이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리고 그 사실은 호도 인정하는 바였다. 이번 전쟁에서 골든 크로우가 입은 피해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했다. 수도 알트라가 점령되었고, 국가의 기반시설들이 모조리 무너져 버렸다. 게다가 북부와 서부를 아우르는 영토가 천족의 손아귀에 넘어가 버렸다. 그 넓이가 무려 국토의 삼분지 일이나 되는 크기였다.
인간들을 한 데 모았던 강력한 군사력 또한 복구가 힘들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사라진 기사단만 수십 개에 온전하게 남아있는 마장기도 몇 대 없을 게 분명했다.
더욱 큰 문제는 골든 크로우가 이런 피해를 입으면서까지 천족들과 전쟁을 치를 동안 칠 왕국 중 모에드와 키리네 공국, 블루 스케일만이 지원군을 보냈을 뿐 나머지 세 개 국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앞으로 서로의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는 바보도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큰일이네요. 가뜩이나 다른 종족들에 비해 세력이 약한 인간들인데……. 각자의 왕국이 서로의 살 길만을 도모하게 된다면 결국 다른 세력들에게 무너지는 결과만을 가져올 거예요.”
레이자가 한숨을 내쉬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멍멍. 그렇다고 인간들의 왕과 귀족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내놓으려고 하겠습니까? 이 상황을 잘만 이용하면 골든 크로우의 자리를 자신의 왕국이 차지할 수 있을 거라는 멍청한 기대감에 한껏 휩싸여 있을 겁니다. 멍!”
“분명 다른 세력과 손을 잡는 이들도 생겨나겠지?”
“멍. 틀림없을 겁니다.”
이제부터는 알르드 북부의 인간 왕국들 또한 경계를 해야만 했다. 그나마 블루 스케일과의 동맹 관계가 확고한 편이라는 게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기는 했지만, 꺼림칙한 것이 아예 없는 것은 또 아니었다. 더욱이 알르드 북부의 영토는 원래 블루 스케일의 영지였던 땅이었다.
“쿠투스 평원과 바르시온을 비롯한 북부의 영지에 방어 시설 및 병력을 양성하라는 명령을 내려야겠어.”
“지금도 충분한 수준이기는 합니다만 미리 대비를 해서 나쁠 것은 없죠. 멍.”
어차피 방어 시설의 건설과 유지에 필요한 리스는 풍족한 상황이었다. 팀 심시티가 만들어 놓은 경제 특화 도시는 알르드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힘의 원동력이었다.
“병력의 전환 또한 빠르게 해야겠어.”
실버 문과 브뤼헤아 비쉬로 구성된 지금의 전력도 충분히 강력한 조합이었다. 하지만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등장하는 최강의 병종은 다름 아닌 용족의 병사들. 지금은 비록 E 랭크 비행병인 와이버니안 밖에 양성할 수가 없지만 많은 리스와 시간을 투자한다면 용족의 SSS랭크 병력으로 군대를 구성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드래곤 라이더를 비롯한 용족의 병사들이라면…….’
라헬과 오호 신장이 포함된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최종 적들 역시 가뿐하게 상대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알르드로 바로 돌아가기엔 상황이 영 좋지 않지?”
“아무래도 바로 병력을 뺐다가는 천족들이 다시 하밀레온을 공략하려고 달려들 겁니다. 보나마나죠. 멍멍.”
현재 천족들의 후퇴가 계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밀레온에 있는 골든 크로우의 병력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호전적인 기사왕의 성격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 그만큼 골든 크로우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거 까닥하다간 제대로 병력이 묶이겠는데…….”
“멍. 하지만 기사왕에게 마음의 빚을 지어놓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가만히 있는 거 아니겠어?”
당연하다는 듯 호가 말했다. 확실히 그게 아니고서야 굳이 물자를 낭비하면서까지 골든 크로우를 지켜줄 이유가 없었다.
이렇게 점점 신뢰를 쌓고 친하게 지내다 보면 리그너스 대륙을 통일하는 데 기사왕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 * *
하밀레온의 포위를 풀고 물러난 천족의 군대는 블루 스케일의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테라 강 동쪽에 진을 치고는 거대한 공사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세라핌과 같은 난공불락의 요새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러한 천족의 행동은 이번 전쟁에서 손에 넣은 골든 크로우의 영토를 완벽하게 지배하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전쟁의 승자로서의 당연한 권리이기도 했다. 그리고 엑소더스가 시작되었다.
자신들의 끔찍한 미래를 직감한 사람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영지에서 빠져나와 맨 몸으로 테라 강을 건너기 시작했고, 천족의 경비대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 문제는 그 영향권에 골든 크로우의 수도 알트라도 끼어 있다는 점이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군사를 일으켜야 합니다!”
“알트라의 수많은 백성들이 고통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가족들이 아직 알트라에 남아 있습니다, 폐하!”
“으음…….”
자신을 따르는 귀족들의 요구에 이레네 아르티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제껏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압박감이 거대하게 그녀의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요구대로 군사를 일으킬 수는 없었다. 아니, 일으킬 군사도 없었다.
“불가. 지금 당장 군사를 일으킬 만한 여력이 되지 않는다는 건 나보다도 경들이 더욱 잘 알 텐데?”
그 말에 귀족들이 잠시 주저하는가 싶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대화를 들은 기사왕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알르드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폐하.”
“세라핌을 무너뜨렸던 그들의 힘을 빌릴 수만 있다면 우리의 땅을 차지한 천족들을 물리치고 알트라 또한 되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의 마장기를 빌려서 군대를 편성해야 합니다.”
“하! 어떤 수로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이냐?”
확실히 알르드가 도와준다면 어떠한 방도가 생겨날 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레네 아르티아의 말투는 냉소적이었다. 현재 알르드의 군대는 테라 강 인근에 주둔을 하고 있었는데, 군사력이 무너진 골든 크로우를 대신해 천족들을 방어해주고 있었다.
“리스? 식량? 마장기? 알르드의 도움을 요청하는데 우리가 무엇을 지불할 수 있다는 거지? 하밀레온을 복구하는데 들어가는 왕실자금이라도 내놓아야 하는가?”
기사왕의 물음에 모두들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귀족들의 태도를 보며 이레네 아르티아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구역질이 흘러 나왔다.
눈앞의 귀족들이 속한 가문이 왕실보다도 많은 비상금으로 호의호식 하고 있다는 정보를 이미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우리는 과거 알르드에서 구매한 라이온레인의 대금조차 제대로 갚지 못했다. 나라가 안정될 때까지 그것의 지불을 유예해 준 것만도 고마워해야 하는 상황 같다만?”
“하지만 알르드는 소환자의 국가입니다. 정통성을 위해서는 우리 골든 크로우의 인정이…….”
“최근에 들은 헛소리 중 가장 어이가 없는 소리로군. 그 소환자인 윤호의 앞에서 그 말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 있다면 내가 직접 알르드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고려해 보겠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잠시 후, 귀족들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러나자 이레네 아르티아는 한숨과 함께 자신의 이마를 감싸 쥐었다.
“왕의 자리가 이토록 힘겹게 느껴진 적이 없건만. 이 몸의 능력이 부족해서 왕국을 위기에 빠뜨렸다.”
“그렇지 않사옵니다, 폐하. 폐하께서는 최선을 다해서 이 나라를 수많은 백성들을 지켜내셨습니다.”
옆에서 왕국의 재상 그나이 칼츠만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의자에 몸을 깊숙하게 묻은 기사왕의 감긴 눈은 떠지지 않았다.
“잠시 쉬고 싶다.”
“알겠습니다, 폐하.”
충성스러운 재상까지 자리를 비우자 이레네 아르티아는 그제야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러고는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임시로 만들어진 하밀레온의 대전은 수도 알트라와는 확연하게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알트라의 대전이 따뜻하고 용맹한 느낌이었다면, 이곳은 너무나도 차갑고 무거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천족들을 몰아내고, 알트라를 수복하고, 골든 크로우의 명성을 되찾으면 조금은 달라질까?”
하지만 아르티아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싸우고, 승리를 거두고, 인간들을 지키는 것으로 세상을 살아왔던 그녀였다. 그러나 그 대가는 지금처럼 차갑고 무거웠으며 처참했다.
골든 크로우가 지켜주었던 인간들의 왕국은 골든 크로우의 위기에 보답하지 않았다.
그녀를 따르는 충성스러운 영웅들은 불리한 전장 속에서 맹렬히 싸우다 목숨을 잃었고, 자신들의 재산만을 챙겨 이리저리 도망만 다니던 기회주의자들은 살아남았다.
“론, 쉐스, 딕스, 그랜달, 치토크…….”
그리고 그녀를 따르다 죽음을 맞이했던 영웅들의 부재는 계속해서 아르티아의 마음에 상처를 안겨다주고 있었다. 자신의 체형에 딱 맞춰진 왕의 옥좌가 오늘따라 너무나도 불편했다.
“윤호.”
그리고 어째서일까? 알르드의 왕이자 1회차 소환자인 그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이레네 아르티아의 머릿속으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