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4
리그너스 대륙전기 354화
저장고의 위치를 파악하고 아군의 진영으로 돌아온 호는 곧바로 로우덴을 포함해 마장기의 편대장 이상급 지휘관들을 소집했다.
앞으로 있을 세부적인 전투계획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새삼 전투의 목표에 대해 궁금해하는 영웅들은 아무도 없었다. 본대가 세라핌 요새를 상대로 시선을 끌 동안 별동대가 지하 동굴로 침입, 파편의 저장고를 폭발시킨다는 골조는 다들 아는 내용이었다.
“불안정한 파편의 저장고를 안전하게 폭발시키려면 아무래도 마력 폭탄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마장기사 필요해요.”
레이자가 말했다.
마력 폭탄은 먼 거리에서도 공격이 가능한데다가 적들의 움직임을 피해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무기였다.
게다가 마력 폭탄의 파괴력은 나름 튼튼하게 지어놨다는 불안정한 파편의 저장고 따위는 간단하게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다만, 땅굴의 좁은 공간에서 적들의 공격을 피해 마력 폭탄을 날려 보내야했기에 마장기 조종술은 물론 마력의 운용이 뛰어난 에이스급 마장기사가 있어야했다.
“그 정도야 드릴로 뚫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호의 우측에 자리하고 있던 한 남성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드릴 루드비히라는 자신의 마장기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인간 영웅 케반스였다. 그리고 레이자가 한숨을 푹하고 내쉬며 말했다.
“뚫을 수야 있겠죠. 하지만 그 다음은요? 드릴 루드비히가 이후에 일어날 엄청난 폭발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거야 당연히 도망을 치면…….”
“멍멍. 그 느린 발로는 불가능합니다. 드릴 루드비히는 아군의 마장기 중 가장 속도가 느린 편에 속하지 않습니까?”
“그, 그런…….”
레이자와 로우덴의 못마땅한 시선을 받으며 나름 호기롭게 말을 꺼냈던 케반스가 깨갱하며 고개를 숙였다. 작은 덩치를 한 견인족과 조그마한 여인의 콤보에 의해 근육질의 덩치가 쪼그라드는 상황이 펼쳐지자 회의실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호가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흠. 땅굴의 조그마한 공간을 생각해도 드릴 루드비히의 거대한 덩치가 활약하기는 힘들 것 같군. 아무래도 드릴 루드비히는 단단한 장갑과 드릴의 파괴력을 이용해 요새의 성벽을 뚫는 게 훨씬 멋진 활약을 펼칠 수 있을 것 같아.”
“아, 알겠습니다.”
“그러면 로우덴. 어떻게 전장을 설정할 거지?”
호의 물음에 로우덴이 손에 들고 있던 막대기로 주변의 지리가 그려진 지도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세라핌 요새의 성벽과 방어시설은 상당히 견고합니다. 멍. 정면으로 부딪치게 된다면 분명 아군도 큰 피해를 입겠죠. 하지만 요새의 크기를 생각해봤을 때 성벽의 전부에 방어시설을 건설했을 것 같지는 않아 정찰 부대를 보내봤습니다. 멍멍. 그리고 요새의 북서쪽에 방어시설이 없는 성벽을 찾아냈습니다.”
“함정일 가능성은?”
“멍멍. 없습니다.”
불세출의 천재 군사가 말하는 강한 확신에 호의 고개도 시원하게 끄덕여졌다.
“좋아. 저장고를 공격하는 별동대에는 내가 직접 가겠어. 레이자를 포함한 라이온레인 편대가 나를 지원한다.”
“멍멍?!”
요새의 침투는 물론이고 까닥하다가는 지하 통로에 갇힐지도 모르는 위험한 임무에 직접 지원을 하는 호의 결정에 로우덴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질책을 하듯 매서운 눈동자로 주위에 앉은 영웅들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군의 마장기사들 중 마력 폭탄을 가장 잘 활용하는 마장기사는 다름 아닌 호였다.
그리고 그 때였다.
“호님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불안정한 파편의 저장고는 제가 파괴하겠습니다. 꼬끼오.”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조인족 하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페렛 습지대의 군주이자 수인족의 전설적인 마장기 피닉스의 오너인 팔쿤이었다. 그리고 팔쿤의 피닉스는 치르넬이라는 무기로 목표를 저격할 수 있었다.
게다가 치르넬은 마력 폭탄보다도 사정거리가 길기까지 했다. 장갑이 취약해 적들의 요격에 파괴되는 게 단점이기는 하지만 지하 통로를 지키는 수비대만 물리치면 어렵지 않게 저장고를 파괴할 수 있었다.
“머엉! 팔쿤님이 계셨군!”
팔쿤의 등장에 로우덴이 해맑은 얼굴로 외쳤다. 그리고는 호를 향해 은근한 미소를 보였다.
“어쩔 수 없겠군. 세라핌을 무너뜨리는 건 팔쿤에게 맡기는 수밖에.”
그런 로우덴의 귀여운 모습에 피식 웃은 호가 선선히 머리를 끄덕거렸다. 팔쿤이라면 충분히 적들의 수비대를 제압하고 불안정한 파편의 저장고를 폭발시킬 수 있을 터였다.
* * *
골든 크로우의 도르스판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알르드의 군대는 약 삼십만의 병력과 백 여기가 조금 안 되는 마장기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천족과 인간이라는 대륙을 지배하는 일곱 종족의 전쟁에 끼어든 병력치고는 적어보이는 숫자였지만, 삼십만의 병력 대부분이 SSS 랭크 그리고 마장기 전력의 다수가 A등급 마장기인 것을 감안하면 그들이 지닌 화력과 전투력은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그렇기에 여왕 라이프린에게 본대가 하밀레온을 점령하기 전까지 알르드의 발을 묶으라는 명령을 받았던 레모스는 교전 시 적의 약점을 꿰뚫는 날카로운 전술적 움직임으로 질풍이라는 위명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새 세라핌에 틀어박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금붕어에게 먹이를 주듯 때가 될 때 마다 미끼나 다름없는 정찰 부대를 내보내 알르드의 발을 묶는 것에 주력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계책은 이제까지 성공적으로 맞아떨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알르드의 마장기 편대가 세라핌 요새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적군의 마장기 발견! 라이온레인입니다! 드릴 같은 무기를 장비한 놈도 끼어 있습니다!”
레모스가 자신의 집무실에서 불안정한 파편의 힘을 흡수하려고 할 때, 한 부관이 다급하게 달려와 보고를 올렸다. 잠시 후, 땅에서 미미한 진동이 감지되었다. 마력포의 충격으로 인해 지면이 뒤집어지고 있는 것이다.
“멍하니 구경만 하다 갈 줄 알았는데. 아주 멍청이는 아니었군.”
레모스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알르드의 군대가 골든 크로우에 발을 디딘 게 벌써 보름전의 일이었다. 그 동안 하밀레온을 공략하던 천족의 본대는 기사왕의 1차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더욱 더 강하게 그녀를 압박하고 있었다.
“로얄 소벨리온과 로얄 윙드 아쳐를 보낸다. 또한 그 주위에 누가 있지?”
“라우님이 계십니다.”
“라우보고 마장기 편대로 적들을 요격하라고 하도록. 곧 다른 병력의 지원이 있을 테니 시간만 끌라고 해. 녀석들은 결코 세라핌을 넘을 수 없을 거다.”
레모스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세라핌 요새에는 칠십만의 병사와 이백이 넘는 마장기가 있었다. 적들의 화력이 아무리 대단하다 하더라도 전장에서 병력의 숫자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건.
또한 요새의 단단한 성벽과 강력한 방어시설은 알르드라 할지라도 결코 무너뜨릴 수 없었다.
콰쾅! 쾅!!!
“호 님을 위하여!!!”
“라헬님의 뜻을 막아서는 악마들을 물리쳐라!”
마력포의 포격으로 시작이 된 전투는 방패나 다름없는 마장기들이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면서 점점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요새의 방어시설이 불을 내뿜었고, 비명과 울부짖음을 비롯해 매캐한 연기와 속이 뒤집힐 것 같은 냄새가 전장을 뒤엎었다.
그렇게 양군이 강력한 마력의 에너지와 날카로운 병장기로 치열하게 서로의 목숨을 빼앗는 상황에서도 모두의 이목을 받은 것은 다름 아닌 리그너스 대륙의 강력한 전투 병기 마장기들이었다.
“받아랏! 드릴 프레셔 펀치!!!!!!”
온 힘을 다한 드릴 루드비히의 펀치가 세라핌의 성벽을 강타하자 쩍하는 소리와 함께 크레이터가 생겨나더니 단단한 성벽에 자글자글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어서 또 한 번의 펀치가 작렬한 순간 단단했던 성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긍지!!! 약해빠진 천족의 성벽 따위는 나의 펀치를 막을 수 없다!!!”
통신구에서 터져 나온 케반스의 포효에 실버 문을 비롯한 알르드의 병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몇몇 인간 영웅들도 자랑스러운 듯 감동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리고 후방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던 윤아가 자신의 팔을 빠르게 비비며 호를 향해 말했다.
“으아. 순간 소름 돋았어. 열혈만화도 아니고 어떻게 저렇게 유치한 말을 내뱉을 수 있는 거지?”
“왜? 그래도 용감하잖아. 덕분에 아군의 사기도 오르고.”
“그렇습니다, 멍멍. 어쨌든 요새의 방어시설이 취약한 부분을 노렸다지만 이렇게나 빠르게 성벽을 무너뜨릴 줄이야. 케반스님이 이런 무용을 보여주신다면……. 멍! 제대로 상대의 시선을 잡아 끌 수 있겠군요.”
전장의 기류가 상승세를 타는 것을 느끼며 로우덴이 전령을 통해 명령을 내렸다. 잠시 후, 사방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던 실버 문들이 빠르게 진영을 회전하며 부서진 성벽으로 밀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적들이 요새 내로 침투한다! 빨리 막아!”
실버 문의 움직임을 파악한 성벽의 천족들이 다급하게 그들을 향해 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브뤼헤아 비쉬의 견제와 마장기의 튼튼한 방패가 실버 문들을 보호했고, 그들의 노력에 힘입어 실버 문들은 어렵지 않게 부서진 성벽을 지나쳐 요새 내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성벽이 뚫렸다! 지원을 요청해!”
“빨리 레모스 님에게 연락을! 크아악!”
드릴 루드비히를 위시한 마장기 편대의 강력한 화력과 실버 문 부대의 전진에 천족들은 제대로 힘도 쓰지 못하고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요새의 방어 시설이 충분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로우덴의 지휘를 받는 알르드의 군대는 세라핌의 취약한 부분을 제대로 찌르고 있었다.
그런 다급한 상황에서 세인테르와 엔젤 가디언으로 이루어진 편대 및 다수의 마장기로 구성된 병력이 요새의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레모스의 지시를 받고 도착한 라우의 부대였다.
“이런 빌어먹을! 벌써 성벽이 뚫리다니 방어부대는 대체 무얼 하고 있었던 거야?!”
“이거 괜히 레모스 님에게 질책 받는 거 아닙니까?”
“라우님! 어떻게 할까요?”
부하의 통신에 천족의 A등급 영웅인 라우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입술에 세로로 손가락을 끼었다.
마장기의 카메라에 보이는 거라곤 적군의 공격에 당하는 아군의 모습과 빠르게 파괴되어 가는 방어시설들 뿐이었다. 그러던 도중 라우의 눈에 무언가가 잡혔다.
“으음?”
“라우님? 무슨 문제라도……?”
“아니, 잠깐 기다려 봐.”
부하의 말을 끊은 라우가 카메라 스크린을 향해 재빠르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화면이 빠르게 넘어가더니 하나의 마장기를 라우의 망막에 비춰 올렸다.
“화려한 문장. 분명 전용기로군. 그리고 라이온레인급의 전용기라면……. 윤 호라는 녀석이로군.”
라우는 자신의 뒤를 바라보았다. 엔젤 가디언급을 포함해 다수의 마장기가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상대의 마장기 편대도 적은 수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해볼 만한 숫자였다.
더욱이 자신이 윤 호의 마장기에게 접근만 한다면…….
“생각보다 전쟁이 빨리 끝날 수도 있겠군. 운이 좋으면 불안정한 정령의 파편을 포상으로 받을 수도 있겠어.”
라우의 얼굴에 탐욕스러운 미소가 지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