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3
리그너스 대륙전기 353화
날개를 지녔다는 공통점을 제외하고는 판이하게 다른 무장을 한 병사들이 넓은 공동을 수색하며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찾고 있었다.
그리고 찾았다! 라는 소리가 나올 때면 화려한 무장을 한 천족 영웅들이 다가가 발견한 것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유리병에 옮겨 담기 시작했다.
“예상은 했지만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군.”
“당연하죠. 불안정한 파편은 천족의 고위 천사들에게 엄청난 가치를 지닌 보물이잖아요? 그나저나 호님 의외로 날개를 움직이는 거에 익숙하시네요? 전 아직도 어색한데…….”
“응? 뭐, 이 장치 생각보다 어렵지 않던데? 어쨌든 요새에 도착하기 전까지 익숙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연습해 둬.”
레이자의 말에 호가 어색한 웃음과 함께 몸에 부착된 장치를 조종해 등 뒤로 매달아 놓은 날개를 꿈틀거렸다. 그 움직임이 상당히 자연스러웠던 터라 모르는 이가 보기에는 천족이라고 착각을 할 정도였다.
로우덴의 계획대로 불안정한 파편을 발견한 레모스는 더욱 더 많은 파편을 얻기 위해 수십 부대나 되는 대병력을 던전으로 투입시켰다.
그렇게 병사들이 우글우글되는 혼란스러운 틈바구니에 천족의 병사로 위장한 호와 레이자가 그들의 사이로 끼어드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도 천족의 정찰 부대를 물리치고 획득한 장비와 포로로 잡은 천족들을 고문해 세라핌 요새 내부의 상황 및 천족들의 부대 및 편성 방식에 대해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물론, 호는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통해 천족들의 문화 및 생활 습관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던 편이라 천족들의 틈바구니에 녹아드는 것이 딱히 어색하지 않았지만, 그렇지 않은 레이자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레이자. 그렇게 긴장했다가는 요새에 도착하기도 전에 다른 천족들에게 의심을 살 걸?”
“그, 그런가요? 후우. 표정을 숨길 수 있는 가면이라도 있으면 좋겠어요.”
호의 타박에 레이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면서도 날개를 움직이는 장치를 연습하는 것을 보아하니 엄청나게 신경이 많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주위에는 온통 적이나 다름없는 천족들밖에 없으니 긴장을 하는 게 당연했다.
‘잠입이라…….’
호와 레이자가 천족으로 위장해 병사들의 틈바구니에 섞인 것은 당연히 요새 내로의 잠입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들이 수집한 정령의 불안정한 파편이 요새의 어디에 보관되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물론, 수십만이 넘는 병사가 주둔하고 있는 요새에 잠입한다는 것은 정말 엄청나게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영웅도 아니고 알르드의 왕인 호가 직접 나서야 했던 이유는 다른 영웅들의 위장이 세 살 아이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정말 눈뜨고는 못 봐줄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옆에서 잔뜩 긴장한 기색을 보이는 레이자의 수준이 그나마 나은 정도였기에 함께 이번 잠입에 투입된 것이다. 사실 호 혼자서 잠입을 할 생각이었지만 로우덴이 반대했다. 혼자서 넓은 요새를 돌아다니며 저장고를 찾게 되면 쉽게 의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뭐,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결국 수천이나 되는 병사들의 사이에 자연스럽게 끼어들어 요새 내로 들어가 불안정한 파편의 저장고만 찾아내면 되는 일이었다. 지금도 주위의 천족 병사들은 호와 레이자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런 아이템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으니…….’
혹시나 수틀리는 일이 생기면 브뤼헤아 비쉬가 특별히 제작한 위장 아이템을 사용해 도망을 치면 그만이었다. 고작 삼십분 정도만이 유지되는 변장 아이템이긴 하지만 천족들의 눈을 피해 몸을 뺄 수 있는 시간 정도는 충분히 벌 수 있었다.
당연하지만 이 아이템은 브뤼헤아 비쉬의 특수한 기술의 연구를 끝내고서야 제작이 가능해진 아이템으로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 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이레귤러였다.
“292 수송대. 최근에 수송임무를 마쳤군. 자네들은 오늘부터 사흘간 휴식이네. 요새에서 편히 쉬도록.”
“알겠습니다.”
다행히 워낙에 많은 부대가 파편의 수집을 위해 출진을 한 터라 지하 통로와 연결된 입구는 수많은 병사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덕분에 호와 레이자는 대충대충 확인 절차를 통과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요새로 귀환하는 병사들의 뒤를 자연스럽게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둘은 거대한 신전의 앞에 서있었다.
“요새 내에 신전이라니……. 천족들답네요.”
“라헬의 신전이로군. 이거 분위기를 보아하니 기도라도 해야겠는데? 하기야 천족들은 자신들의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라헬의 신전에 들러 기도를 하고 간다고 하더군.”
“설마? 우리도 가야하는 건가요?”
“당연한 거 아니야? 우리도 천족이잖아. 안가면 대번에 의심을 살 걸?”
호가 피식 웃으며 레이자를 바라보았다. 기도라는 단어에 엄청난 거부감을 느끼는 모양인지 그녀는 고개를 거칠게 흔들고 있었다. 하지만 싫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둘은 본의 아니게 라헬의 신전을 구경해야만 했다.
휴식을 부여받은 천족의 병사들이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단순하다 못해 엄청나게 지루했다.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하고 기도를 올리고, 또 때가 되면 식사를 하고 기도를 올린다. 그리고 밤이 되면 잠에 든다. 이게 끝이었다.
‘젠장할. 이거 곤란한데……?’
그나마 병사들의 숙소가 개인실이라 다행이기는 했지만 이러한 천족들의 생활 패턴 때문에 딴 짓을 하게 되면 바로 다른 병사들의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상황의 심각성을 알아챘는지 레이자의 눈동자도 불안으로 흐릿해져 있었다.
게다가 얼떨결에 위장한 292 수송대의 다음 임무는 천족의 영토로 향하는 수송임무였다. 그것도 내일 모레, 새벽 출발이었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지금이라도 몸을 빼야 되지 않을까요?”
슬쩍 호에게 접촉한 레이자가 씁쓰레한 얼굴로 물었다.
하루 간 천족의 요새에 머무르면서 불안정한 파편이 저장된 보관고는커녕 숙소와 라헬의 신전만 몇 번이나 오가야 했던 그녀였다.
호도 팔자에도 없던 기도를 계속해서 해야만 했다. 기도라기보다는 눈을 감고 자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그나마 마장기가 보관된 격납고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던 게 성과라면 성과였다.
“으음.”
어쨌든 그녀의 말대로 이대로라면 계획은 실패나 다름없었다. 불안정한 파편이 보관된 저장고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지 못한다면 요새를 무너뜨리는 대폭발을 일으키는 것도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지. 정 안되면 최후의 수단을 쓰는 수밖에.”
“……최후의 수단이요?”
“혹시나 이런 상황이 일어날 것을 대비해서 로우덴이 준 게 있거든.”
“그 멍멍 아니 참모님이요?”
생각지도 못한 호의 대답에 레이자가 놀란 눈으로 호를 보았다. 그리고는 호의 가슴 안쪽에 숨겨진 무언가를 확인하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부, 불안정한 파편……!”
로우덴이 던전에서 가지고 와 모두를 놀라게 했던 그 파편이었다.
“우연히 발견을 했다고 보고를 하면 어떠한 반응이라도 보이지 않겠어? 그 틈을 타서 저장고의 위치를 파악해야지.”
“괜찮을까요? 호님의 얼굴을 아는 천족들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어쩔 수 없지. 그냥 튀는 수밖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니까 언제든지 준비해 둬.”
레이자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을 무릅쓰고 잠입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일까?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에게 불안정한 파편을 맡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아직까지도 날개의 움직임이 어색한 그녀에게 불안정한 파편을 맡겼다가는 정체를 들킬 굉장히 가능성이 높았다.
결국 호와 레이자는 292 수송대가 떠나는 날이 올 때까지 아무런 소득도 얻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불안정한 파편을 우연하게 발견했다고 보고를 해야 했고, 곧바로 비상이 떨어졌다. 그리고 천족의 영웅급 인물이 튀어나와 호를 불렀다. C등급의 여성 영웅이었다.
“살살! 주의해서 옮기라고. 살살! 아주 살살!”
“조심해서 옮기고 있습니다.”
“그래도 더 조심해야 돼!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생기면 너랑 나랑은 그대로 끝장이라고!”
뒤에서 들려오는 천족 영웅의 경고에 호는 자는 아기를 어루만지듯 느릿한 손길로 불안정한 파편이 담긴 투명한 유리병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시야에 붉게 빛나는 불안정한 파편들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보이고 있었다. 그렇게 찾으려고 했던 불안정한 파편의 저장고였다.
‘지하 통로에서 가까운 장소에 보관하고 있었을 줄이야.’
아무래도 보관의 용이성 때문이겠지만, 호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잘 된 일이었다.
이 위치에서 대폭발이 일어나면 여기저기 뻥하고 뚫려 있는 지하 통로가 무너지는 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 근처에도 마장기가 보관되어 있는 격납고가 있었다.
“수레에 붙어 있던 파편을 발견하다니 정말로 운이 좋았어. 하마터면 떼죽음을 당할 뻔했다고.”
호가 몸을 일으키자 천족 영웅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말했다. 정말로 엄청나게 긴장을 한 모양이었다.
“불안정한 파편의 폭발이 그렇게 위력적입니까?”
“당연하지. 너 카라스모르의 비극 몰라? 이 조그마한 것이 마장기를 통째로 날려 버린다고. 거기에 연달아 터지기라도 한다면 으으. 상상만 해도 끔찍해.”
“카라스모르의 비극요?”
천족 영웅의 질문에 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들어본 적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자 천족 영웅이 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 끔찍한 비극을 모르고 있다니. 생긴 것과는 달리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 천사인가 보네.”
“......노안이라 죄송합니다.”
어쨌든 카라스모르의 비극은 고위급 천사가 마력을 흡수하기 위해 모아두던 불안정한 파편의 저장고가 터지면서 영지 하나를 통째로 증발시킨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거한 트렛슈였다.
덕분에 거한 트렛슈는 그 책임을 물어 백 년이나 되는 시간을 기도의 방에서만 보내야 했다고 했다.
“얼마나 끔찍하고 충격적인 사건이었는지, 거한 트렛슈님은 그 이후로는 결코 불안정한 파편을 손에 대지 않았다고 해. 뭐, 트렛슈님의 무용을 생각하면 굳이 파편의 힘을 흡수할 필요도 없을 걸? 물론, 우리 같은 천사들은 받아들일 수도 없는 힘이지만 말이야.”
저장고까지 함께한 천족 영웅은 굉장히 수다스러웠다. 그렇게 이야기를 듣다보니 문득 궁금한 게 떠올렸다.
“그나저나 그렇게까지 위험한 것을 왜 여기에 보관하고 있는 겁니까?”
“왜? 여기가 어때서? 통로에서도 가깝고 보관하기가 좋잖아. 괜히 멀리 옮긴다고 수송하는 도중에 충격이라도 받으면 정말 끝이라고.”
“여기서 터지면 그게 더 끔찍하지 않을까요?”
“응? 그렇다 하더라도 터질 일이 뭐가 있겠어? 아항! 알르드의 마력 폭탄 때문이구나? 걱정 마. 이 정도의 지하면 바로 위의 지면에서 마력 폭탄이 터져도 아무렇지도 않을 테니까.”
천족 영웅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런 영웅의 말에 호는 힐끔 불안정한 파편의 저장고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혀로 말라붙은 자신의 입술을 훑었다.
그리고 그날 밤 수송대에 속한 두 명의 천사가 요새에서 모습을 감췄다.
하지만 불안정한 파편의 갑작스러운 발견으로 인해 요새의 분위기가 알게 모르게 들떠있던 터라 사라진 두 명의 천사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