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7
리그너스 대륙전기 347화
“머리가 다 아프군.”
인간들의 격렬한 저항 때문에 하밀레온의 점령을 위한 공성전은 연달아 패배한데다가 알르드가 참전했다. 거기에 아이리스 성국의 문제까지. 짧은 시간에 워낙에 많은 사건이 터진 터라 라이프린은 뒷골이 지끈거렸다.
“결과적으로 달라질 건 없습니다, 라이프린 님. 어차피 여신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악마들을 물리치는 게 저희들을 사명 아니겠습니까?”
그녀의 뒤로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라헬의 검이라 불리는 천족의 십 천사 중 하나인 루블랑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상대를 경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세력이 줄어드는 것을 가장 좋아할 이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면 더더욱 말이죠.”
“마왕 쉐르난비체……. 언젠가는 그녀도 여신님의 뜻을 받들게 만들어야겠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 전쟁이 중요합니다. 창조신의 힘을 이용해 대륙의 영웅인 기사왕을 손에 넣어야만 하니까요.”
라이프린과 천족들은 이번 전쟁을 통해 많은 수의 인간 영웅을 포로로 붙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박상민이라는 천족의 소환자가 사용하는 창조신의 권능으로 하나, 둘씩 라헬의 사도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현재 몇 명이나 교화가 되었죠?”
“총 세 명입니다.”
생각보다 형편없는 숫자에 라이프린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세리너스의 권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생각하면 느린 교화 속도는 당연해 보였다. 게다가 까다로운 조건 또한 만족시켜야만 했다. 그렇기에 라이프린은 화 대신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후우. 인간들의 영웅으로 인간들을 공격해 그들이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이번 전쟁에서 무리군요.”
“당장은 불가능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가능할 일이 될 겁니다. 인간들끼리 싸우는 모습도 머지않아 볼 수 있을 겁니다.”
루블랑이 낮게 웃음소리를 내며 팔짱을 꼈다. 현재 천족의 영토에서는 인간 종족의 기초 건물이 한창 건설 중에 있었다. 그것들이 완성이 되고 그와 관련된 연구의 개발이 시작되는 순간, 여신 라헬의 뜻을 따르는 인간들이 대륙에 모습을 드러낼 터였다.
하지만 잠시 후, 루블랑이 팔짱을 풀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문제는 알르드입니다. 소환자 박상민은 알르드의 군주인 윤호가 세리너스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사실이겠죠. 알르드의 구성원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요?”
마족, 수인, 인간, 엘프 등 리그너스 대륙의 긴 역사 동안 단 한 번도 양립하지 못한 종족들이 한데 어우러져 생겨난 국가가 바로 알르드였다. 말 그대로 있을 수 없는 일. 하지만 창조신의 권능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렇기에 라이프린을 위시한 고위 천사들은 윤호가 세리너스의 권능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맞습니다. 그렇기에 알르드의 군대가 하밀레온에 도착하는 것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합니다.”
“기사왕과 윤호가 접촉하지 못하게끔 해야겠군요.”
루블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하자 라이프린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몇 번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 라이프린이 입이 천천히 열렸다.
“알르드의 움직임은 어떻죠?”
“골든 크로우의 남동부인 도르스판 지역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이쪽을 향해 진군중이라는데 행군 속도가 굉장히 느립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어쨌든 도르스판 지역이라……. 그 쪽이라면?”
“질풍의 레모스가 구축한 요새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루블랑이 씨익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요새 세라핌. 천사의 신전이라 불리는 곳으로 천족의 병사들을 양성하고 무기와 마장기를 생산하는 것과 동시에 근방의 골든 크로우 잔당들을 제압하는 임무 또한 맡고 있었다.
* * *
“몇 번이나 하밀레온에 지원군을 요청해봤지만, 대답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국토를 짓밟고 있는 잔학한 천사들의 군대를 생각하면 기사왕께서도 여유가 없으셨겠죠.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지원군이라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가 없군요!”
호가 골든 크로우의 영웅 포르테를 만난 것은 성자 케루벨을 쓰러뜨리고 사흘이 지난 후였다. 자신을 골든 크로우의 최정예 기사단인 황금 기사단의 일원이라고 밝힌 그는 세라핌이라는 불리는 천족의 요새를 상대하고 있다고 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라핌이라 불리는 천족의 요새를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장기가 한 기 포함되어 있다지만 천족의 군대와 전면전을 펼친다고 말하기에는 포르테가 이끄는 병력의 숫자는 너무나도 적었다.
‘그래도 S등급의 영웅인 까닭에 아직까지 버티고 있었던 모양이군.’
호는 먼저 그들에게 휴식을 제안했다. 포르테는 물론이고 골든 크로우의 병사들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가 시체를 치우고 싶지는 않았다.
“가, 감사합니다.”
포르테는 그런 호의 제안을 거부하지 않았다. 천족들의 계속된 추격에 제대로 수면을 취한지도 오래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포르테가 다시 호를 찾았다.
포르테의 군대는 천족들의 파상공세로 수도가 무너졌을 때 하밀레온으로 합류하지 못하고, 따로 떨어져 나간 병사들을 모아 편성한 부대였다. 비록 병과는 뒤떨어지고 무장도 형편없었지만 자신들의 나라를 지키겠다는 애국심으로 똘똘 뭉쳤고, 지금은 천족의 요새를 상대로 전투를 벌이고 있다고 했다.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들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천족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야 합니다. 부디 저희들을 도와주시면 이 포르테, 결코 호 님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당연히 할 일입니다.”
말과 함께 호는 포르테를 바라보았다. 금발의 미중년인 그의 갑옷은 땀과 피가 말라붙은 자국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이제까지 얼마나 많은 전투를 얼마나 치렀는지 쉬이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정보창에 나타난 포르테는 통솔과 무력 수치가 높은 영웅이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짐작해 봤을 때 전투가 벌어졌을 때마다 가장 선두에서 검을 휘둘렀을 게 분명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하밀레온의 폐하와 합류해야겠지만, 천족들의 요새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천족들은 자신들의 요새를 세라핌-천사의 신전으로 부르며 요새 내부에서 병력과 마장기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땅에 천족들의 요새가 세워지다니. 통탄할 노릇입니다.”
“마치 그들의 영지나 다름없는 곳이로군요.”
“그렇습니다. 하물며 요새의 지휘관은 천족이 자랑하는 십 천사, 레모스입니다.”
로우덴을 통해 이미 알고 있는 정보였지만, 호는 처음 들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질풍의 레모스. 만만치 않은 상대입니다.”
“호 님께서 도와주시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세라핌에서 나온 정찰 부대들이 이 근방의 마을을 약탈하고 있습니다. 마장기가 포함되어 있는 군대입니다.”
“마장기? 몇 기나 되죠?”
“두, 세기 정도입니다.”
포르테의 시선이 잠시 막사 밖으로 향했다. 호의 막사로 오면서 그는 알르드의 주둔지에 배치되어 있는 수많은 마장기를 볼 수 있었다. 그 정도의 전력이면 세라핌의 정찰 부대 따위는 가볍게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으음.”
그리고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포르테를 뒤로 한 채 호는 힐끗 로우덴을 바라봤다.
“멍멍. 정찰 부대가 몇 부대가 됩니까?”
“다섯 부대입니다. 삼천에서 오천 정도 사이의 규모인 부대입니다. 아국의 마을과 영지를 약탈하고 식량 및 자금을 모으는 임무를 맡은 놈들이죠.”
“다섯 부대라……. 멍멍. 그 녀석들을 모조리 잡으려면 급하게 움직여야겠군요.”
“모조리?”
포르테가 의아한 눈초리로 로우덴을 쳐다봤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로우덴은 자신의 손가락을 좌우로 까닥이며 말을 이었다.
“멍멍. 우리의 목표는 레모스와 세라핌이라 불리는 천족의 요새입니다. 요새라 불리는 만큼 분명 어마어마한 방어 시설이 갖춰져 있을 겁니다.”
“그, 그렇죠.”
“그렇기 때문입니다. 멍멍. 정찰 부대 역시 요새의 병사들입니다. 그들이 요새의 방어시설을 박차고 나왔는데 이 기회를 놓쳐야 되겠습니까? 멍. 그것도 마장기까지 포함되어 있는데 말이죠. 게다가 그들이 약탈한 식량과 돈이 요새로 무사히 수송된다면 그 자원들은 천족의 병력으로 탈바꿈해 골든 크로우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서는 안 됩니다!”
로우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포르테가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그것으로 레모스의 정찰 부대를 공격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한 놈도 빠짐없이 소탕해야 합니다. 멍멍.”
“저도 돕겠습니다. 이 근방의 지리에 빠삭한 만큼 천족 녀석들이 어디쯤에 있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껏 레모스의 정찰 부대에 쫓겨 다닌 탓인지 포르테는 레모스의 정찰 부대가 어디에 위치했는지 그리고 어느 방향으로 이동할 지에 대해 그럴듯한 추측을 곁들어 상세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물론, 포르테의 정보만을 듣고 병력을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 브뤼헤아 비쉬들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들이 전해온 정보는 포르테의 말이 사실이라고 말해주었다.
“우리가 도착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정찰 부대를 귀환시키지 않다니. 레모스 녀석 무슨 꿍꿍이지?”
“멍멍. 우리의 행동에 맞춰서 움직일 생각일 겁니다. 정찰에 따르면 세라핌에 주둔한 병력은 약 팔 십만. 정찰 부대 몇 부대 정도는 필요도 큰 타격이 없는 수준이지요.”
“자신만만한가 보군. 그래도 정찰 부대에는 마장기가 포함되어 있을 텐데?”
호가 되묻자 로우덴이 어깨를 으쓱였다.
“기껏해야 C등급 마장기일 겁니다. 아마 마장기사도 형편없는 실력의 녀석이겠죠. 그 정도라도 마장기가 없는 골든 크로우의 영지를 짓밟는 것은 가능하니까요. 멍멍.”
“그렇다면 병력을 움직여도 되는 건가?”
“이미 편성을 마쳤습니다. 명령만 내리시면 바로 출진할 수 있습니다.”
“굿.”
로우덴의 대답에 호는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유능한 군사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던가? 머리가 좋은 녀석이 함께 하고 있으니 참으로 든든했다.
“적?! 골든 크로우의 잔당들인가?”
“아, 아니야! 저건 마장기?! 알르드다!”
“젠장! 모두들 방어 진형을 갖춰라!”
실버 문과 브뤼헤아 비쉬로 이루어진 알르드의 군대는 곧바로 레모스의 정찰 부대들을 급습했다. 워낙에 날랜 병사들인 터라 천족들이 제대로 움직임을 파악하기도 전에 공격이 시작되었다.
정찰 부대에 포함된 천족의 마장기는 로우덴의 예상대로 C등급인 엔젤급 마장기에 불과했다. 마장기의 오너는 B등급 영웅으로 조종술 역시 평범한 수준이었다.
“이것이 우리 조인족의 전설 병기 치르넬이다! 꼬끼오!!!”
“한 놈도 놓쳐서도 안 됩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팔쿤과 레이자를 포함해 공격 부대에 배치된 알르드의 마장기사들은 천족의 마장기를 상대로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하며 그들을 제압해 나갔다.
“황금 독수리의 날카로운 발톱을 보여주마!”
그 중에는 골든 크로우의 황금 기사이자 자넷급 마장기의 오너인 포르테도 포함되어 있었다.
골든 크로우가 자랑하는 기사단의 일원답게 포르테의 마장기 조종술은 제법인 수준이었고, 이제까지의 분노를 쏟아 내듯 엔젤급 마장기를 고철로 만들어 버리며 승리를 거머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