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2
리그너스 대륙전기 342화
땡땡땡!!!
새벽 다섯 시. 호올스의 주도 프리지안에서 비상종이 시끄러운 소리로 울었다. 덕분에 눈을 뜬 마인족의 족장이 얼굴 가득 불편함을 드러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히히힝. 쯧. 나 같은 늙은이들은 조그마한 소란에도 잠이 깬단 말이지."
알르드와의 전쟁과 관련해 연달아 회의가 있던 터라 어젯밤에도 잠자리에 늦게 들어서인지 몸이 무거웠다. 그런 탓에 족장의 움직임은 평소보다도 느릿느릿했다. 어쨌든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비상종이 울릴 일이 없었다.
그리고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창밖을 바라본 순간 족장의 몸이 얼어붙었다. 그의 시선 끝자락에 붉은 화망과 연기가 닿고 있었다.
“무, 무슨?!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냐!”
“적습입니다! 알르드의 구, 군대가……! 나타났습니다!”
“알르드?”
문을 열고 들어온 병사의 다급한 목소리에 마인족의 족장은 그제야 도시의 소란스러움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아, 아니 어떻게?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알르드의 군대가 프리지안에 나타난 것이냐? 보니타는 무엇을 하고 있고?! 히히힝!”
살인호랑이 보니타가 이끄는 병력이 타르판 요새에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알르드의 군대가 프리지안에 나타났다. 그래서일까? 족장의 목소리에는 당황스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당황스러움이 황당함을 거쳐 좌절로 변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족장님! 타르판 요새는 무너졌습니다. 그, 그리고 타르판 요새를 지휘하던 보니타 장군은 호인 부족의 병사를 추슬러 후퇴중이라고 합니다.”
“뭐라고?!”
믿을 수 없는 소식에 마인족의 족장은 자신의 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잠시 후 주먹을 꽉 거머쥐었다. 그의 커다란 몸이 분노로 부르르 떨고 있었다. 적들이 마인족의 영토인 호올스를 짓밟고 있는 상황에서 자기들만 살겠다는 보니타의 행동에 화가 난 것이다.
‘빌어먹을! 이럴 줄 알았으면 서러브레드를 남부로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하지만 이미 후회는 늦은 뒤였다. 적들은 타르판 요새를 무너뜨리고 프리지안을 공격하고 있었다.
“방어는?! 방어는 어떻게 되고 있지?”
“당장 미스릴 홀스단이 알르드의 병력을 막아내고 있습니다만, 지원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모든 병력을 타르판 요새와 서러브레드에게 맡겼던 프리지안에는 많은 병력이 주둔하고 있지 않았다. 지원군도 마찬가지였다.
프리지안과 마찬가지로 전쟁으로 인해 계속해서 병사들을 전방으로 내보낸 프리지안의 주변 도시에는 고작해야 천, 이천 수준의 예비군만을 두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지원군이라고 부를 수 있는 병력이 아예 없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그들과 다른 종족의 수인 영웅은 자기들만 살겠다고 도망을 치고 있었다.
“적들에게 세계수의 분노를!”
“호 님을 위하여!!!”
“물러서지 마라! 우리들의 터전을 지켜라! 히히힝!”
프리지안의 앞마당에서는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미스릴 홀스단은 마인족의 최정예라는 명성답게 벌써 몇 번이나 적의 돌격을 저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프리지안을 공격하고 있는 상대는 만만치 않은 병사들이었다.
보니타와의 전투를 통해 실전을 경험하면서 정예병으로 거듭난 알르드의 고 랭크 병사들은 미스릴 홀스단의 악착같은 방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방패를 뚫고 성내로 진격하려고 하고 있었다.
“히히힝! 버텨! 어떻게든 지원군이 올 때까지 시간을 끌어야 한다!”
한 마인 영웅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엘프 병사를 장창으로 찔러 넘어뜨리고는 악을 쓰며 외쳤다. 불리한 상황이라는 것은 안 봐도 알 수 있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적이 성을 넘지 못하게 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던 도중 심상찮은 기세를 감지한 마인 영웅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히히힝. 젠장…….”
마인 영웅뿐 아니라 주위에 있던 몇몇 마인족 병사의 입에서도 낮은 신음소리와 함께 욕이 흘러 나왔다.
쿵! 쿵! 쿵!
일반 병사로는 항거가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리그너스 대륙의 최종 병기가 자신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알르드의 주력 마장기로 무려 A등급의 마장기인 라이온레인 편대였다.
“아군 마장기의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지? 왜 이렇게 꾸물거려? 우리가 여기서 다 뒤지고 난 후에나 나올 생각이야?!”
“그, 그게 아직도 가동 중이라고만 합니다!”
“뭐라고?!”
적들의 공격이 시작된 지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가동 중이라니?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마인 영웅의 표정이 이지러졌다.
무슨 문제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아군의 마장기는 자신들이 모조리 죽어나자빠지기 전까지는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불리하다 하더라도 순순히 물러나거나 죽어줄 생각은 없었다.
“히히히힝! 대마장병을 준비해라! 그리고 3, 4, 5조는 대마장병을 호위하며 마장기를 공격한다!”
그렇게 명령을 내리던 마인 영웅의 눈에 앞으로 치고 나오기 시작하는 특이한 색의 마장기가 들어왔다. 알르드의 주력기라는 라이온레인의 붉은색과는 어울리지 않는 검은색의 마장기였다.
“저건……?”
“마족의 데스 사이더입니다. 아무래도 이번 전투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알르드 녀석들이 단단히 벼른 모양입니다.”
“빌어먹을. 이번에는 우리들의 차례인가.”
부관의 말을 들으며 마인 영웅이 한숨을 내쉬었다. 전장에서 마주친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알르드의 데스 사이더에 관해서는 들은 소문들이 있었다.
“전장의 검은 악마…….”
수인 영웅의 깊은 탄식과 함께 그들에게로 접근한 데스 사이더가 자신의 낫을 세차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 * *
“돌입합니다.”
수인 왕국의 대부족 중 하나인 마인족이 자랑하는 병과, 미스릴 홀스단이 자신의 앞을 막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시진의 얼굴에는 긴장감이라고는 조금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와 함께 기대감 그리고 앞으로 있을 전투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만이 가득 차 있었다.
-음뭐어어! 너무 빠릅니다, 사령관! 호위 편대와 함께…….
“아뇨. 이 정도 수준의 적들을 상대로 호위 편대는 불필요해요. 하물며 적의 마장기가 나온 것도 아니잖아요?”
-그, 그렇지만 전장에서는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음뭐어!
통신구에서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지만, 한시진은 자신의 속도를 늦출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조금씩 마장기의 속도를 높이며 데스 사이더의 무기에 자신의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리고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마인족의 병사들을 베어버리기 시작했다.
콰콰카캉!
커다란 굉음과 함께 육중한 덩치의 병사들이 허공을 날았고 비명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중장갑 기사단의 모습을 하고 있는 미스릴 홀스단이지만 마장기의 돌격을 막아내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마장병! 대마장병 어디에 있나?!”
“저 괴물 자식을 빨리 막아!!!”
미스릴 홀스단 사이에서 마장기의 천적이라 불리는 병과인 대마장병이 모습을 드러내며 데스 사이더를 공격했지만, 한시진은 동요하지 않고 그들의 공격을 가볍게 피하며 낫을 휘둘렀다.
“흥!”
실력이 떨어지는 마장기사도 아니고 한시진은 알르드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마장기사. 대마장병의 공격에 쉽게 무너질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었다. 하물며 마인족의 대마장병은 최고 랭크의 병사들도 아니었다.
악마 같은 년! 네 년의 목……. 크아악!
아악!
베고, 베고, 또 벤다.
한시진의 머릿속에는 자신을 공격하는 적들의 움직임이 실시간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막아내야 할지, 또한 적들을 어떤 식으로 공격해 무너뜨려야 할지 판단을 내리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마인족 만세!
히히히힝! 혼자만 죽지 않겠다!
프리지안을 지키기 위해 수인 왕국의 병사들은 계속해서 한시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공격은 한시진의 눈에 훤히 보이고 있었다. 낫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마력포가 발사될 때마다 마인족의 병사들의 비명이 어김없이 터져 나왔다.
게다가 데스 사이더에게 집중되던 대마장병의 공격은 알르드의 마장기 편대가 돌입하자 타깃의 집중이 흐트러졌고, 마장기들에게 큰 피해를 주지 못한 채 무너지고야 말았다.
결국 마지막까지 투지를 불태우면 마인족 영웅의 목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호올스의 주도이자 마인족 제1의 도시라 불렸던 프리지안은 알르드의 손에 점령되었다.
“호외요! 호외!”
“마, 마인족 녀석들이 무너졌다고?!”
“호올스가 점령됐다고?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호올스가 점령되고 마인족이 무너졌다는 소식은 곧바로 수인 왕국을 강타했다.
“이러다가 알르드가 진짜로 우리 왕국을 집어삼키는 거 아니야?”
“고작해야 허약해빠진 소환자가 세운 나라라면서?! 대체 우리 왕국의 병사들이 왜 무너지는 건데?”
원인족을 시작으로 벌써 몇 개의 부족이 알르드에게 무릎을 꿇은 상황. 거기에 이번에는 수인 왕국의 주류 세력인 마인족까지 무너져 버렸다. 이는 천 년이 넘는 수인 왕국의 역사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의 위기 상황이었다.
빠르게 수인 왕국의 최정예 부대와 이름 높은 영웅들이 전선으로 향하면서 왕국민들의 불만과 두려움을 잠재우기는 했지만, 다른 종족도 아니고 강력한 전투력을 지닌 마인족이 무너졌다는 소식에 수인족들은 큰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호올스가 무너졌다는 소식은 알르드 남부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 마인족 영웅이자 수인 왕국의 십이멀 하나인 서러브레드의 귀에도 들어갔다.
“크으으으. 빌어먹을…….”
푸른색 창을 쥔 서러브레드의 손아귀가 붉어지기 시작했다. 알르드의 군주 중 한 명인 한시진이 이끄는 군대에 살인호랑이 보니타가 패배했고, 타르판 요새와 프리지안이 연달아 무너지면서 마인족의 땅이었던 호올스는 알르드의 손에 떨어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호올스에 살고 있는 마인족들이 어떠한 상황인지는 알 방도가 없었다.
“히히힝! 당장이라도 돌아가야 합니다, 대장님! 알르드 녀석들을 무너뜨리고 우리의 땅을 되찾아야 한다고요! 여기서 시간을 버릴 이유가 없습니다!”
벌떡 일어선 서러브레드의 부관 중 하나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크게 흥분했는지 자신의 대검을 휘두르려다가 옆의 동료 영웅에게 가로막혀 콰당 나동그라지기까지 했다.
“으으.”
서러브레드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그의 휘하에는 십만이 넘는 병사가 있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병사를 뒤로 물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파리의 대 회의에서 자신에게 내린 명령은 알르드의 군트락을 점령하라는 명령이었고, 이 자리에는 수인 왕국뿐 아니라 천족들도 함께하고 있었다.
“우리는…….”
자신을 바라보는 몇 쌍의 눈동자를 뒤로 한 채 서러브레드가 자신의 두툼한 입술을 뜯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호올스로 향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경우 당장 문제가 될 법한 것만 해도 열 가지가 넘게 생각이 났다.
“푸르르르르.”
결국 서러브레드는 병사들을 뒤로 물릴 수 없었다. 대 회의 명령을 어기는 것에도 큰 결심이 필요했지만 설령 명령을 어기고 호올스로 향한다 하더라도 알르드의 병력을 몰아낼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까닭이었다.
차라리 군트락을 점령하고 난 후 왕국의 다른 종족들에게 도움을 받아 호올스를 탈환하는 게 훨씬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더불어 계속된 공세로 호올스를 점령한 알르드의 군주 한시진에게 압박을 가할 수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군트락을 방어하고 있는 알르드의 전력을 무너뜨리기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때 십천사 중 하나였던 니나 다니엘레와 최강 로리라 불리는 브로리가 주둔하고 있는 알르드의 군대는 서러브레드와 거한 트렛슈의 맹공에도 꿈쩍 하나 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호올스가 무너지고, 군트락에서 지루한 소모전이 이어지는 동안 림드 산맥을 출발했던 호의 군대는 블루 스케일과 키리네 공국을 지나치는 지루한 이동 끝에 드디어 골든 크로우의 영토에 발을 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