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0
리그너스 대륙전기 340화
“천족이……?”
리그너스 대륙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종족의 이름이 마로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호는 사라졌던 위화감이 다시 생겨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신 라헬이라는 존재만 하더라도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최종 보스나 다름없는 적이었다.
“그 비둘기 같은 녀석들이 어떤 이유로 우리들을 공격하는 걸까요? 음무어? 그것도 수인 왕국의 손을 빌려서까지 말입니다.”
“이유만 따지자면 짚이는 게 너무 많은데……?”
“그러게요. 라헬교도를 숙청한 것은 물론이고, 블루 스케일 내에서 벌어졌던 전투도 그렇고. 서로 웃으면서 마주칠 사이는 아니죠.”
“그뿐인가요? 나크 평원을 차지하려고 했던 천족들도 몰아냈잖아요.”
영웅들의 이야기에 호의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따지고 보면 수인 왕국만큼이나 자신에게 이를 갈고 있을 세력이 천족들이었다.
해상을 통하지 않고서는 서로를 오갈 수 없어서 망정이지 수인 왕국이나 인간들의 영토처럼 육로로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면 일 년이 멀다하고 전쟁이 벌어졌을 터였다.
하지만 천족들의 당연해 보이는 행동에도 불구하고 미심쩍은 느낌은 가시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삐이이.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음.”
자신의 귀를 쫑긋 움직이며 입을 여는 마로의 행동에 호는 나지막한 소리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왠지 무언가를 알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천족 군대의 수장. 그러니까 수인 왕국을 방문한 십 천사 중 하나인 트렛슈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삐이.”
“거한 트렛슈와?”
“……직접적으로 대화를 한 것은 아닙니다. 삐이이. 보니타의 참모진으로 그가 천족의 대표와 만날 때 우연히 함께했던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트렛슈가 무슨 이야기라도 했던 건가?”
“트렛슈는…….”
호의 재촉에 마로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헝클어진 생각을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삐이. 제 짧은 소견으로 트렛슈 아니 천족들은 호를 비롯한 알르드의 눈을 우리 수인 왕국에게 향하게끔 하려는 것 같았습니다.”
“어째서? 무슨 의도로 그들이 우리의 눈을 돌리려는 거지?”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삐이.”
마로의 대답은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호는 자신이 품고 있던 위화감의 정체를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었다. 보니타의 이상했던 움직임은 카우셰드에 자신의 발을 묶기 위한 목적인 게 틀림없었다.
마로의 처분이 포함된 회의는 그것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몇몇 영웅들이 다시 호의 막사로 모이기 시작했다. 수는 많지 않았지만 하나하나가 알르드의 최정예라 부를 수 있는 영웅들이었다.
“우리가 알아서는 안 될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게 아닐까요? 음무어?”
“그러니까 그게 과연 무엇이냐 말이지.”
“호 님을 비롯해 알르드의 주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인재들은 현재 카우셰드와 군트락에 집중되어 있으니 후방을 노릴 가능성도 있겠네요. 드워프와 손을 잡고 남쪽과 북쪽에서 병사를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음무어?!”
그럴듯한 아쉬카로트의 추측에 웃소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가정이었기에 호 또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하지만 한시진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현재 천족들은 이레네 아르티아가 다스리는 골든 크로우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에요. 천족들의 공세가 상당한 모양인지 카틀라스 항구에 기항했을 때 블루 스케일에서도 지원 병력을 보낸다는 소식을 흘러가듯 들은 기억이 있어요.”
“골든 크로우를 공격하고 있는 천족들이 무리를 하면서까지 우리를 도모하지는 않을 거다?”
“맞아요. 더군다나 천족들이 직접적으로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도베르만 제독이 눈에 불을 켜며 경계하고 있는 바다를 건너야만 해요. 하물며 십천사 중 하나라는 거한 트렛슈와 무시 못 할 규모의 천족 군대가 토슬치를 공격하고 있기까지 하죠.”
“음…….”
듣고 보니 이상했다. 아무리 천족의 세력이 강하다 하더라도 이레네 아르티아가 이끄는 골든 크로우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몇 번이나 자신들을 패퇴시킨 알르드를 우습게 여기고 있을 리도 없었다.
‘로우덴 녀석이 있었으면.’
천족의 꿍꿍이를 알아차렸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팀 심시티를 지휘하는 그는 현재 림드 산맥의 북쪽의 영토인 에레브와 바르시온 지역의 개발에 전념하고 있었다.
‘지략형 영웅이 좀 더 필요해.’
상황이 이렇게 되자 조금 아쉬운 마음이었다. A나 S등급이 아닌 그보다도 더 높은 SSS등급 영웅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S등급의 지략형 영웅도 몇 없었다. 마장기의 오너를 임명하기 위해 통솔력과 무력이 높은 영웅들을 진화 시켰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SSS등급의 영웅을 키우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적어도 이번 전쟁을 마무리한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리셴르나에게 드워프의 동태를 살펴보라는 전령을 보내야겠어. 마족과 전쟁 중이라 해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는 모르는 일이니까. 그리고 천족과 골든 크로우의 전쟁과 관련해서도 정보를 모아줬으면 해.”
“알았어요.”
“당장 전령을 보내겠습니다.”
호의 명령에 따라 영웅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영웅들을 뒤로한 채 호는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직접적으로 어떤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심란한 마음이었다.
‘뭔가 놓친 게 있나?’
토슬치와 카우셰드를 공격하는 수인족의 병력쯤은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쓸어버릴 수 있었다.
자신들에게 별 위협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속에 묵직한 돌 하나를 얹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 주일 뒤, 아스트리드 벨이 보낸 전령이 카우셰드에 도착했다.
* * *
“이레네 아르티아가 이끄는 군대가 패배했다고?”
“그렇습니다. 여느 때와 달리 천족들의 공세가 본격적인 모양입니다. 현재 소집령이 떨어졌고, 인간 왕국의 병력들이 골든 크로우로 집결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전령의 말에 회의실에 모인 영웅들이 모두들 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녀석들! 이번 전쟁에 대체 얼마만큼의 전력을 투입한 거야?!”
“기사왕이라 불리는 이레네 아르티아 님이 패배할 줄이야.”
“황금기사단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던 거지? 게다가 골든 크로우에는…….”
특히나 인간 영웅들의 놀람은 다른 종족의 영웅들 이상이었다. 호 역시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골든 크로우에는 자신이 판매한 라이온레인 편대가 있었다.
그런 마장기 전력에도 불구하고 골든 크로우는 천족의 공세를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십 천사의 대부분이 모습을 드러내기라도 한 건가?”
“그렇습니다. 천족의 여왕인 라이프린을 비롯해 십 천사 중 다섯이 목격되었다고 합니다.”
십 천사 중 셋이 여기에 있는 것을 감안하면 천족의 전력 대부분이 골든 크로우와의 전쟁에 참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친! 이참에 인간들을 집어삼키려는 건가? 다른 종족들이 그냥 두고…….”
호가 입을 다물었다. 현재 인간들의 상황에 신경을 쓸 여력이 있는 종족은 아무도 없었다. 대륙의 모든 종족이 서로 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호는 리그너스 대륙의 지금 상황이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륙의 패권을 다투는 일곱 종족이 서로 반목하며 전쟁을 벌이는 것은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 마냥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라그나로크처럼 대륙 전체가 전화에 휩싸이는 일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종족간의 균형이 무너질 정도로 전쟁이 커지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수백, 수천 년간 대륙의 주도권을 잡은 종족은 있어도 리그너스 대륙을 완벽하게 통일한 종족은 없었다는 게 바로 그 증거였다.
‘……그 녀석들. 인간들을 집어삼키려는 게 틀림없어.’
그리고 혹시나 있을 자신의 지원군을 막기 위해 수인 왕국을 부추겨 알르드를 공격하게 만든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전령의 뒤이은 말은 호의 가슴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또한 기사왕의 패배는 천족들의 대대적인 공세가 주원인이지만, 몇몇 인간 영웅들이 기사왕을 배신한 것도 큰 몫을 차지했습니다.”
“인간 영웅들이 자신이 모시는 주군을 배신했다?”
“그렇습니다. 의아하게도 배신을 한 영웅은 전부가 여성 영웅이었는데, 목격자들의 말에 따르면 마치 인형과도 같은 모습이었다고…….”
전령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오너 시스템!’
호는 이 세계에 가상현실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한 인물이 자신만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알르드의 동료 영웅이자 소환자인 신윤아나 김유진도 현실에서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한 경험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녀들은 리그너스 대륙전기에서 플레이어의 권능이나 다름없는 오너 시스템을 사용해 대륙에 영향을 미치는 행동은 하지 못했다.
순수하게 라이트 유저에 불구했던 그녀들은 호와 달리 오너 시스템을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설령 누군가가 오너 시스템을 자각했다 하더라도 호는 그 사실에 대해 큰 걱정을 하지 않고 있었다.
소환자에 대해 굉장히 불친절한 이 세계는 소환자들이 세력을 갖추고 날개를 필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오너 시스템을 아무 때나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하지만 천족들은 다른 모양이었다.
‘……누군가가 천족들의 지원 하에 오너 시스템을 사용해서 영웅들을 등용하고 있다.’
인형과도 같은 모습을 한 인간들의 영웅이 바로 그 증거였다. 게다가 기사왕에 대한 충성심이 남다른 골든 크로우의 영웅들이 갑작스럽게 기사왕을 배신할 리도 없었다.
“휘하의 부하들이 배신하다니. 음무어. 충격이 크겠네요.”
“그러게. 마음의 상처가 크겠어. 가뜩이나 천족의 공세로 인해 나라가 위기인 마당에…….”
그리고 웃소와 다른 영웅의 대화가 귀에 들려온 순간 호는 소름이 오싹 돋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기사왕을 배신한 다른 영웅들처럼 오너 시스템을 이용한다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천족의 소환자는 이레네 아르티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천족 녀석들. 그걸 노린 거였어!”
호가 얼굴을 구기며 외쳤다.
“아스트리드 벨에게 당장 지원 병력을 편성……. 아니, 내가 직접 림드산맥으로 가겠어!”
“네, 네? 오빠? 갑자기 무슨……?”
“비상사태야. 천족들의 계략에 제대로 당했어. 그 녀석들 우리와 다른 종족들의 시선을 돌리고 인간들의 세력을 흡수하려는 게 틀림없어! 기사왕 이레네 아르티아를 노리고 있다고!”
호의 말에 시진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은 그녀 또한 느끼고 있는 것이긴 했다. 물론, 수인 왕국과의 전쟁이 끝나지 않은 마당에 황급히 골든 크로우에 지원군을 보내야 할 정도로 서둘러야 한다는 것에는 의문이 있었다.
더욱이 골든 크로우는 알르드에게 지원군을 요청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런 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시진은 반대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호가 저렇게까지 다급하게 움직이는 것에는 분명 그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저도 함께할게요.”
“그래? 그렇다면……. 아, 아니야. 시진이 너는 할 일이 있어.”
“여기서요?”
“응. 나대신 병력들을 이끌고 수인 왕국을 한 번 짓밟아 줬으면 해. 전면전까지는 그렇지만 영토 두어 개 정도는 폐허로 만들어버려. 어차피 우리들의 행보를 막을 녀석들도 없잖아?”
호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고, 한시진도 자신만만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인 왕국의 전력이야 뻔했고, 천족들의 지원 역시 당장은 없을 터였다. 설령 전면전이 벌어진다 해도 공세가 아닌 방어전이라면 마장기 전력의 우세를 통해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