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2
리그너스 대륙전기 332
“음머어…….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렇게나 빨리 지원을 오실 줄이야…….”
미일크 성의 웃소가 성 밖의 지원군과 그들을 이끌고 온 호인족 여인을 보며 안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웃소를 보며 S등급의 호인족 영웅 아쉬카로트가 입을 열었다. 몇 달 전만 해도 카우셰드의 노루망디를 지키는 영주였던 그녀는 한시진의 부재 때문에 디치 플레이스만의 군주로 임명. 비록 임시이긴 해도 드넓은 영토를 잘 운영하고 있었다.
“뭘요. 똑같이 알르드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사이인데 서로가 도와야지요.”
“음뭐어어어…….”
아쉬카로트의 말에 웃소가 감동에 못 이겨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알르드의 막강한 군대와 타우러스라는 전설급 마장기가 있었지만, 대군을 지휘한 경험도 없는데다가 살인호랑이라 불리는 보니타의 악명 때문일까? 자신이 막아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에 하루하루 마음고생을 하던 그였다.
그러나 눈앞의 여인은 전투 면에서 수인 부족 중 제일가는 호인족의 여인. 게다가 A등급 마장기인 티거알리카의 오너이기도 했다. 비록 영웅의 등급은 같았지만, 그러한 사실이 웃소에게는 큰 안도감을 안겨주고 있었다.
“살인호랑이라 불리는 보니타가 병사들을 이끌고 온다고 들었어요. 맞나요?”
“음뭐. 그렇습니다.”
“……다른 십이멀들은 목격된 바가 없나요?”
어떤 이유에서인지 대화를 한 박자 늦춘 아쉬카로트가 웃소를 보며 말했다. 카우셰드와 디치 플레이스만을 다스리는 군주와 군주 대리라는 직함 때문일까? 둘의 대화에는 서로에 대한 존중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런 보고는 없었습니다만, 다시 정찰 부대를 편성해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음뭐.”
“부탁드릴게요.”
웃소의 제안에 아쉬카토르가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담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카우셰드를 침략한 수인 군대의 주축 영웅이 보니타뿐이라면? 머리에 괜찮은 전략이 떠오르자 아쉬카로트의 입술에 슬쩍 웃음이 배어나왔다.
* * *
카우셰드 방면을 침공한 보니타의 군대는 호인족과 토끼족의 연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당연히 병사들을 지휘하는 영웅들도 그 두 종족의 영웅들이었다. 그러나 불합리하게도 병사들은 토끼족에서 차출된 인원이 대부분이었지만, 군대의 수뇌부는 호인 영웅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양 부족이 수인 왕국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토끼족 영웅들은 자신들이 처한 부조리한 상황에 대해 불평불만을 드러내지 못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워낙에 익숙해진 것도 있었지만, 호인 영웅들이 그들에 비해 대부분 등급이 높은 것도 그 이유였다. 단, 한 영웅을 제외하면 말이었다.
“제길, 제길!”
흰 토끼 부족 중 하나에 속한 마시 부족의 영웅 마로가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발로 자신의 기다란 귀를 털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마로는 회의실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알르드를 상대할 전술에 대해 불만을 늘어놓았다가 자신의 상사라 할 수 있는 늙은 호랑이 영웅의 화난 일갈에 회의실에서 쫓겨난 상황이었다.
“무턱대고 돌격이라니. 삐! 아무리 자기네 부족의 병사가 아니라 해도 너무한 거 아니냐? 삐!”
그런 마로의 목소리에는 불평불만이 가득해 있었다. 호인족 참모진이 세웠다는 아군의 전술은 책으로 전쟁을 배우기 시작한 사파리의 군사 학교 학생들이 세운 것만큼이나 형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보병과 마장기를 이용해 전면에 방어진을 세우고 호인족 기병대가 측면으로 돌아 적군을 분쇄한다. 그리고 분쇄된 적들을 보니타가 이끄는 마장기 편대가 마무리. 듣기에는 괜찮아 보이는 전술이었다. 그러나 5초마다 바뀌는 것이 전장의 상황이었다.
“알르드의 영웅들이 븅신도 아니고 삐. 자기네들 생각대로 전투가 진행이 되겠냐?”
하물며 알르드는 여러 번의 큰 전쟁에서 연달아 승리를 거두며 리그너스 대륙의 한 세력으로 당당히 올라선 국가였다. 다만, 마로는 그 알르드의 전쟁 영웅인 윤호가 현재 알르드에 없다는 것에 대해 마음속으로 감사함을 올렸다. 그렇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뒤로 돌아 도망을 갔을 터였다.
흰 토끼 부족의 군사학교 졸업생인 그는 뛰어난 전략가로 수많은 모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마로 부족의 자랑이었다.
그렇게 수인 왕국의 영웅으로 임관했지만, 10년 넘게 수인 왕국의 영웅으로 활동하며 소소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공적을 쌓지 못했고, 이번에야 첫 원정길에 오르며 전쟁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카우셰드의 군주인 웃소…… 삐이. 왕국의 장로이자 우인족의 왕인 수소의 장남으로 부족에서 쫓겨났다가 알르드의 영웅이 되어 귀환. 그리고 수소 장로를 죽이고 왕의 자리를 계승. 삐.”
자신의 막사로 돌아온 마로는 첩자들이 조사한 내용을 보며 앞으로의 상황을 그려나갔다. 첩자들이 알아낸 카우셰드의 전력은 놀랄만한 수준이었다. A등급 마장기인 라이온레인이 배치되어 있었고, 엑스칼리버도 다수 있었다. 거기에 실버 문과 브뤼헤아 비쉬와 같은 SSS랭크의 병사들도 있었다.
이 모든 게 자신들의 입장에서는 불리하게 작용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마로의 머릿속에는 첩자들이 조사한 내용에 더해 자신이 카우셰드에 도착하자마자 개인적으로 확인했던 내용도 함께하고 있었다.
“또한 알리스텅의 유물인 타우러스의 주인이며 전장에서도 여러 번이나 용맹한 모습을 보였다고는 함. 삐. 그러나 대군을 지휘해 본 경험은 없음.”
웃소에 대한 마로의 평가는 제법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대군을 지휘해 본 경험이 없다는 점을 파고들어 난전을 유도한다면 어렵지 않게 그를 쓰러뜨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아군은 그러한 전략 대신 힘으로 적을 무너뜨린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건 오히려 웃소 녀석에게 대군을 지휘할 수 있는 경험만 쌓아주는 일이라고. 삐.”
한 편으로는 전술을 내놓은 호인족 참모들의 생각이 이해가 되기는 했다. 힘과 힘의 싸움만큼이나 전쟁이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것은 없으니 말이다. 게다가 호인족의 특성상 피와 비명이 난무하는 싸움을 좋아하기도 했고 말이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삐. 제대로 된 지휘관이 없을 때 알르드의 군대를 무너뜨려야 해. 그렇지 않는다면 전쟁은 장기전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높아.”
마로가 자신의 붉은색 눈동자를 빛내며 중얼거렸다. 방대한 정보를 규합해 상대 지휘관의 특징을 파악. 단숨에 약점을 파악하고 그에 맞춘 전술을 만들어내는 그의 능력은 정말로 대단한 재능이었다. 문제는 수인 왕국의 군대를 지휘하는 영웅이 그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거 골치 아프게 됐어.”
“……삐. 보복 인사인가 보네.”
“타그르님께서 화가 잔뜩 나셨거든.”
다음 날 자신을 찾아온 동료 영웅의 말에 마로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자신들이 카우셰드로 진입한 지도 닷새 째. 곧 양 세력의 운명을 건 전투가 벌어지려는 찰나, 후방으로 전출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분명 어제 있었던 회의에서의 괘씸죄 때문이 분명했다.
“삐이이이…….”
힘 빠진 마로의 목소리가 막사에 울려 퍼졌다. 그렇게 마로가 후방의 보급 부대로 전출이 되고 나서 이틀 뒤, 알르드와 수인 왕국의 충돌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전쟁은 마로가 생각했던 것과는 판이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적 마장기 편대! 돌입하고 있습니다!!”
마력 통신구를 통해 라이온레인의 오너가 날카롭게 외쳤다. 그 말에 아쉬카로트는 마장기의 조종석 우측에 매달린 패널을 힐끔 곁눈질로 보았다. 그의 말대로 눈에 익숙한 형태를 한 수인 마장기들이 자신의 뒤를 바짝 따라오고 있었다.
살인호랑이라 불리는 보니타가 이끄는 마장기 편대로, 그의 명성답게 강력하고도 날렵한 웨어타이거급 마장기들로 구성이 되어 있었다.
“그래봤자 B등급이잖아?”
바로 뒤에서 수인 마장기들이 자신을 찢어발기기 위해 쫓아오고 있었지만, 조종간을 움직이는 아쉬카로트의 손놀림은 여유가 가득했다. 그만큼 아군의 전력을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티거알리카! 포문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통신에 그녀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칫. 귀찮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종석에 경고음이 가득 울려 퍼졌다. 등 쪽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더니 앞의 지면이 폭발과 함께 튀어 올랐다. 보니타의 마장기가 발사한 주포가 만들어낸 광경이었다. 그와 함께 아쉬카토르가 탑승한 마장기가 전후좌우로 움직이며 죽음의 빛줄기를 피해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부족의 배신자인 아쉬카로트의 등장에 보니타를 비롯한 호인족의 마장기 편대가 미친 듯이 그녀를 쫓고 있는 동안 전쟁의 주도권은 한 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음뭐어어어어!!”
“쏴, 쏴라! 삐이!”
어깨와 이마에 뿔이 난 이제껏 보지 못한 형태의 마장기가 자신들을 향해 돌진해오자 토끼족 수인 영웅이 두려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어서 카니앗산의 주포가 상대의 마장기를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주포에 의해 퍼억, 퍽 깨져나가야 할 마장기의 장갑은 공격이 명중했음에도 불구하고 멀쩡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음뭐어! 이게 바로 타우러스다!!”
우인들의 전설적인 마장기.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고 알려진 마장기답게 적들의 공격에도 흠집조차 나지 않은 타우러스의 위용에 웃소가 포효를 터뜨렸다. 그리고는 자신이 이끄는 엑스칼리버 편대와 함께 수인 군대의 진영으로 돌입, 포화를 교환하며 카니앗산을 비롯한 수인 병사들에게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히기 시작했다.
“적들에게 세계수의 분노를!”
“알르드를 위하여!!”
실버 문을 비롯한 일반 병사들 역시 마장기의 뒤를 따라 돌입, 사방에서 난전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을 막아내야 할 수인 왕국의 주력 마장기 편대는 본진에 없는 상황이었다.
“크, 큰일입니다! 아군의 본진이 당하고 있습니다!!”
“크허헝?!”
통신구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눈에 불을 켜고 아쉬카로트를 쫓던 보니타가 짤막하게 탄성을 터뜨렸다. 아쉬카로트를 쫓으며 석연치 않은 느낌이 계속해서 들긴 했지만, 감정적으로 움직이던 그가 아군의 비명에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 이런!”
이는 전부 아쉬카로트의 스킬 차가운 마음가짐의 효과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알 리 없는 보니타는 자신이 최면에라도 걸린 느낌이었다. 어쨌든 십이멀이라는 이름은 괜히 얻은 게 아니라는 듯 미친 듯이 아쉬카로트를 쫓던 보니타는 곧 상황을 파악하고는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당장 본진으로 돌아가서 적들을 물리치고 아군을 구한다! 어흥!”
그때였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보니타의 옆에 있던 웨어타이거급 마장기 하나가 머리통이 날아간 채 서서히 쓰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정도의 위력을 보일 수 있는 무기는…….
“마력 폭탄?!”
본능적으로 함정이라는 것을 깨달은 보니타가 조종간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적의 전력을 생각하면 이 자리에서 당장 벗어나야만 살 수 있었다. 그리고 보니타의 티거알리카가 몸을 돌려 움직이는 순간 조그마한 빛의 구슬들이 보니타와 수인 마장기들이 있던 자리로 떨어져 내렸다.
이어서 섬광의 소용돌이가 폭발과 함께 어지럽게 일어났고, 갈갈이 찢긴 마장기의 금속이 허공에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군주들이 양 방향에서 공격해오는 수인 왕국의 군대를 잘 막아내는 그 시각, 윤호는 미피츠에 있는 SS등급의 던전 하나의 공략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또 다른 던전으로 들어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