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9
리그너스 대륙전기 229
“라헬의 추종자들께서는 알르드의 행보에 대해 신경을 굉장히 많이 쓰시는 모양입니다?”
퉁 파오의 잔속에 담긴 넥타르가 천천히 줄어들었다. 노선을 함께하고 있던 바라테이온의 상황이 영 미덥지 않은 터라 새로운 조력자로 구한 세력이었지만, 아이리스 성국의 사건 때문일까? 그는 자신을 찾아온 천족이 영 껄끄러웠다.
‘재수 없으면 키리네 공국의 꼴이 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겠어.’
한 때 인간들의 중심 국가로 제국이라 불리었던 나라인 키리네는 천족들의 음모가 뒤에 있는 라헬교의 존재로 인해 국가가 아이리스 성국과 키리네 공국으로 쪼개어 나뉘어졌고, 현재는 인간들의 세력에서도 별 볼일 없는 약소국으로 전락해 있었다.
당연히 천족들에 대한 키리네 공국의 적대감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골든 크로우와 천족과의 전쟁 역시 얼마 되지 않는 병사들까지 지원해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미 한 번 당한 전력이 있으니까.”
퉁 파오의 말에 레모스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알르드에 관심을 두는 이유를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는 골든 크로우 쪽으로 군사력이 집중되어 있는 것 같은데…….”
“똑같은 적대세력이라 하지만 골든 크로우와 달리 우리와 알르드가 직접적으로 영토를 맞대고 있는 곳은 없다. 대답이 되었나?”
대답 대신 퉁 파오는 레모스의 허리춤에 있는 검을 바라보았다. 미피츠의 총독인 자신의 앞에서 반말을 찍찍 내뱉는 건방진 천사에게 뭐라고 하고픈 말이 굴뚝같았지만, 그랬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뭐, 어쨌든 우리 미피츠는 그대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알르드의 던전 토벌 의뢰를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그대들의 군대가 미피츠에 주둔해서 알르드를 공격하겠다는 제안은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저는 미피츠의 영토를 전장으로 만들 생각이 없으니까요.”
“그 건은 조금 아쉽군. 조만간 50 억 리스에 해당하는 자금과 특산품이 미피츠로 운송될 거다.”
“큼. 정확히 말하면 미피츠가 아닌 파오 상단입니다.”
“그래……. 파오 상단.”
늘어진 턱을 쓰다듬는 퉁 파오의 모습에 레모스는 상단의 이름을 조용히 뇌까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정말 돼지 같은 작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필요한 돼지지.”
퉁 파오의 만남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말을 내뱉는 부관의 모습에 레모스는 입가에 냉소적인 미소를 띠었다.
돈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미피츠의 총독과는 조금의 대화도 나누고 싶지 않았지만, 어쨌든 퉁 파오의 존재로 인해 자신들은 알르드의 최정예 군단을 미피츠의 던전에 붙잡아 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것도 SS등급의 던전으로 리그너스 대륙에 위험성이 널리 퍼진 던전이었다.
“대체 그 녀석들은 무슨 이유로 던전을 공략하는 걸까요? 가만히 두고 밖으로 튀어나오는 잔챙이들만 정리하면 굳이 신경을 쓸 필요가 없을 텐데요?”
“글쎄.”
레모스도 그게 의문이었다. 던전을 공략해봐야 얻을 수 있는 건 몬스터들이 모아놓은 리스와 식량뿐. 토벌된 적이 없는 위험한 던전의 공략에 성공하면 천문학적인 리스를 얻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투자되는 군사력과 자금은 그 이상이 필요했다.
물론, 던전에서 발견되는 희귀한 아이템들은 충분히 매력적이었지만, 레모스는 고작 그런 것들로 인해 마장기와 군사력을 낭비하는 알르드의 행보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레모스는 곧 생각을 접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자신들은 알르드의 시선을 골든 크로우에게서 돌릴 수 있었고, 또한 정예 전력이 빠진 알르드를 궁지에 몰아넣을 계책을 꾸밀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수인 왕국으로 향한 트렛슈에게 연락 온 것은 없나?”
“조금 전에 도착한 전갈이 하나 있습니다. 사파리의 폭군이 자신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마인(馬人)들을 주축으로 한 군대가 움직일 것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거한 트렛슈님께서는 이제부터 마인들과 함께 움직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거한 트렛슈가 전장에 나선다라…….”
“알르드에게 지친, 해일과 같은 재난이 닥친 셈이죠. 신벌이 내려질 겁니다.”
부관의 대답에 레모스의 입 꼬리가 가늘게 떨렸다. 무용이라면 십 천사 중에서도 제일가는 영웅인 거한 트렛슈. 그라면 미피츠로 정예 전력이 빠진 알르드 따위는 손쉽게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알르드의 남동부를 다스리는 군주가 드래곤이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세상 일이 관심을 두지 않는 드래곤이 어떻게 알르드와 함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들리는 말에 의하면 성체의 그린 드래곤이 알르드의 영토를 다스리고 있다고 합니다.”
레모스의 부관이 말한 이는 다름 아닌 레피스트 퓨리온이었다. 군트락의 내정을 책임지고 있는 그녀는 자신이 드래곤이라는 것을 감주치 않았고, 그로 인해 주변의 영지에도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드래곤이라……. 하지만 아무리 성체의 드래곤이 알르드를 지킨다 해도 트렛슈라면 충분히 무너뜨릴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레모스는 트렛슈와 수인 왕국이 공격할 알르드의 영토를 지키고 있는 영웅이 그린 드래곤 레피스트 퓨리온이 아니라 한 때 트렛슈 만큼이나 다른 종족들에게 위명을 떨쳤던 심판관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 * *
“그게 뭐죠?”
흰 날개를 곱게 접은 천사 하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의아한 표정으로 남성을 바라보았다. 남성은 호 그리고 천사는 호를 대신 해 군트락을 다스리는 군주 니나 다니엘레였다.
“치천사의 베일이라는 건데, 혹시 들은 적 없어?”
“흐음……. 당신이 가져온 물건답지 않게 신의 성스러움이 묻어나는 이름이네요. 대체 어디서 난 거죠?”
“상단을 통해서 구했지. 얼마를 지불 했더라……. 1 억 리스였던가?”
호의 대답에 니나 다니엘레가 흠칫 몸을 떨었다. 1 억 리스라면 C 등급 마장기를 제작할 수 있는 돈이었다. 아무리 눈앞의 베일에 신의 성력이 느껴진다 하더라도…….
‘아니, 아니다. 니나 다니엘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냐?! 성스러운 신의 유물에 가격 따위를 매기다니! 그러고도 천사의…….’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니나 다니엘레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호는 속으로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어쨌든 이 치천사의 베일은 정말로 1 억이라는 거금을 주고 구입한 아이템이었다. 그리고 그 만큼의 값어치를 하는 아이템이기도 했다.
바로 이 치천사의 베일이 니나 다니엘레를 SSS등급의 영웅으로 성장시켜줄 수 있는 승급 아이템 중 하나, 그것도 코어 아이템이라 할 수 있는 아이템이기 때문이었다.
“굉장히 비싼 가격이네요. 그래도 성력이 담긴 유물은 그만한 가치가 있죠. 그런데 왜 이것을 저에게 보여주시는 것이죠?”
그리고 니나 다니엘레도 지금쯤 그것을 느끼고 있을 터였다. 그 증거로 치천사의 베일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선물하려고.”
“선물……요?”
호의 말에 니나 다니엘레가 되물었다. 하지만 놀란 목소리는 아닌 게 대충이나마 짐작을 한 모양이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보며 호가 손가락을 두 번 튕겼다. 그러자 한 무리의 실버 문들이 들어와 둘의 앞에 다섯 개의 아이템을 가져다 놓기 시작했다.
전부가 니나 다니엘레의 승급과 관련된 아이템들로 미피츠로 떠나기 전 혹시나 하는 상황을 대비해 호가 구해놓은 것들이었다.
‘운이 좋았지.’
아이템을 구하는 데는 디아린 상단 뿐 아니라 드워프의 타임리스 상단도 큰 도움이 되었다. 니나 다니엘레의 승급에 필요한 아이템 중 핵심 아이템이라 할 수 있는 치천사의 베일을 가지고 있던 상단이 바로 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것들은…….”
승급과 관련된 아이템이라 그럴까? 니나 다니엘레는 눈앞의 아이템에 그 어느 때보다도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호의 눈앞으로 기다리던 메시지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띵동.
-니나 다니엘레가 ‘치천사의 베일’을 보며 성력의 충만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니나 다니엘레가 ‘집행자의 카드’를 보며 고양감을 채우고 있습니다.
-니나 다니엘레가 ‘성검의 역사가 담긴 책’을 보며 지식의 만족감을 채우고 있습니다.
-…….
“아, 아아아아!”
화악, 니나 다니엘레의 몸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접혀져 있던 그녀의 날개가 활짝 펴지기 시작했다.
“세 번째 SSS등급의 영웅인가?”
그 광경을 보며 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솔직히 알르드의 세 번째 SSS등급의 영웅으로 니나 다니엘레가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브로리와 로우덴이야 예상 범주 내에 있었지만, 세 번째는 시진과 같은 소환자나 엘 라스엘 혹은 팔쿤과 같이 자신과 전장에서 함께한 시간이 많은 영웅들이 될 거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운이 따르는 영웅은 존재 하는 법. 갑자기 니나 다니엘레의 승급과 관련된 아이템인 치천사의 베일을 손에 넣는 것에 모자라 순식간에 그녀의 승급과 관련된 아이템들이 모조리 구해진 것이다.
“뭐, 잘된 일이지.”
니나 다니엘레는 웃소, 리셴르나와 함께 알르드의 남, 남동부를 책임지며 수인 왕국의 도발을 막아내야 할 영웅이었다.
그 말은 즉, 그녀의 능력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남부가 더욱 안전해진다는 말과 동일했다.
“저것이 바로 여신의 축복이로군요.”
집무실에서 느껴지는 강한 마나의 흐름에 레피스트 퓨리온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호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며 그녀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
알르드의 영웅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도는 소문에 의하면 소환자, 아니 알르드의 군주인 윤호는 영웅들에게 창조신의 축복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레피스트 퓨리온은 그 사실을 딱히 믿지 않고 있었다. 창조신의 권능은 드래곤조차도 범접할 수 없는 능력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말로 눈앞에서 창조신의 축복이 니나 다니엘레에게 내려지고 있었다.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는 농밀한 성력이 바로 그 증거였다. 그리고 성력이 그녀의 몸으로 흡수되면서 집무실 내에 신음이 울렸다.
“내가 어떻게…….”
온몸에 가득한 성력과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날카로워진 감각과 넓어진 시야.
눈을 감았다 뜬 니나 다니엘레는 자신이 큰 깨달음과 함께 성장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성장에 호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 대체 당신은 창조신 리그로우님과 무슨 관계죠?”
“아무 관계도 아닐걸?”
“그런데 어떻게?!”
니나 다니엘레의 얼굴에는 경악이 가득 담겨 있었다. 사실 그가 짐승신의 축복이나 세계수의 축복과 같은 창조신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귀로 듣는 것과 권능을 직접 몸으로 느끼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어쨌든 니나 다니엘레를 SSS등급의 영웅으로 성장시키며 호는 수인 왕국에 대한 걱정을 조금이나마 더 덜 수 있게 되었다.
아쉽게도 브로리와 로우덴과는 달리 그녀의 세부 능력에 EX등급은 없었다. 하지만 통솔과 무력 능력이 989, 993이나 되었고, 지력과 정치, 매력 능력의 한계 또한 S와 SS에 걸쳐져 있었다.
여기에 그녀가 지니고 있는 성검 그람을 이용한 능력까지 더한다면 일군을 이끌어도 부족하지 않는 영웅이 된 것이다.
띵동.
-‘EX등급의 전설’로 향할 수 있는 실마리가 발동됩니다. 3…… 2…… 1……. 성공.
-SSS등급 영웅 니나 다니엘레의 성장이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니나 다니엘레에 대한 스캔을 시작합니다.
-니나 다니엘레가 지닌 재능의 색은 붉은색입니다. EX등급으로의 승급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세부 능력 중에 EX등급이 없기 때문일까? 브로리와 로우덴과는 달리 안타깝게도 그녀는 SSS등급이 성장의 끝인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