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그너스 대륙전기-327화 (327/522)

# 327

리그너스 대륙전기 327

“그 녀석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람?”

호가 풍족해진 재정을 확인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동맹국인 블루 스케일이 본인들의 재량으로 천 억 리스나 되는 큰돈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천 억 리스는커녕 B 등급 마장기 몇 기를 구입하는데도 경제가 휘청거리는 게 현재 블루 스케일의 재정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블루 스케일이 이번 거래에서 영토의 구입 대금으로 지불한 돈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짐작하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들이 왕가 대대로 내려오는 숨겨진 보물창고를 턴 게 아니라면 말이었다.

“멍멍……. 천족들의 의도를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성 밖까지 이어지는 리스의 수레 행렬을 보며 로우덴이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천족의 이러한 행위가 분명 어떠한 의도가 있을 거라는 의심은 들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짐작이 가는 게 전혀 없었다.

“엄청난 돈으로 우리들의 시선을 가리려는 의도인가? 멍멍? 그럴만한 이유가 없을 텐데……. 대체 왜지?”

“의도는 무슨? 아니, 걔들 머리라고는 없는 녀석들 아니야? 갑자기 인간들의 내전에는 왜 끼어들어서는 이런 큰돈을 뿌리고 난리람……? 뭐, 우리만 잘된 거 아니야?”

찝찝함이 가득한 로우덴과는 달리 브로리는 천족의 이러한 행동이 멍청하다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알르드가 바라테이온의 영토를 손에 넣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그들은 무려 1000억 리스 이상의 자금을 소모했다.

이는 A등급 마장기 스무 기를 제작하고도 남는 돈으로 천족들이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위험을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수준의 돈이었다.

그리고 그런 브로리의 모습을 보며 호 역시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 또한 브로리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별일 아니겠지. 어쨌든 우리는 큰돈을 벌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자고.”

호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로우덴의 말처럼 천족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예상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천억이나 되는 돈은 이미 자신들의 품으로 들어온 상황이었다. 그러나 천족들의 이러한 행위는 단순히 자신들의 재력을 뽐내려는 멍청함에서 나온 행동이 결코 아니었다.

* * *

“이 여인인가요?”

은색 머리카락과 포근한 느낌을 주는 푸른색 눈동자를 지닌 여인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그녀의 목소리는 듣는 이에게 간교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라이프린님. 이 여인은 며칠 전 골든 크로우와의 전쟁에서 포로로 붙잡은 로얄 나이트 벨리네 크로아트라고 합니다. 인간의 B 등급 영웅이며, 기사왕 이레네 아르티아를 충심으로 모시는 여인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한 남성이 얼굴에 죄책감이 가득한 여인을 가리키더니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라이프린과 함께 자리에 있는 고위 천사들을 둘러보고는 말을 이었다.

“영혼에 제 이름이 새겨진 부하일 뿐입니다. 제 명령이라면 그 어떤 말도 따르는 영웅이죠.”

“…….”

“맞지?”

남자의 말에 벨리네 크로아트는 자신의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영혼에 새겨진 남자의 이름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었다. 당장 목숨이라도 끊어서 이 부조리함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어째서일까?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진심으로 그를 따라야 할 것만 같은 생각뿐이었다. 그러한 여인을 모습을 보며 천사들의 수장이자 여왕인 라이프린이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놀랍군요. 영혼에 이름을 새겨 자신을 따르게 만드는 것은…… 제가 알기로는 창조신 중 하나인 세리너스만이 할 수 있는 권능일 지언데…….”

“여신 라헬님은 이 세계를 찾은 소환자 중 창조신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 역시 그중 하나이며, 이러한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소환자는 저 말고도 분명히 더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상민이 자신의 수하인 벨리네 크로아트를 바라보다가 라이프린을 향해 고개를 돌려 말했다.

“더 있을 거다? 짐작이 가는 인물이 있습니까? 아니, 우리 종족의 소환자 중에 그대와 같은 능력을 지닌 인물이 있습니까?”

“……천족의 소환자 중에서는 없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알르드의 군주인 윤호는 분명 저와 동일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상민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대륙에서 알르드라는 세력을 키워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렇군. 그렇다면 그대가 사용할 수 있는 세리너스의 권능은 이 여인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도 유효한가? 예를 들면 그대보다 훨씬 강한 상대라거나?”

화려한 날개를 지닌 천사가 상민을 향해 물었다.

천족의 십 천사 중 하나로 제련된 검과 같은 날카로운 기세를 내뿜고 있는 남성이었다. 궁금증을 드러내는 인물은 그만이 아니었다. 라이프린을 비롯해 회의실에 모인 일곱의 천사들이 상민의 입을 주시했다.

“어떤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제약이 있기는 하지만 이론적으로는 가능합니다.”

“그 대상이 기사왕이나 만마의 지배자라 할지라도?”

“그렇습니다. 그녀들의 마음만 꺾을 수 있다면 언제든지 그녀들의 영혼에 제 이름을 새겨 넣을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즉, 기사왕이나 만마의 지배자를 여신 라헬님의 추종자로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죠.”

상민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짧지만 유달리 길게 느껴지는 정적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누군가의 입에서 신음에 가까운 탄성이 흘러 나왔다. 쉽게 믿기 힘든 엄청난 사실에 잠시 사고가 경직된 것이다.

이 자리에 있는 인물 중 상민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라이프린이 손부채로 입가의 웃음을 가리며 말했다.

“호…… 호호호. 여신 라헬님을 섬기는 기사왕이라……. 무척 매력적이네요. 물론, 저는 쉐르난비체가 라헬님의 이름을 외치는 것을 더 보고 싶지만요.”

“물론, 이론상으로나 가능한 일입니다. 그녀들의 영혼에 제 이름을 새기기 위해서는 일단 기사왕을 포로로 잡아야 하는데…….”

상민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너 시스템을 이용해 기사왕을 수하로 만든다? 상상만 해도 짜릿한 일이었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천사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기사왕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어떤 희생을 치러도 그녀를 붙잡아야겠군.”

“게다가 그녀의 마음을 꺾어야만 하는데, 저의 짤막한 지식으로는 어떻게 해야 그녀를 굴복시킬 수 있을지…….”

“뭐, 경전의 독방에 일 년간 넣으면 되지 않을까요?”

“협박이나 모욕을 주는 방법도 있지. 혹은 골든 크로우를 멸망시키면 좌절하지 않을까?”

“…….”

자신이 충심으로 따랐던 기사왕을 향한 노골적인 천사들의 말에 벨리네 크로아트는 파르르 몸을 떨었다. 예전이었다면 이러한 모욕에 필시 검을 뽑았을 테지만, 지금 자신이 모셔야 할 인물은 기사왕이 아니라 상민이라는 이름의 소환자라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자신의 허리춤을 힐끗 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라이프린의 눈동자는 그런 벨리네 크로아트의 행동을 놓치지 않았다.

“대륙의 칠제 중 한 명을 손에 넣는다라……. 좋아요. 소환자 박상민. 그대가 지닌 세리너스의 권능은 이 리그너스 대륙에 여신 라헬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대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여신님의 말씀을 대륙에 널리 퍼뜨릴 수만 있다면야…….”

그런 여왕의 말에 자리에 앉은 천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먼저 에르지의 영주인 그대는 일단 본인의 영지로 돌아가 마을을 발전시키는 데 주력하도록 하세요. 인간 종족의 영웅을 손에 넣었으니 그들의 기술 역시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미 알르드의 군주가 그렇게 하고 있으니 그대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여신님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여러 전쟁을 통해 포로로 잡은 타 세력의 영웅들이 경전의 독방에 갇혀 있을 겁니다. 어떻게든 그들의 마음을 꺾어 라헬님을 따르도록 만드세요.”

천족들의 감옥이나 다름없는 경전의 독방에는 과거 전쟁을 통해 포로로 붙잡은 인간이나 수인 영웅들이 다수 갇혀 있었다. 그리고 상민이 곤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게 시간이 필요합니다. 제 능력이 부족한터라 세리너스의 권능을 연달아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들을 교화시킬 수 있다면 시간은 얼마나 걸려도 상관이 없습니다, 상민.”

라이프린이 그렇게 말하며 상민을 향해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그 말에 담긴 속뜻을 알아챈 상민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인간들의 기술을 연구하고 마을을 발전시켜 나가려면 자재와 특산품들이 굉장히 많이 필요할 겁니다. 천사들은 세리너스의 권능을 지닌 상민이 에르지 마을의 발전에 지장이 없도록 자금과 자재를 풍족하게 지원하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라헬님의 뜻대로.”

“라헬님의 뜻대로.”

“그리고 골든 크로우와의 전쟁을 준비합니다. 우리들의 목적은 기사왕. 칠제인 그녀를 손에 넣어 여신님의 뜻을 따르도록 만들게 해야 합니다.”

라이프린의 말에 모두들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올 말이 리그너스 대륙에 얼마나 큰 충격을 불어 일으킬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일단 그에 따른 계획을 세워보도록 하죠. 아, 상민은 이제 돌아가셔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라이프린님.”

당연히 자신도 회의에 참석할 줄 알았던 상민은 라이프린의 말에 당혹한 표정을 짓다가 자리에 앉은 천사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회의실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렇게 상민이 나가자 미묘한 표정을 짓던 라이프린이 천사들을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크게 쓸모가 없어 보이는 소환자라고 생각했는데 창조신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다라……. 이거 주사위의 숫자 6이 나온 기분이로군요.”

“그것도 세리너스의 권능이라니……. 정말로 위험한 권능입니다. 따라서 소환자들에 대한 감시를 조금 더 높여야 할 것 같습니다.”

한 천사의 말에 자리에 앉은 모든 이들이 긍정을 표했다.

“분명 창조신의 권능을 지닌 이가 저 남자 하나만은 아닐 겁니다. 다른 소환자들에 대한 조사도 시행해야 합니다.”

“인정합니다.”

“행여나 이미 영혼에 소환자의 이름이 새겨진 천사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소환자들과 가까이 지내는 천사들에 대해서도 조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껏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이들이 상민이 사라지자마자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말을 꺼냈다.

소환자라는 존재가 사라지자 가면을 쓰고 있을 필요성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상민을 향해 질문을 던졌던 검과 같이 날카로운 기세를 내뿜던 천사, 레모스가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저 자의 능력을 잘만 이용한다면 더욱 쉽게 여신님의 뜻을 대륙에 퍼뜨릴 수 있을 겁니다.”

“세리너스의 권능으로 칠제를 손에 넣자는 말이겠죠?”

레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손에 넣을 수 있는 가장 쉬운 목표는 바로 기사왕 이레네 아르티아입니다.”

“흐음……. 뭐, 한 가지는 확실하겠네요. 알르드가 골든 크로우의 일에 끼어들 수 없도록 그들의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상민의 말에 따르면 알르드의 군주 윤호 역시 세리너스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다고 추측되는 바. 우리가 아닌 그가 기사왕을 손에 넣으면 곤란할 테니까요.”

라이프린이 손깍지를 끼며 레모스를 비롯한 주위의 천사들을 향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에는 음험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