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6
리그너스 대륙전기 326
“박상민이라는 소환자와 에르지 마을의 정보에 대해 자세하게 조사를 좀 해줘. 가능하지?”
“뭐……. 우리 상단의 세력권은 아니지만 다른 상단을 통해 정보를 얻을 수는 있을 거예요.”
얼굴 위로 복잡한 심정이 드러난 호의 모습을 보며 디아린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박상민이라는 인물, 알르드의 군주인 호 님께서 그렇게까지 경계를 해야 할 정도의 소환자인가요? 뛰어난 능력을 지닌 소환자. 그것도 1회 차의 인물이라면 벌써부터 대륙에 소문이 퍼졌을 텐데요? 호 님이나 알르드의 검은 악마처럼요.”
“뭐, 나중 일은 모르는 거잖아? 일찌감치 대비를 하는 거지. 대기만성이라는 말도 있고.”
“오호. 거슬리는 새싹은 일찌감치 짓밟겠다, 그런 건가?”
“마음대로 생각해. 어쨌든 정보는 제대로 부탁해.”
“알았어요.”
호의 진지한 목소리에 디아린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블루 스케일의 수도인 스완에 상점을 열고 도시의 점유율을 차지하려는 천족 상단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 모종의 수를 쓰고 온 그녀였다. 에르지 상단이 취급하는 천사의 머리띠 혹은 머리채라 불리는 특산품은 사치품에 해당하는 품목. 이미 주위에 여러 종류의 사치품 파는 상점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렇게 디아린이 떠나고 집무실에 홀로 남은 호는 자신이 연 공략본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박상민. 기껏해야 촌락에 불과했던 에르지 마을을 대도시의 규모까지 키워낸 소환자. 그리고 그 기간이 일 년이 조금 넘은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라…….’
보나마나 자신처럼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대해 알고 있는 인물일 게 분명했다. 물론, 디아린의 말마따나 기껏해야 A등급 영지 하나만을 가지고 있는 박상민을 상대로 경계의 수위를 높일 필요는 없었다.
이미 자신은 여러 개의 영토를 보유한 한 세력의 왕이었고, 팀 심시티나 갈리는 공돌이와 같이 가상현실게임에서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이 세계의 이레귤러들도 휘하에 두고 있었다. 게다가 이 세계의 치트키라고 할 수 있는 ‘관우는 내 여자’라는 공략본도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방심할 수는 없지.”
유저의 능력을 보유한 이상 박상민이라는 소환자 역시 오너 시스템이나 영웅들의 승급에 대한 정보도 알고 있을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을 한 순간 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뒤통수를 맞는 것은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진 엔딩, 그리고 이 이상한 세계에 끌려온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 * *
“스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블루 스케일의 수도 스완을 찾아온 반갑지 않은 손님을 두고 세이라 클리퍼드가 노여움을 억누르며 말했다. 굳어 있는 얼굴과 파르르 떨리는 손은 그녀가 지금 어떤 감정을 두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는지를 충분히 짐작케 하고 있었다.
분노를 참고 있는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블루 스케일의 충신 스퀴드 수운다 후작은 물론이고 그의 부관인 똘레오나 다른 귀족들도 활활 타오르는 눈동자로 스완을 찾아온 천사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만약 다혈질적인 성격인 도베르만 후작이 지금 이 자리에 있었으면 말보다 먼저 검을 빼들었을 터였다.
하지만 스완을 방문한 천족의 사신단에는 마음만 먹는다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을 쓸어버릴 수 있는 실력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이 있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오늘의 만남으로 양 세력의 관계가 진전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늙은 천족이 앞으로 나서며 세이라 클리퍼드를 향해 인사를 올렸다. 자신들에게 향하는 귀족들의 살기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소리는 온화했고, 표정 역시 평온했다.
“제 이름은 트렛슈. 명성이 자자한 블루 스케일의 여왕 폐하를 만나 영광입니다.”
“트, 트렛슈!”
“저 늙은 천사가 바로 그 거한 트렛슈란 말인가?”
“슈르톰 성을 홀로 점령한 괴물?!”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에 몇몇 귀족들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거한 트렛슈. 천족의 십 천사 중 한 명으로 얼굴에 가득한 주름만큼이나 수많은 시간을 전쟁터에서 전전하며 명성을 쌓은 천사였다.
게다가 트렛슈는 특이하게 생긴 본인의 전용기 때문에도 대륙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천족의 A등급 마장기인 세인테르를 베이스로 한 그의 전용기는 단 하나의 원거리 무기도 없이 오로지 두 개의 양날 도끼를 장착해 전장을 누비고 다녔다.
그러나 그 도끼에 의해 박살이 난 적들의 수가 워낙 많아 그의 손에 부서진 마장기의 잔해만 모아도 성 하나를 세울 수 있을 정도라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로 전장에서의 그는 대적할 자가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심지어 수인 왕국의 제왕 아쉬토나 만마의 지배자 쉐르난비체도 트렛슈를 가리켜 귀찮고, 껄끄럽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하지만 거한 트렛슈라는 이름에 눌려 그냥 물러나기에는 세이라 클리퍼드 역시 평범한 여왕이 아니었다.
“천족의 인간 백정이 블루 스케일은 무슨 일이시죠? 우리가 이렇게 서로 하하호호 웃으며 만나야 할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글쎄요. 그건 서로가 생각하기 나름이겠지요.”
노골적으로 분노를 드러내는 세이라 클리퍼드의 모습에 트렛슈는 살아온 나이만큼이나 여유로운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바라테이온과 전쟁 중이라 들었습니다. 모에드 왕국까지 합세해서 전쟁을 치르신다고 하더군요.”
“그대들의 세력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을 텐데요?”
“원래야 그렇겠지만……. 전쟁을 중단시켜야 할 필요성이 생겨서 말이죠.”
“전쟁을 중단시켜야 할 필요성? 감히 천족이 우리나라의 내정에 간섭을 하겠다는 말인가요?”
세이라 클리퍼드의 분노와 함께 알현실을 농밀하게 메우는 살기에 천족들이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단 한 명. 트렛슈만큼은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EX등급의 무력 능력을 지닌 그는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덤벼들어도 때려눕히고 도망칠 자신이 있었다.
“그래야 할 필요성이 있다면 여신 라헬님의 이름 아래에 천족의 군대가 움직일 겁니다.”
“감히! 협박을 하는 겁니까?!”
트렛슈의 도발에 세이라 클리퍼드가 팔걸이를 쾅하고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녀는 트렛슈의 무례함에 쉽사리 이성을 놓아버릴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분명 천족들은 자신에게 이렇게 말을 하는 것만큼이나 원하는 것이 있을 터였다.
그리고 트렛슈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우리들은 알르드의 세력이 더욱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알르드가 이번 전쟁을 통해 바라테이온의 세력을 흡수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지요. 이는 블루 스케일도 비슷한 입장이지 않습니까?”
“그, 그게 무슨……!”
“알르드가 마음만 먹는다면 블루 스케일쯤은 가볍게 점령할 수 있을 거라는 걸 모르시지는 않을 텐데요?”
“음……!”
노골적인 트렛슈의 말에 알현실 여기저기서 끓는 신음성이 흘러 나왔다. 그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일찌감치 눈치를 챈 귀족들이 내는 소리였다. 그의 말대로 현재 블루 스케일은 몇 년 전과 비교해 많은 영토를 잃었고, 쇠락해가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 대한 1 차적인 책임의 원인은 왕국의 무능한 귀족들 때문이지만, 알르드 역시 아무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과거 블루 스케일의 영토를 차지하고 있는 세력은 다름 아닌 알르드기 때문이었다.
“그대의 농간에 흔들릴 정도로 블루 스케일과 알르드의 관계는 가볍지 않습니다.”
“그러면 묻겠습니다. 언제까지 알르드가 계속해서 이런 관계를 지켜나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까?”
“…….”
트렛슈의 질문에 세이라 클리퍼드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알르드와 블루 스케일이 암묵적으로 꺼내지 않고 있는 불안의 끈을 거칠게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세이라 클리퍼드가 말했다.
“저는 알르드의 군주를 믿습니다.”
“하지만 블루 스케일의 귀족들은 아닌 모양이로군요.”
늙은 천사의 노골적인 대답에 세이라 클리퍼드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트렛슈를 향한 게 아니었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블루 스케일과 좋은 관계를 구축해 나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블루 스케일이 알르드의 품에서 벗어나 과거 해상 제국으로의 영광을 되찾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흥! 서로의 관계를 진전시켜 나가려면 번지르르한 말은 빼고 그대가 품고 있는 검은 꿍꿍이를 드러냈으면 좋겠는데요?”
“뭐, 아시다시피 우리들이 움직이는 이유야 간단하지 않겠습니까?”
트렛슈가 다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주위를 귀족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프리테븐에 여신 라헬님의 계시가 떨어졌습니다. 루베릭 대륙의 동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그리고 블루 스케일의 해상전력은 그랜드 라인을 뚫고 오는 루베릭 대륙을 견제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거라는 게 저희들의 생각입니다. 겸사겸사 우리들을 적대시하는 알르드를 견제하며 말이죠.”
“…….”
“과거는 잊고 서로 함께 앞으로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이 도와드리겠습니다.”
트렛슈의 말에 세이라 클리퍼드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매력적인 제안이지만 천족들의 꿍꿍이가 무엇인지는 파악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몇몇 귀족들은 트렛슈의 노련한 혀에 이미 넘어간 모양이었다. 그 증거로 침착함을 잃은 듯 주위가 조금씩 시끄러워지고 있었다.
* * *
“종전? 블루 스케일이 바라테이온과 종전 협정을 맺었다고?”
갑작스러운 종전, 그것도 전선에서 가장 많은 피를 흘린 자신들을 제외한 종전이라니? 스완에서 전해온 병사의 보고에 호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바라테이온의 상황이 워낙에 좋지 않은 터라 조만간 전쟁이 끝날 거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는 아니었다.
뒤통수를 맞지 않기 위해 방심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게 불과 며칠 전의 일인데, 의외의 세력에게 땡 하고 뒤통수를 맞은 상황이었다.
“멍멍. 무언가 이상하군요. 블루 스케일이 우리들을 제외하고 이렇게 무리해서 일을 진행시킬 까닭이 없을 텐데요?”
“맞아요.”
로우덴이 자신의 턱을 짚으며 말했다. 한시진도 동의하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게. 세이라 클리퍼드가 바라테이온에게 약점이라도 잡힌 게 있는 건가?”
“아니면 다른 세력이 끼어들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멍멍.”
그 말에 호는 가만히 로우덴을 바라보았다.
“골든 크로우일까? 바라테이온의 약화는 곧 인간들의 약화를 의미하니까?”
“멍멍. 그럴 가능성도 있겠지만 제 생각으로는 천족이 더 의심스럽습니다. 그들은 우리 알르드가 바라테이온의 세력을 흡수하는 것에 대해 경계를 하고 있을 겁니다.”
“그 녀석들. 쓸데없는 데에 힘을 쓰네.”
호가 옅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바라테이온과의 전쟁 이후 호는 란틴 산맥 서쪽을 포함해 네 개나 되는 바라테이온의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다. 영지만 해도 열다섯 개나 되는 커다란 크기의 땅덩이였다. 그러나 호는 이 땅덩이들을 알르드의 세력권으로 포함시킬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땅을 차지해 봤자 무슨 개고생이야? 괜히 방어선만 넓어지지.’
게다가 바라테이온의 영토는 모에드나 블루 스케일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지나갈 수조차 없었다. 결국 괜히 군사력과 자금을 낭비하느니 전쟁이 끝난 이후 자신들이 차지한 땅덩이를 비싼 대가로 바라테이온에게 돌려주거나 블루 스케일에 판매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호가 옅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천족이 우리들을 견제한다 이거지? 블루 스케일을 통해서?”
“그렇습니다, 멍. 적어도 우리가 바라테이온의 땅을 차지하려는 것은 어떻게든 방해하려 들 겁니다. 멍멍. 직접적으로는 아니겠지만 다른 세력의 이름을 통해 접근하려고 하겠죠.”
“그렇다면 최대한 여기서 죽치고 있어야겠네. 좋아! 블루 스케일이나 모에드에서 협상단을 보내오면 최대한 비싼 값을 받아내도록 해. 서로의 관계 따위는 돈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란 말이지. 그리고 시진아.”
“네?”
“전쟁도 끝났으니까 치니코프 영지로 가서 이제르론을 비롯한 방어시설을 해체하는 임무를 맡아줬으면 해.”
“아하! 알겠어요! 이제르론만 아니라 성벽의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싹 긁어갈게요.”
자신의 말뜻을 알아차린 한시진의 대답에 호가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속이 뻔히 보이는 천족의 행동에 순순히 넘어가 줄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로우덴의 예상대로 호가 차지한 바라테이온의 땅은 블루 스케일이 구매하기로 했다.
하지만 호가 차지하고 있는 땅덩이를 구입하기 위해 블루 스케일은 무려 1200억 리스에 달하는 돈을 알르드에게 지급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 자금의 대부분은 천족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