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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너스 대륙전기-321화 (321/522)

# 321

리그너스 대륙전기 321

흑왕의 던전은 란틴 산맥 서쪽 그러니까 울부짖는 협곡과 치니코프 영지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었다. 마장기가 포함된 군대의 이동속도로는 꼬박 일주일가량이 걸리는 길이었다.

“흑왕의 던전은 어떤 곳이에요?”

행군이 지겨운 모양인지 한시진이 나른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호에게 물었다. 1회차 소환자로 이제는 제법 리그너스 대륙의 생활에 대해 익숙해진 그녀였지만 이 대륙의 역사나 사회 체계, 던전의 유래 등에 관해서는 아직 모르는 것이 많았다.

“음. 흑왕이라는 인물이 만든 던전 이겠지?”

“에이. 설마 그게 끝?”

호의 너스레에 시진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아무리 사랑하는 연인의 농담이라고 해도 이런 수준이면 받아주기가 힘들었다. 그런 한시진의 반응에 호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야. 흑왕의 던전은 과거 바라테이온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제왕 흑태자 루드비히의 무덤을 가리키는 말이거든. 그리고 그는 자신의 사후에 묻힐 곳을 생전에 직접 만들었다고 해. 중국의 진시왕처럼 말이야.”

“……중국의 진시왕? 그런 사람이 있던가요? 아! 오빠 세계의 사람인가 보죠?”

“아아. 뭐, 그렇지. 내가 있던 세계에서는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야.”

시진의 질문에 호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얼버무렸다. 오랫동안 리그너스 대륙에서 함께 생활했기 때문일까? 그녀가 자신과 다른 차원의 사람이라는 것을 가끔씩 잊고 있었다.

어쨌든 흑왕의 던전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은 흑태자 루드비히의 무덤.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겠지만, 던전의 공략을 위해서는 루드비히를 지키는 수호자들을 상대해야만 했다. 게다가 던전의 끝에는…….

‘흑태자 루드비히의 영혼이 있다고 했던가?’

그것도 일개 영혼이 아니었다. 공략본에 따르면 유저 일행이 상대를 해야 할 흑왕의 던전 마지막 보스는 대륙을 정벌했을 때 사용했던 전용기에 탑승한 루드비히의 영혼이라고 했다. 마장기의 추정 등급은 던전의 보정 때문인지 약 S등급 정도로 위력이 엄청나다고 했다.

덕분에 공략본에는 적어도 숙련된 마장기사가 조종하는 A 등급 마장기 스무 기 이상의 합공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 말고도 흑왕의 던전에는 총 세 개체의 중간 보스급 몬스터들도 존재했다. 하지만 마지막 보스인 흑태자와 비교한다면 몸 풀기 정도의 수준에 불과했다.

“오빠는 대체 그런 내용들을 어떻게 알고 있어요?”

“알아두면 쓸모 있는 잡다한 지식들이지.”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호를 비롯한 병사들은 흑왕의 던전을 향해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워낙 유명한 인물의 무덤인 만큼 흑왕의 던전으로 향하는 길은 헷갈릴 일도 없었다.

“입구가 보입니다!!!”

그렇게 며칠이나 이동했을까? 지루한 행군에 다들 긴장이 풀려갈 무렵 선두에 있던 한 병사가 외쳤다.

“여기가 흑왕의 던전?”

“흑태자라는 인물이 생전에 얼마나 큰 권력을 휘둘렀는지 보여주는 곳 같아. 개인의 무덤치고는 정말 엄청나게 크군. 찍찍. 다람쥐 족의 전설적인 마장기사인 나도 이런 무덤을 미리 만들어 놔야 겠군. 찍.”

“이렇게 큰 걸 만들어서 뭐하게? 너네 종족의 크기를 생각하면 10 평정도면 충분하잖아?”

그 말에 순간 울컥하며 적어도 이십 평 정도는 필요하다고 말하려던 라쿤은 자신에게 말을 한 상대를 확인하고는 찌익 입을 다물었다. 아득 과일을 깨물고 있는 여인인 브로리는 수인들에게 있어 항거가 불가능한 여인이었다.

굉장히 위험하다고 알려진 던전이지만 던전의 공략에 대해서는 다들 자신이 넘쳤다. 함께한 전력이 다들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먼저 실버 문 정찰대가 던전 내부로 투입되었고, 그들이 가져온 정보를 토대로 호는 공략본에 나온 던전의 대략적인 개관을 감안하며 세부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흑왕의 던전은 폭풍 바람의 신전처럼 미로 형태를 띤 폐쇄형 던전이었다. 그리고 중간 보스급 몬스터인 세 개체의 문지기들이 있었고, 이들을 모두 물리쳐야 흑태자를 만날 수 있는 마지막 방이 열리는 구조였다.

그리고 세부 공략 계획을 세운 호는 선봉대장으로 브로리를 그리고 팔쿤에게 그녀의 보좌를 맡겼다. 무력 능력이 뛰어난 브로리는 어떤 돌발 상황에도 잘 대처할 수 있었고, 만능 영웅인 팔쿤은 그런 그녀를 지원하는데 제격이었다. 게다가 둘의 전용기는 전투 시 시너지도 제법 괜찮았다.

“나만 믿으라고!”

“꼬꼬댁, 꼬꼬!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그런 호의 명령에 브로리는 신이 난 표정을 지었다. 가장 먼저 흑왕의 던전에 발을 디뎌 전투를 벌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게 본격적인 던전 공략이 시작되고 선두로 나선 브로리의 뒤를 따라 던전의 내부를 이동하던 호는 묘한 기시감을 느끼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괜스레 느껴지는 불안감. 그리고 호의 입매가 거칠게 일그러졌다.

“적이다! 모두 방어 태세!”

주위에는 딱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병사들은 호의 명령에 반사적으로 반응하며 움직였다. 곧이어 슈라락하는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화살 세례가 병사들에게로 쏘아졌다.

“실버 문들은 마법사들을 호위하고 브뤼헤아 비쉬는 곧바로 방어 마법을 시전해! 세비트리들은 앞으로 나서서 병사들은 지킨다!”

공격을 당하는 와중에도 호는 침착한 목소리로 재깍 명령을 내렸다. 몇몇 병사들이 화살에 몸이 꿰뚫리며 비명과 함께 목숨을 잃었지만, 그 수는 전체에 비하면 그리 많지 않았다. 몬스터들의 갑작스러운 기습은 예상외였지만, 호의 대처가 워낙에 좋았던 탓이었다.

“대체 어디서 공격이?!”

커다란 세비트리의 덩치로 수백발의 화살을 몸으로 막아낸 엘 라스엘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브로리가 이끈 선봉대에서는 아무런 기별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은 그들이 공격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게다가 흑왕의 던전 입구는 별다른 샛길도 없는 일직선의 구조를 띠고 있었다. 중간 보스급 몬스터가 존재하는 갈림길이 나오려면 아직 한참이나 더 가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둠 속에 숨은 적들이 자신들을 향해 공격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호의 외침과 함께 적들의 기습을 알아차린 시진은 자신들에게 날아오는 화살 방향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곧바로 들고 있던 거대한 낫을 그쪽으로 집어 던졌다. 마나로 타오르는 커다란 강철의 병기가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가 떨어지며 조그마한 크레이터를 만들어냈다.

“저건 언데드?!”

그리고 데스 사이더의 낫에 박살이 난 뼈다귀들을 보며 엘 라스엘이 말했다.

하기야 이 장소는 과거에 활동했던 인물의 무덤. 언데드들이 존재하는 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선봉대가 이들의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도 언데드 몬스터들이 바닥에 널브러진 뼈다귀로 위장을 했기 때문으로 보였다.

그리고 지금도 땅바닥에 널브러진 뼈다귀들이 살아있는 생명체마냥 서로 뭉쳐 괴물의 모양으로 변하는 게 호의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공략본에는 이런 내용이 없었는데?!’

처음 보는 몬스터의 위장술에 호는 다시 한 번 ‘관우는 내 여자’의 공략본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런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전투는 시작되었고, 지금부터라도 주위를 하면 되는 일이었다.

“바닥의 뼈다귀들을 모조리 부셔라!”

호와 함께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챈 눈치 빠른 영웅 하나가 명령을 내렸고, 실버 문들이 주위의 뼈다귀들을 찾아 자신들의 발과 둔기를 이용해 내리 부쉈다.

“뭐, 뭐야?! 이 녀석들!”

“움직인다!”

“세계수의 분노를 받아랏!”

그리고 이는 정확한 명령이었다. 여기저기 있던 뼈들이 병사들의 공격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것인지 딱딱거리며 서로 합체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자신들이 지나가면 감추고 있던 정체를 드러내 지금과 같은 경우처럼 후방의 병사들을 기습하려는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갑작스러운 적들의 등장에 난전, 혼전이 시작되었다.

아군의 진영으로 생각되는 중간 중간에서도 뼈다귀들이 합쳐진 언데드들이 등장했고, 곧바로 둔기를 이용한 실버 문들의 공격이 뼈다귀들을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그렇게 병사들이 전투를 벌이는 동안 한시진은 데스 사이더를 움직여 자신이 던져버린 낫을 회수하는 한 편, 그대로 자신들을 기습한 언데드 무리들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여기 이상한 녀석도 있는데요?! 아니, 커다란 돼지인가?”

마력 통신구를 통해 한시진의 말이 전해졌고, 호가 데스 사이더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진의 말대로 데스 사이더의 앞을 커다란 살덩이가 가로막고 있었다. 데스 사이더만큼은 아니지만 B등급 마장기인 엑스칼리버 정도의 크기를 한 괴물이었다.

“저건…….”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에서는 본 적이 없지만, 공략본으로는 읽어 본 적이 있는 몬스터였다. 이름은 부쳐. 자신이 죽인 생명체의 생명력을 흡수해 전투로 잃은 체력을 회복시킨다는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그 말은 즉, 강철의 병기인 마장기를 제외한 일반 병사로는 부처를 상대할 수 없다는 말과 동일했다.

아무리 부쳐에게 타격을 준다 하더라도 부쳐의 손에 병사들이 죽어나가는 순간 입은 피해가 회복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런 부쳐의 존재는 흑왕의 던전이 SS등급으로 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였다.

“부쳐다! 엘 라스엘은 앞으로 나서고, 부쳐 근처의 병사들은 뒤로 물러난다!”

던전을 공략하기 전 부쳐의 존재와 그 위험성에 대해 이미 들은 병사들은 그런 호의 명령에 신속하게 움직였다.

행여나 전투에 휘말려 거대한 살덩이와 함께하고 싶은 병사들은 아무도 없었다. 이어서 엘 라스엘의 셰비트리가 살덩이의 움직임을 가로막았고, 한시진의 데스 사이더가 부쳐를 난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장의 상황을 보며 호가 인상을 쓰며 옆의 병사에게 물었다.

“던전에 진입하면서 바닥에 널린 뼈다귀를 본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

“그렇습니다.”

“빌어먹을. 후방의 부대에게 연락은?”

“발 빠른 실버 문들을 보냈지만, 아직까지는 연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병사의 대답에 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연락을 받지 않아도, 어떻게 상황이 돌아가는지 전개를 유추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브로리의 선봉대, 자신의 군대 그리고 후방에 있는 병사들까지. 갑작스러운 언데드들의 기습에 난전을 펼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군대를 이루고 있는 병사들이 SSS랭크의 병종이라는 점, 그리고 각 부대마다 실력이 뛰어난 마장기사들이 배치되어 있는 점이었다.

전위에는 브로리가 중군에는 한시진이 그리고 후위에는 라쿤의 프랭스와 다수의 라이온레인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문제라면 흑왕의 던전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몬스터 중 하나인 부쳐가 던전의 초입부터 등장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유능한 자신의 영웅들이라면 부쳐 역시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 증거로 한시진은 부쳐의 급소만을 향해 자신의 낫을 휘두르고 있었다. 몸 전체가 출렁거리는 살덩이로 이루어져 있는 와중에도 정확하게 급소만을 베어내는 그녀의 실력에는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크르르르르!”

데스 사이더의 묵직한 공격에 출렁출렁 뒤로 물러나던 부쳐가 마음에 안 든다는 기색으로 눈을 돌렸다. 그런 부쳐의 눈에 조그마한 병사들이 들어왔다. 살로 이루어진 부쳐의 코가 실룩하더니 빠르게 생명체들을 훑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름드리나무의 기둥만 한 세비트리의 손이 부쳐의 어깨를 내리찍었고, 부쳐는 두 마장기의 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했다.

그렇게 부쳐가 포함된 일련의 언데드 무리들을 물리친 호는 빠르게 병력을 재정비하고는 브로리의 선봉대가 있는 쪽으로 이동했다. 이미 선봉대가 정리한 곳을 지나가는 자신들도 부쳐가 포함된 병력의 기습을 당했다. 그런 만큼 어떤 규모의 괴물들이 그들을 공격하고 있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 병사들입니다!”

그리고 이동을 하던 도중 호는 수백 명 정도로 이루어져 휴식을 취하고 있던 실버 문들과 조우할 수 있었다.

선봉대에 합류했던 병사들로 부상병들을 호위하며 아군을 기다리던 이들이었다. 혹시나 하는 부쳐의 등장을 감안했는지 엑스칼리버도 한 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브로리는?”

“언데드들의 공격을 물리치고 계속해서 진군 중입니다. 저희들은 심한 부상을 입은 병사들을 보호하며 아군을 기다리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엑스칼리버의 오너 영웅의 보고를 받으며 호는 힐끗 부상병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통스러운 신음성을 내고 있는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였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몸의 하나 이상의 부위들이 압축이라도 시킨 듯 쪼그라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쪼그라든 부위는 뼈마저도 사라진 채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부쳐에게 당했군.”

“끄, 끔직한 괴물이었습니다. 기괴하게 생긴 살덩이가 마치 촉수처럼 달려들더니……. 뱀파이어릭 터치 마법 마냥 아군을 흡수했습니다. 저는 마장기에 탑승하고 있어 무사했지만…….”

호의 말에 그 때의 전투가 떠올랐는지 마장기사가 극심하게 몸을 떨었다.

“그래서 그 부쳐는?”

“아군이 당하는 모습에 화가 난 브로리님이 단숨에 박살냈습니다. 코우랄라의 곤봉으로 내리찍어 젤리로 만들어 버렸죠.”

“……그것도 제법 끔찍했겠군.”

호가 침을 삼키며 말했다. 브로리가 어떤 식으로 부쳐를 상대했을지 쉽게 상상이 갔기 때문이었다.

어찌되었든 흑왕의 던전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일반 몬스터인 부쳐라 해도 무력 능력 EX등급에는 상대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호는 부쳐의 공격에 의해 심하게 부상을 입은 병사들을 호위 병력과 함께 던전의 밖으로 빠져나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미 자신들이 지나오면서 언데드로 추정되는 뼈들은 모조리 박살을 냈고, 라쿤의 후위도 있는 만큼 안전에는 크게 문제가 없을 터였다.

그렇게 부상병들을 뒤로 한 채 이동을 하던 도중 호를 비롯해 선두에서 움직이던 마장기의 마력 통신구에서 지직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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