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9
리그너스 대륙전기 319
그렇게 라이자를 손에 넣은 호는 자신이 점령한 바라테이온의 영지에서 병사들에게 휴식 명령을 내리며 지원군을 기다렸다.
로우덴의 활약으로 인해 서로의 모든 것을 건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입은 피해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A등급 마장기인 라이온레인만 해도 다섯 기가 넘게 파괴되었고, 엑스칼리버나 C등급 마장기의 경우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수가 고철로 변했다. 목숨을 잃은 영웅들의 수도 셀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알르드에서 편성된 병력이 블루 스케일의 영토를 지나 호가 머무르고 있는 영지에 합류하면서 호는 어렵지 않게 예전 수준의 규모로 병력을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한 편, 패트릭 바라테이온은 윤호의 숨통을 끊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회심의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난처한 상황에 빠져있었다.
저번 전투로 인해 사자기사단의 단장인 레온을 비롯한 유능한 인재들이 목숨을 잃었고, 병력 역시 반 토막이 났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모에드–블루 스케일 연합군이 자신들의 후방을 유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 일부 귀족들에게서 불만이 튀어나왔고, 이는 패트릭 바라테이온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뭐라고?!”
“말씀드리기 송구하옵니다만, 비에몬 후작파의 귀족들이 이번 전쟁에 대해 회의감을 드러내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저번 전투에서의 패배가…….”
참모의 보고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패트릭은 얼굴을 크게 일그러뜨렸다. 바라테이온의 황제인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반감을 드러내는 일이라니?
용납할 수 없었다.
비에몬 후작파도 할 말은 있었다. 패트릭 황제의 갑작스러운 전쟁으로 바라테이온은 알르드, 모에드, 블루 스케일이라는 세 개 세력을 적으로 만든 상황이었다. 게다가 이 중 둘은 칠 왕국이라 불리는 과거의 동맹국들이었다.
게다가 비에몬 후작파의 근거지는 힐몽거가 이끄는 연합군에 의해 점령당한 상황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빅터 바라테이온이 힐몽거를 몰아내기 위해 일부 병력을 이끌고 회군했지만, 팽팽한 접전 끝에 퇴각했다는 소식이 며칠 전 귀족들에게 전해진 상황이었다.
그로 인해 영지에 남아 있는 가족들의 생사가 걱정이 되는 귀족들이 불만을 표출했고, 패트릭 바라테이온의 이번 전쟁은 섣부른 결정이라는 말이 입에 올리는 자들이 나오게 된 것이다.
“감히 내 결정에 반기를 들어? 당장 비에몬 후작을 불러라!”
그리고 치니코프 공성전을 포함해 저번 전투에서의 연이은 패배로 신경이 날카로워진 패트릭은 곧바로 비에몬 후작을 불러 그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감옥에 가두라는 명령을 내렸다. 패왕이라는 명성에서 나오는 강한 자존심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만약 빅터나 레온과 같은 인물이 있었다면 패트릭에게 현명한 조언을 해주는 것과 동시에 비에몬 후작파의 불만을 가라앉혀 주었겠지만, 현재 그의 곁에는 그런 말을 꺼낼 만한 인물이 아무도 없었다. 저번의 전투로 인해 유능한 인재들이 많이 희생된 탓이었다.
“비, 비에몬 후작님이?!”
“어째서 후작님이 감옥에 갇히신단 말이냐!”
이런 패트릭 바라테이온의 충격적인 결정은 비에몬 후작을 따르던 일부 귀족들의 불만을 폭발 직전까지 가게 만들었다. 하지만 비에몬이라는 구심점을 잃은 일부 귀족들은 무리를 지어 불만을 드러낸다거나 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아직 패왕의 권력은 막강했고, 그를 따르는 귀족들은 수도 없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 * *
블루 스케일을 집어삼키려는 바라테이온의 야욕과 이를 막기 위한 알르드와 연합군의 전쟁이 계속될 무렵, 상업 국가인 미피츠는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양 국가의 전쟁이 그들에게 많은 이익을 안겨다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중 가장 많은 이익을 누리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미피츠의 총독 퉁 파오였다.
파오 상단을 운영하고 있는 그는 이번 전쟁을 통해 양 국가에 식량을 포함한 광석, 병기 등을 제공하면서 부를 쌓아 나갔다. 그리고 바라테이온의 패왕인 패트릭과 모종의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퉁 파오는 바라테이온이 알르드와 연합군을 무너뜨리고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지, 패왕이라는 명성이 예전만도 못한 것 같더군.”
“일흔에 달한 노인입니다. 과거의 이름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죠. 오히려 패왕이라는 명성은 패트릭 바라테이온보다 알르드의 군주 윤호에게 더욱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소환자 중에 그런 인재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대륙은 넓고 영웅은 언제나 등장하는 법이죠.”
넥타르라 불리는 천족의 최고급 술로 목을 축이며 퉁 파오는 눈앞의 남성 아니, 천족을 바라보았다. 조원이라는 이름을 지닌 그는 자신을 A등급 영웅이라고 말하며 알르드의 군주 윤호처럼 천족의 지원을 받고 있는 박상민이라는 소환자를 따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퉁 파오는 상단의 정보망을 통해 실제로 박상민이라는 소환자가 천족의 A등급 영지인 에르지 마을을 다스리고 있고, 휘하로 조원이라는 영웅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박상민이라는 인물도 그 중 하나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확신에 찬 조원의 대답에 퉁 파오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알르드의 군주 윤호는 맨몸으로 리그너스 대륙에 자신만의 세력을 일구어낸 영웅이었다. 그에 반해 상민은 아직 무언가를 보여준 게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던가? 눈앞의 천족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
퉁 파오는 살짝 어깨를 으쓱였다. 소환자들끼리 부딪혀 서로 간에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자신은 그 사이에 끼어 이득만 취할 수 있으면 되었다.
그게 상업 왕국 미피츠가 이 대륙을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어쨌든 천사의 머리띠를 판매하고 싶다고?”
“그렇습니다. 에르지 마을에서 생산되는 최상품의 의복들이죠.”
“특산품의 품질 감정이야 전문가들이 알아서 할 테고…….”
“우리는 판매망만 확보할 수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이는 미피츠에도 좋은 거래가 될 겁니다.”
“그으래?”
조원의 말에 퉁 파오는 냉소했다. A등급 영지에서 나오는 특산품의 양이라고 해봤자 파오 상단이 유통하는 특산품의 수량에 비한다면 세 발의 피도 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굳이 그런 말을 꺼내 눈앞의 천족을 기분 나쁘게 할 필요는 없었다.
세상일이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말이다.
게다가 비밀스럽게 모종의 관계를 구축하고 있던 바라테이온이 무너질 경우를 대비해 비빌 수 있는 언덕 하나는 만들어 두는 게 좋았다.
그게 천족이라는 것이 퉁 파오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퉁 파오가 넥타르를 입에 가져다 댈 때였다.
“그렇습니다. 당신들과 군사 동맹을 맺고 있는 바라테이온은 무너지지 않을 테니까요.”
조원의 말에 퉁 파오는 미간을 찌푸렸다. 묘한 느낌을 주는 그의 말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끝으로 조원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퉁 파오 또한 그를 잡지 않았다.
상업 왕국인 미피츠를 다스리는 그는 천족의 영웅 말고도 만나야 할 인물들이 산더미 같이 많았다.
게다가 적대 관계에 있는 종족의 영웅과 오랜 시간동안 만남을 가졌다는 사실이 골든 크로우의 귀에 들어가도 좋을 일이 없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대로 에르지로 바로 돌아가시겠습니까?”
퉁 파오를 만나고 영주성에서 나온 조원을 향해 천족의 병사인 소벨리온이 물었다. 조원의 호위 병력을 지휘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말에 조원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또 다시 가야할 곳이 있다.”
에르지 상단이라는 이름으로 대륙을 누비는 그의 다음 목적지는 블루 스케일의 수도 스완이었다. 스완의 특산품을 구매해야 한다는 상민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조원은 스완에서의 볼일을 마친 후 알르드의 카틀라스 항구를 통해 수인 왕국의 영토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변장을 준비해야겠군요. 천족 병사라는 사실이 들켜서 좋을 것은 없으니까요.”
조원의 이야기를 들은 소벨리온이 어깨를 으쓱였다. 과거 천족의 블루 스케일 침략 전쟁에서 십 천사 중 하나인 니나 다니엘레가 이끄는 부대의 병사로 참가했다던 그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커다란 망토를 사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알르드에는 디아린 상단이 있다고 했지? 그렇다면 에르지에는 에르지 상단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조원은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에르지 상단이 디아린 상단만큼의 명성을 쌓기 위해서는 갈 길이 아득했다. 천사의 머리채라는 특산품 하나만을 유통하고 있는 에르지 상단은 한 달 수입이 몇 만 리스밖에 되지 않는 신생 상단이었다.
* * *
호와의 전투에서 패배해 뒤로 물러난 패왕 패트릭 바라테이온이 거점으로 삼고 있는 영토인 울부짖는 협곡은 영토의 대부분이 좁은 산맥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어 공략하기가 굉장히 까다로운 영토였다. 그런 지리적인 환경으로 인해 영지의 발전은 굉장히 보잘 것 없었지만, 지금은 백만 이상의 병력과 백 여기 이상의 마장기가 배치되어 있는 천혜의 요새였다.
“무턱대고 들어갔다가는 치니코프 요새를 공격하는 바라테이온의 꼴이 날 겁니다. 멍멍.”
“다른 쪽으로 돌아갈 길은 없는 건가?”
호가 라이자를 향해 물었다. 과거 바라테이온의 영웅이자 사자기사단의 부단장이었던 그녀라면 무언가 수가 나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네. 바라테이온의 수도로 가기 위해서는 무조건 울부짖는 협곡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호의 물음에 라이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주변의 지리에는 빠삭한지 천족의 영토를 통해 울부짖는 협곡을 빙 둘러 가면 굳이 협곡을 통과하지 않고도 바라테이온의 중심부로 진격할 수 있다는 말을 덧붙이기는 했다. 하지만 알르드와 큰 전쟁을 치렀던 천족들이 길을 빌려줄 리 없었다.
아니, 오히려 천족들은 자중지란이나 다름없는 인간들끼리의 전쟁이 오랫동안 지속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도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연합군의 힐몽거 장군이 패트릭의 뒤를 공격하면 아무래도 협곡을 통과하는 게 용이할 겁니다. 멍멍.”
“하아…….”
이어지는 로우덴의 대답에 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그 이야기는 자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무턱대고 공세를 가하기에는 백만이 넘는 병사와 수백 기의 마장기가 발사하는 화력을 감당해 낼 자신이 없었다.
‘뭐, 굳이 전력을 다해 바라테이온을 함락할 필요도 없고.’
어차피 이번 전쟁은 바라테이온의 침공에서 블루 스케일을 지켜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무리해서 패트릭 바라테이온을 몰아붙일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집무실로 모든 영웅들을 집결시킨 호는 휘하의 영웅들에게 방어선을 구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굳이 울부짖는 협곡으로 진격하려는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바라테이온의 병사들이 협곡에서 나오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생각 또한 없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라면 방어선 구축에 필요한 자재들과 자금이었다.
“하아……. 수송 거리가 너무 길고 비효율적이에요.”
“어쩔 수 없잖아? 망한 것이나 다름없는 이 영지의 생산량으로 내가 생각하는 방어선을 구축하려면 백년은 더 걸릴 걸? 아니지. 병사들의 군량을 감당하지 못해 파산부터 하려나?”
알르드를 대표하는 디아린 상단의 상단주 디아린이 그런 호의 명령에 불평불만을 토해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호의 군대가 협곡 내로 진격하지 않고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는 정보에 바라테이온 군단 몇이 협곡에서 나와 공격을 개시했다.
그런 적들의 움직임에 호는 단단한 장갑을 지닌 셰비트리를 전면에 내세우고 라이온레인을 비롯한 전설급 마장기들이 후방에서 화력을 뽐내는 전술로 대응을 했고, 공격에 나섰던 바라테이온 군단은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아 절반 이상의 병력을 잃고는 꽁무니가 빠지도록 도망을 쳤다.
그렇게 방어 공사를 저지하기 위해 바라테이온의 일부 군단들이 계속해서 도발을 걸어왔지만 그것도 잠시, 방어진이 구축되고 치니코프 공성전에서 악명을 떨쳤던 이제르론이 모습을 드러내자 바라테이온과 알르드의 군대가 맞붙은 동부 전선은 조금씩 소강상태로 빠져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