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6
리그너스 대륙전기 316
쿠우웅!
“히익!”
자넷급 마장기보다 배는 더 큰 커다란 몸체의 그림자가 눈앞에 드리워지는 순간 바라테이온 마장기사는 자신의 몸이 빳빳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종간을 움직여야 했지만, 어째서일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엘 라스엘의 셰비트리는 자신의 가장 큰 장점인 커다란 몸통으로 상대의 마장기를 밀어 넘어뜨렸다.
“크아아악!”
대형 마장기에 속하는 셰비트리는 두꺼운 장갑으로 인해 자넷이나 골드 이글과 같은 소형 마장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무거웠다.
그런 이유로 인해 셰비트리에 깔린 자넷급 마장기가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움직여! 움직이란 말이다!”
바라테이온의 마장기사가 셰비트리에게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쳐봤지만 역부족이었다. 셰비트리의 무게를 떨쳐내기 위해서는 마장기의 출력이 부족했다.
게다가 셰비트리에게 깔려 움직이지 못하는 적의 마장기를 다른 마장기들이 그냥 두고 볼 리 없었다.
“감사합니다!!!”
가장 먼저 상황을 알아챈 이는 한시진이었다. 곧이어 데스 사이더가 바람처럼 움직였고, 비명에 가까운 외침과 함께 자넷급 마장기의 옆구리로 데스 사이더의 낫이 파고들었다.
날카로운 마력의 날이 순식간에 마장기의 장갑을 짓이기며 조종석까지 박살 내었고, 동력원까지 무력화시키며 바라테이온의 마장기를 침묵 속에 빠뜨렸다.
“고마워요! 덕분에 또 한 기 쓰러뜨렸네요.”
“천만의 말씀. 앗!”
한시진의 칭찬에 대답하던 엘 라스엘이 화들짝 놀라며 마장기를 움직였다. 뜨거운 마력탄의 열풍이 그녀의 위로 강렬하게 지나갔다.
그리고 비명과 함께 허공 위에서 지원을 하던 브뤼헤아 비쉬 몇이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엑스칼리버!”
라스엘이 머리를 돌려 섬광의 궤적을 쫓으니 멀찍이서 바라테이온의 엑스칼리버들이 자신들을 향해 마력포를 준비하는 것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조심해요! 적의 공격이…….”
적 마장기의 등장에 한시진에게 경고를 하려던 엘 라스엘은 자신의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야 했다. 어느새 데스 사이더는 전장의 포화 속으로 몸을 숨기고 없었다.
전투가 점점 더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전장은 마장기와 병사들의 백병전으로 어우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알르드의 영웅들은 자신들의 마장술을 뽐내기라도 하듯 전장의 한복판에서 용감하게 적들의 마장기를 박살 내고 있었다.
“좌측의 존 레인 편대! 전멸입니다!”
“에잇! 로얄 나이트 부대를 보내라!”
“네, 네엣?! 하지만 발드 님! 일반 병사들로는 마장기들의 화력을 막아낼 수가…….”
“시간만 끌라고 해! 곧 지원 마장기 편대를 보낼 테니!”
덕분에 바라테이온의 군대를 지휘하는 발드는 없는 머리가 생겨나 다시 빠지는 끔찍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물론, 용맹함에 있어서는 바라테이온의 마장기사들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발드 직속의 대머리 기사단은 자신의 마장기가 파괴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공격을 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알르드의 선봉에 선 마장기는 이제껏 자신들이 상대했던 마장기와는 차원이 다른 실력자들이었다. 아무리 전의가 뛰어나다 한들 실력의 차이에는 비빌 재간이 없었다.
“조무래기는 좀 꺼져 버려! 대장은 어디에 있느냐!”
코우랄라에 탑승한 브로리가 적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아래에는 용감하게 달려들었다가 제압당한 마장기들이 몇 대나 박살이 난 채 쓰러져 있었다.
“저, 괴물을 제압해라!”
“물러서지 마라! 곧 지원군이 올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라테이온의 마장기사와 병사들은 브로리를 향해 계속해서 달려들었다.
지금쯤이면 전투가 벌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아군들이 움직이고 있을 터. 어떻게든 이들의 발을 묶어야만 했다. 그런 이유로 인해 전투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격전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피해가 제법 클 텐데도 불구하고 후퇴를 하지 않는 적의 병력을 보며 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무래도 여기가 바로 그 장소인 모양이로군.”
“멍멍. 적의 함정 말입니까?”
“그래. 그렇지 않으면 저들이 저렇게 눈에 핏발이 선 채로 달려들 리 없잖아? 지휘관이 피에 미친 녀석이 아니라면 말이야.”
죽을 기세로 달려드는 바라테이온의 병사들을 보며 마력 폭탄을 날려준 호가 사드나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발드라는 이름의 적의 지휘관은 어떻게든 이 전장에 자신들의 발을 붙잡아 두려고 하고 있었다.
무모할 정도로 달려드는 적의 움직임은 전략에 밝지 않은 이라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포위망이 이미 완성되었으니 거리낄 게 없다는 건가?”
“멍멍. 그렇다면 적의 지원군이 들이닥칠 텐데……. 저희들도 준비를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여기서 뭘 어떻게? 그냥 적의 총사령관이라는 발드라는 녀석을 빨리 잡은 후에 공격해 오는 적을 대비하는 수밖에 없지.”
“그, 그런가요? 멍멍?”
사드나인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기야 치니코프 성에 주둔하고 있던 대부분의 병력을 이끌고 나왔으니 지원군도 보급도 없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적의 수장을 얼마나 빨리 제압하는 것이겠지? 적들의 포위망이 단단하게 구축되면 아무래도 피해가 커질 테니까.”
발드 다음으로 자신들을 공격할 이는 그보다도 더욱 뛰어난 실력을 지닌 바라테이온의 용장일 터였다.
사드나인에게 말한 것처럼 일단은 적의 마장기 전력을 무력화시키는 게 중요했다. 병사들의 숫자 차이는 마장기 전력만 우세하다면 어떻게든 커버할 수 있었다.
호의 눈동자가 빠르게 전장을 훑었다. 여기저기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장기전은 아군의 압도적인 우세였다.
일단 등급의 차이가 최소 한두 단계 정도나 차이가 났다. 적의 주력은 B등급 마장기인 엑스칼리버도 아닌 자넷과 골드 이글급의 C등급 기체에 불과했다.
엑스칼리버도 지휘관으로 보이는 몇몇 기체가 전부였다. 결국 아군의 피해를 어느 정도 각오한다면 상대의 마장기 전력을 돌파해 적의 지휘관이 있는 곳으로 파고드는 것도 어렵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의 상황을 그리던 호가 통신구를 통해 말했다.
“일점 돌파로 발드 녀석을 사로잡는다!”
“총사령관을 노리는 건가?”
호의 명령에 브로리가 소녀처럼 상기된 얼굴로 되물었다.
“그래. 적의 지원군이 들이닥치기 전에 눈앞의 적들부터 깨부숴야겠어. 아군에게로 향하는 적의 공격은 셰비트리들이 막아줘. 어차피 기동력의 한계 때문에 빠르게 움직이기도 힘들 테니까.”
띵동
-한시진이 검의 길을 발동했습니다. 그녀의 공격은 앞으로 5분간 상대의 방어력을 무시합니다.
-브로리의 무릎 꿇어라가 발동했습니다. 이제부터 브로리의 공격은 치명타로 발동됩니다.
-사드나인이 시바의 용맹을 발동했습니다. 사드나인의 공격이 일정 확률로 치명타로 발동됩니다.
-엘 라스엘이…….
그리고 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알르드의 영웅들이 자신들의 스킬을 발동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전력도 상대하기가 버거운 바라테이온의 입장에서는 재앙이 닥친 셈이었다.
“적들의 돌격이다!!!”
대머리 기사단의 단장인 발드는 뛰어난 지휘관이었다. 그는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전장의 상황을 보며 호를 비롯한 알르드의 마장기들이 일점 돌파를 하려고 한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었다.
“마장기 전력을 집중시켜!”
알르드의 전술에 대한 대응책도 훌륭했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면 서로 간 마장기 전력의 차이가 하늘과 땅 수준으로 벌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흥분한 마장기사들의 절규가 어지러운 가운데 발드의 얼굴이 어둡게 변하기 시작했다.
* * *
알르드의 SS등급 영웅이자 호의 군사나 다름없는 로우덴은 팔쿤의 피닉스를 포함한 다섯 개의 마장기 편대와 함께 이십만의 병사를 이끌고 이동 중이었다.
그렇게 이동하는 대부분의 장병들은 자신들이 치니코프 성에서 먼저 출진한 본대의 뒤를 따라 이동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동 루트가 조금씩 남쪽으로 틀어지기 시작하면서 장병들의 머릿속으로 자신들의 목적지에 관한 의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된 거 아니야? 우리도 호 님을 지키러 가야 하지 않겠어?”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로우덴 님도 무슨 생각이 있으시겠지.”
게다가 호의 본대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소식이 알음알음 전해져 오면서 병사들 대다수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가득해져 있었다.
하지만 이는 바라테이온의 첩자에 의해 정보를 누설시키지 않도록 하는 철저한 보안 조치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심지어 마장기사들 중에도 행군의 목적지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정찰을 나갔던 윙드 훗사르 부대가 아무도 없어야 할 장소에서 바라테이온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자 의문에 찬 모두의 시선이 사령관인 로우덴에게로 향했다.
병사들의 계속되는 의문에 결국 때가 다가왔다는 것을 느낀 로우덴이 지휘관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멍멍. 우리들은 알르드의 군주 윤 호 님의 명령을 받아 아군을 포위하려는 적의 별동대를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윤 호 님이 이끄시는 본대는 우리를 믿고 직접 적의 함정으로 들어갔으며, 현재 치열한 전투 중에 있다. 멍!”
회의실로 사용하는 막사에서 평상시와는 달리 정복을 입은 로우덴이 여러 영웅들을 바라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적의 별동대들을 분쇄하는 한편, 적들의 수장 패트릭 바라테이온을 직접 공격한다. 멍멍.”
“패, 패트릭 바라테이온을?”
“우리의 전력으로 가능하겠습니까?”
“물론이다. 멍멍! 바라테이온이 자랑하는 사자 기사단, 하이에나 기사단, 대머리 기사단 등 적들의 주력은 현재 호 님이 이끄시는 아군을 공격하고 있다. 그로 인해 패트릭 바라테이온을 지키는 기사단은 실력이 뛰어나지 않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로우덴의 말에 모두들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다는 말은 자신들의 활약에 따라 이번 전쟁의 승패가 결정될지도 모른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꼬꼬댁. 이거 재미있군. 단순히 적의 별동대만을 처리하는 임무일 줄 알았는데, 패트릭 바라테이온의 숨통도 끊을 수 있다는 거지?”
“멍멍.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본대와 합류할 겁니다. 아시다시피 우리의 전력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니까요.”
살짝 한 걸음 빼는 로우덴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회의에 참석한 팔쿤의 눈동자는 흥분으로 가득해 있었다.
다른 영웅들도 비슷한 모습이었다. 패왕이라 불리는 패트릭 바라테이온만 잡을 수 있다면 승리의 가장 큰 주역은 자신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뭐, 뭐야?!”
경계를 서고 있던 바라테이온의 병사들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알르드의 병사를 보며 비명을 질렀다. 단순한 정찰병은 아니었다. 그 증거로 모습을 드러낸 알르드의 군대에는 다수의 마장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아, 알르드의 군대가 분명합니다! 십만은 족히 넘어 보입니다! 게다가 라이온레인의 모습도 보입니다!”
“빌어먹을! 대체 그 녀석들이 우리가 있는 곳을 어떻게 알아챈 거지?! 적들의 병력은 현재 대머리 기사단과 전투 중에 있는 게 아니었어?”
카드게임에는 적수가 없어 핵맨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바라테이온의 지휘관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단순히 우연이라 말하기에는 적들의 숫자가 예사롭지 않았다.
“……잠깐. 그렇다면 놈들은 우리가 병력을 나눠 자신들을 포위 섬멸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하루라도 빨리 이 사실을 참모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우리의 작전이 새어나간 게 분명합니다!”
핵맨의 부관들이 그제야 사태를 파악하고는 병아리처럼 입을 조잘거렸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경계 초소가 마력 폭탄의 공격을 받아 화염에 휩싸이는 모습이 모두의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젠장! 전투 준비! 마장기사들에게 빨리 연락을 취하고, 발 빠른 녀석들로 하여금 본진에게 우리의 상황을 알리도록 해!”
일군을 통솔하고 있는 지휘관답게 핵맨은 우왕좌왕하는 부관들과는 달리 사태를 파악하고는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핵맨은 자신들이 여기서 전투를 하는 동안 작금의 상황을 패왕 패트릭 바라테이온과 유능한 그의 참모들이 알아차리기를 바랐다.
하지만 핵맨의 명령에 따라 바라테이온의 본대로 향하던 병사들은 여러 겹으로 포위된 알르드의 실버 문에 의해 모조리 목숨을 잃고야 말았다. 이미 상대의 생각을 예상한 로우덴이 준비한 수였다.
게다가 갑작스러운 기습에 부리나케 가동한 바라테이온의 마장기들은 알르드가 자랑하는 라이온레인이 등장하기도 전에 조인족의 전설급 마장기 피닉스의 공격에 의해 순식간에 터져 나갔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사방에서 마력포를 쏘아대는 치르넬의 탄막을 막아내기에는 바라테이온 마장기사들의 실력이 부족했다.
“꼬꼬댁! 꼬꼬! 이 팔쿤 님이 나가신다!!!”
그렇게 홀로 상대의 마장기 전력을 박살 내는 팔쿤의 위용은 치풍당, 아니 위풍당당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