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4
리그너스 대륙전기 314
“후퇴?”
“그렇습니다, 멍멍.”
집무실에서 서류를 정리하던 호는 로우덴의 보고에 고개를 갸웃했다.
최근 이삼일 바라테이온의 공세가 조금 느슨해진 것 같다는 느낌은 있었다. 하지만 후퇴라니? 쉽게 믿기 힘든 보고였다.
치니코프의 저항이 거세기는 했지만 아직 바라테이온에는 수백만에 달하는 병사와 마장기들이 남아 있었다.
게다가 패왕 패트릭 바라테이온이 직접 나선 친정이었다.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후퇴는 그의 명성과 자존심에 크게 스크래치를 낼 터였다.
‘뭔가 이상한데…….’
그런데 그것을 감안하고 전쟁을 중단한다? 호가 그들의 의도를 짐작하기 위해 손가락을 까닥일 때였다.
“그리고 그들의 후퇴는 기만전술이 틀림없습니다. 멍.”
“기만전술? 뭐, 나도 비슷한 생각이기는 한데.”
“역시 주군이십니다, 멍멍! 적들의 계략을 바로 눈치채셨군요! 그 뛰어난 지략! 감탄스럽습니다!”
“…….”
눈을 빛내는 멍멍이의 모습에 호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그냥 감이었다고 말하기에는 분위기가 조금 그랬다.
“어쨌든 이제까지의 전쟁으로 피해가 제법 있다고는 하지만 바라테이온의 전력으로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멍멍. 게다가 바라테이온은 이번 전쟁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손해만 보았죠. 패왕의 자존심 때문이라도 그들이 그냥 물러날 리 없습니다. 멍.”
말을 하면서 로우덴이 외알 안경을 들어 올리고는 찡그린 표정을 지었다.
“멍멍.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 치니코프는 난공불락 수준의 끔찍한 요새였습니다. 계속해서 공격을 시도하기에는 분명 부담을 받을 겁니다.”
로우덴의 말에 호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의를 표했다. 호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다. 그의 말대로 알르드 역시 계속된 전투로 인해 이제르론 두 기와 함께 다수의 마장기 및 병력들을 잃기는 했지만 바라테이온의 피해에 비하면 세발의 피나 다름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멍멍 바라테이온은 자신들이 유리한 곳으로 전장을 옮기려고 하는 게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유인책이라 이거지?”
“그렇습니다. 멍멍. 다만, 일부의 병력이 후방으로 빠진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호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며칠 전, 힐몽거가 이끄는 연합군이 바라테이온의 후방을 유린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바라테이온이 아무리 군사 강국이라 해도 군수물자 및 생산 공장이 있는 후방을 무시한 채 전쟁을 지속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우리들의 방침은?”
“멍멍.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적들의 함정으로 뛰어들어야죠.”
“……치니코프에 죽치고 있는 게 아니라?”
“그건 현명한 방법이 아닙니다, 멍멍. 게다가 장기전을 각오해야 합니다. 하지만 함정을 이용해 적의 본진에 큰 피해를 입히면 패트릭 바라테이온도 결국은 물러설 수밖에 없을 겁니다.”
로우덴의 말에 호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 혹시 네가 직접 전투에 나서지 않으니까 그런 소리를 하는 건 아니겠지?”
“아, 아닙니다. 멍멍.”
하지만 로우덴의 얼굴에 보이는 둥근 표정은 왠지 모르게 신뢰가 뚝 떨어지게 만들고 있었다. 어쨌든 로우덴은 적들의 함정에 유인당하는 척 하다가 일점 돌파 및 포위 공격으로 상대를 섬멸하자는 의견을 내었다.
그리고 호는 그런 로우덴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로우덴의 말대로 작전이 진행된다면 패트릭 바라테이온에게 크게 한 방 먹일 수 있을 뿐 아니라, 란틴 산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바라테이온의 SS등급 던전에도 접근할 수 있었다.
조금 돌아가는 느낌이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이번 전쟁은 자신의 SS등급 전직에 필요한 조건을 만족하기 위해 시작한 전쟁이었다.
하지만 후퇴를 하는 바라테이온의 병사들을 당장 병사를 이끌고 추격할 것은 아니었다. 적들의 함정 속으로 뛰어들기 위해서는 아군 역시 준비를 철저히 해야 했다.
그리고 굳게 닫힌 치니코프의 성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소수의 실버 문과 윙드 훗사르 부대가 몰래 밖으로 나섰다.
* * *
“추가 병력이라……. 게다가 마장기의 지원도 필요하다고요?”
치니코프에서 온 서신을 보며 아스트리드 벨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림드 산맥을 포함해 이번 전쟁으로 인해 자리를 비운 군주급 영웅들의 영토까지 그녀가 책임지고 있기 때문일까? 몇 번이나 크게 심호흡을 했지만, 답답함이 영 가시지 않았다.
“바라테이온의 수백만 군대가 호님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디아린의 말에 벨이 쓴웃음을 흘렸다.
“후우. 그건 저도 익히 들어 알고 있어요. 어쨌든 오십만이라……. 네 개 영토에서 훈련하고 병력이라면 숫자는 어렵지 않게 채울 수 있겠네요.”
마장기도 증원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미 디르시나에는 림드 산맥을 포함한 세 개 영토에서 생산되는 라이온레인이 열기 가량이나 배치가 되어 있었다. 생산이 된 지 불과 두 달도 되지 않은 새 기체들이었다.
“문제는 마장기를 다룰 수 있는 오너들인데…….”
최고 등급에 속하는 마장기인 만큼 라이온레인을 다루기 위해서는 마장기술이 뛰어난 영웅들이 필요했다. 벨의 혼잣말을 들은 디아린이 말했다.
“오너는 중요하지 않아요. 치니코프에 있는 영웅들이 다룰 테니까요. 뭐, 부상에서 회복한다면 말이죠.”
“크게 다친 사람들이 많은 가요?”
“음……. 네다섯 정도요. 다행히 호님은 무사하답니다. 아, 한시진 님도요.”
“걔는 조금 다쳐도 될 것 같은데……. 아, 농담인거 알죠?”
어깨를 으쓱여 보이는 벨의 행동에 디아린이 웃음으로 대답했다. 그렇게 두 여인이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며 지원을 보낼 병력과 물자들을 편성할 때였다.
누군가가 집무실의 문을 똑똑 두드리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알르드의 연구팀 ‘갈리는 공돌이’의 팀장인 엘 브릭이었다.
“어…….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보고를 드릴께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그 전에 잠부터 먼저 자야 할 것 같은데…….”
경의를 표하는 의미로 벨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는 엘 브릭을 보며 디아린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퀭한 얼굴에 다크 서클이 볼까지 내려온 그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민망한 것은 아스트리드 벨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림드 산맥의 군주답게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엘 브릭을 향해 물었다.
“무슨 용무죠? 엘 브릭 연구원?”
“아, 엘프족 마장기의 개발이 끝났습니다. 이제부터는 저희들도 세비트리와 실버 애로우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벌써 그 기술이 완성되었다고요? 연구가 굉장히 빨리 끝났네요.”
벨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연구팀 ‘갈리는 공돌이’ 입장에서 엘프족 마장기의 개발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자넷과 골드 이글 등 이미 마장기의 생산이 가능한 알르드의 기술력에서 엘프만의 특수한 기술만을 추가적으로 완성하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A등급 마장기에 비한다면 C등급 마장기의 개발은 너무나도 손쉬운 일이었다. 또한 벨은 모르겠지만, 갈리는 공돌이는 팀에 소속된 영웅의 종족과 관련된 연구에 추가적인 연구 효과를 받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 다음 연구는…….”
“엘프의 B등급 마장기인 윈드라이더와 엘 스카우터를 개발할 생각입니다.”
엘 브릭이 답했다. 이미 다음 연구에 대해서는 호에게 지시를 받은 게 있었다.
그리고 엘 브릭이 최대한 불쌍해 보이는 눈빛으로 벨을 바라보았다. 벨의 집무실을 방문하기 전에 팀원들의 응원을 한 몸에 받고 온 그였다.
“하지만 장인들의 숙련도도 그렇고 연구팀의 휴식도 필요한 상황인지라…….”
“그건 인정해요. 흐음. 그렇다면 앞으로 일주일간 휴식을 드릴게요. 그 정도면 충분하겠죠?”
“무,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이 기쁜 소식을 팀원들에게 알리러 가보겠습니다.”
혹시라도 벨이 말을 바꿀까 싶었는지 엘 브릭이 대답과 함께 부리나케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집무실에서 사라지는 엘프 영웅을 보며 디아린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너무 부려먹는 거 아니에요?”
“유능한 인재를 그냥 놀릴 수는 없잖아요? 그나저나 엘프의 마장기라……. 유능한 엘프 영웅들은 많이 있는데. 아무래도 이번 전쟁에서 C등급은 별 도움이 안 되겠죠?”
“글쎄요. C등급 마장기라지만 엘프 왕국의 마장기 중 하나인 세비트리는 장갑이 단단해 전투와 공성전에서 큰 도움이 된다고 들었어요. 특히나 등급이 높은 엘프 영웅이 조종하는 세비트리는 전장의 세계수라고도 불린다더군요.”
벨의 말에 잠시 고민을 하던 디아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녀 역시 전쟁에 관해서는 벨만큼이나 잘 알지 못했지만, 용병들에게 흘러가는 이야기로 들은 것들이 조금 있기는 했다.
“전장의 세계수…….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름이네요. 그렇다면 이번에 보낼 지원군에 세비트리도 몇 기 추가해야겠네요.”
“그렇다면 당장 제작에 들어가야 할 텐데. 시간이 될까요?”
“림드 산맥의 생산력이라면 충분해요.”
디아린의 의문에 벨이 확신을 담아 말했다. 그렇게 치니코프로 향하는 지원군에는 라이온레인을 포함해 세비트리 열기가 추가로 포함이 되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알르드는 우리의 왕국이기도 합니다. 언제까지 엘프가 보호만 당할 수는 없습니다.”
“하, 하지만 당신이 전장으로 떠난다면!”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스트리드 벨. 제가 없어도 칸디르가 영토를 잘 다스릴 테니까요.”
“…….”
붉은 핏빛의 대지를 다스리는 군주이자 S등급의 엘프 영웅인 엘 라스엘도 있었다.
그리고 엘 라스엘과 세비트리라는 엘프 마장기의 합류로 인해 로우덴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계획을 크게 수정해야했다. 단단한 장갑을 지닌 세비트리라면 충분히 라이온레인의 방패가 되어 적의 마장기 전력을 분쇄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세비트리를 다루는 엘프 영웅들의 조종술이 뛰어나야만 했는데 현재 치니코프에 지원을 온 엘프 영웅들은 대다수가 세비트리나 그 이상의 마장기를 다뤄본 적이 있는 영웅들이었다.
* * *
“출진한다!”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고 치니코프에 틀어박혀 있던 알르드의 군대가 성문을 연 것은 바라테이온이 후퇴를 시작한 지 한 달이 더 지나서였다.
워낙 오랫동안이나 움직임이 없었기에 바라테이온의 참모들은 알르드가 자신들의 유인책에 걸려들지 않았다고 생각, 일찌감치 장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치니코프의 성문이 열리며 적의 마장기들이 근처에 주둔하고 있던 바라테이온의 군사들을 공격, 전투가 벌어졌다는 소식이 패왕 패트릭 바라테이온과 참모들의 귀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움직이는군요.”
“꽤나 신중한 녀석입니다.”
시시각각으로 전해져 오는 정보를 확인하며 참모들이 말했다. 그들이 가리키는 이는 바로 알르드의 군주 윤호였다. 정보에 의하면 적의 선두에서 알르드의 군주 윤호의 기체로 알려진 라이온레인–플레임이 목격되고 있다고 했다.
“병사들을 뒤로 물려라. 그리고 알르드의 본대가 치니코프에서 100킬로미터가량 떨어졌을 때, 란틴 산맥에 있는 사단들에게 연락을 취하도록.”
그리고 패트릭 바라테이온이 명령을 내렸다. 그는 성문을 열고나선 알르드의 군대를 몰살시키는 한 편, 동시에 치니코프까지 손에 넣을 생각이었다.
“전투를 준비해라!”
“마장기를 가동해! 정해진 위치에서 대기하라!”
알르드가 움직였다는 소식에 대기 상태였던 바라테이온 병사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명령을 내리는 지휘관들의 입은 쉴 틈이 없었고, 보급을 하는 병사들 역시 손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준비를 마친 부대들은 참모들의 명령에 따라 자신들의 위치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알르드의 군주 윤호를 잡기 위한 함정으로 말이었다. 그러나 바라테이온 참모들의 예상은 시작부터 조금씩 어긋나고 있었다.
“크아악! 아아악!”
“공격! 적의 마장기를 박살내라!”
“무, 무기가 통하지 않습니다! 크아아악!”
“빌어먹을! 세비트리가 대체 어떻게 나타난 거야!”
유인과 동시에 상대의 마장기 전력에 어느 정도 피해를 줘야할 바라테이온의 대마장병들이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하고 그대로 산화하고 있었다.
이동속도와 공격능력은 형편없지만 장갑만큼은 굉장히 단단한 엘프의 마장기 세비트리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