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2
리그너스 대륙전기 312
“투석부대! 공격준비!!!”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무와 철로 만들어진 공성병기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라테이온의 공성병들이 만들어낸 투석기였다. 적들의 후방에서 투석기가 모습을 드러내자 알르드 소속 마장기의 공격이 그쪽으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콰앙! 쾅!
“크아악!”
“마장기의 공격이다! 피, 피해! 으아악!!!”
성벽 위에서 발사한 마장기의 공격에 적중당해 가루가 되어버리는 이들도 있었지만, 살아남은 투석기들은 어떻게든 치니코프 성벽을 향해 일렬로 늘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지휘관의 명령과 함께 병사들이 팽팽한 밧줄을 끊어내었고, 거대한 바윗덩이들이 하늘을 가로질러 성벽을 향해 날아들기 시작했다.
“바위가 날아온다! 중력 마법을 사용해!”
“그래비티!!!”
하지만 허공을 부유하고 있는 바윗덩이들을 향해 브뤼헤아 비쉬들이 둘, 셋씩 짝을 이뤄 제어 마법을 사용했고, 그들의 마력에 영향을 받은 돌덩이들은 그대로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컥! 윽!”
갑작스럽게 하늘에서 떨어지는 바윗덩이들로 인해 대형을 이뤄 성으로 밀고 들어오고 있던 바라테이온의 병사들이 비명과 함께 압사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어깨가 찌그러진 채 몸을 휘청거리는 마장기도 보이고 있었다.
“화살을 발사해라!!!”
그런 브뤼헤아 비쉬들의 활약에 바라테이온의 스나이퍼들이 마법사들을 노리고 석궁을 발사했다.
하지만 실버 문들이 자신들의 방패로 그들을 보호했고, 궁수의 위치를 파악한 치니코프의 방어포탑이 궁수부대를 향해 화살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저 빌어먹을 성은 대체 뭐야!!!”
“성벽을 넘으라고!!!”
마장기, 공성병기, 압도적인 병력의 우위 등 여러 방법을 동원해 치니코프 영지를 공격하고 있었지만, 바라테이온은 전투가 시작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치니코프 성 내로 병사들을 진입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상대의 저항이 그만큼 매서웠기 때문이었다.
희생양을 이용해 이제르론을 무력화시켰지만, 치니코프의 방어시설은 이제르론이 없이도 그들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많았다.
결국 바라테이온은 첫 번째 치니코프 공방전에서 성벽을 조금 무너뜨리는 성과만을 거두고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이 입은 피해는 얻은 성과에 비한다면 끔찍한 수준이었다. 사자기사단의 부단장이 행방불명되었으며 파괴된 마장기만 해도 스무 기가 넘었다. 희생당한 병사들의 수는 집계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공격하라!!!”
하지만 패왕 패트릭 바라테이온은 계속해서 공격 명령을 내렸다. 적들에게 시간을 줘서는 안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첫 번째 전투 이후에도 바라테이온과 치니코프 영지는 연달아 마력포를 교환하며 마나의 불꽃을 피어 올렸다. 그리고 그것이 꺼질 때면 언제나 수많은 희생을 만들어내었다.
“많기는 많네.”
“개미 떼 같은 녀석들! 대체 몇 명이나 되는 거야?”
“몇백만이라고 하던데?”
“몇백만? 그것밖에 안 된다고? 내 손에 죽은 녀석들만 해도 몇만은 되겠다!”
치니코프 영지의 마장기사들은 자신들의 한계에 도전하기라도 하듯 수면도 휴식도 잊은 채 물밀 듯이 몰려오는 병사들을 상대로 전투를 치러나갔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사망하는 영웅들도 하나둘씩 등장하기 시작했다.
띵동.
라 엑스트가 조종하고 있던 A등급 마장기 라이온레인이 파괴되었습니다.
라 엑스트가 사망했습니다. 당신을 위해 싸웠던 그의 용맹은 기리 기억될 겁니다.
“빌어먹을.”
S등급까지 힘겹게 성장시킨 영웅과 함께 A등급 마장기가 파괴되었다는 메시지를 본 호는 눈을 부릅뜨고는 마력 폭탄을 움직였다.
라이온레인의 가장 강력한 병기인 마력 폭탄이 터지면서 눈앞에 있던 적들이 순식간에 산화했다.
“이래서 이제르론이 열 기 정도가 있어야 했다니까.”
호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기 시작한 답답함을 한숨으로 내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호의 푸념과는 달리 치니코프 성은 성내로 바라테이온 병사들의 발을 허락하지 않고 있을 정도로 완벽한 방어를 선보이고 있었다. 전부 이제르론 덕분이었다.
여섯 시간에서 반나절 정도의 충전 시간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최종 방어시설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이제르론은 적들에게 사용만 했다 하면 엄청난 희생을 강요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라테이온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나 성벽을 뚫기 위한 적의 마장기사단이 가하는 공격은 처절할 정도였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만 하더라도 오십 여기에 달하는 마장기로 구성되어 있던 사자기사단은 사흘 동안의 전투에서 무려 70%가량이 대파했다. 기껏해야 열기가 조금 넘는 마장기만이 남아 있는 셈이었다.
물론, 알르드가 지불한 대가 역시 적지 않았다. SSS랭크의 병사인 실버문과 브뤼헤아 비쉬들이 반 가까이 사망했고, 라이온레인도 두 기나 파괴가 되었다.
이제르론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자신의 목숨을 도외시한 적 마장기들의 공격에 한 기의 이제르론이 폭발과 함께 파괴되었고, 그 잔해가 성내로 떨어지면서 영지민들의 희생을 만들어내었다.
“죽어! 죽어! 죽어!”
“와칸, 아니, 알르드 포에버!!!”
“호님을 위하여!”
“호! 호! 호!”
어쨌든 희생자들이 점점 늘어나고는 있었지만, 치니코프에 주둔하고 있는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전쟁 물자는 아직 풍부했고, 사방을 가득 메운 적을 몇 번이나 물리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었다.
굳이 불안한 면을 찾자면 성 내에 주둔하고 있는 병사들의 피해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점이겠지만, 블루 스케일의 영토인 란틴 산맥 동쪽에 알르드의 지원 부대가 도착했다는 정보가 전해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 * *
“빌어먹을! 저 성벽은 대체 언제 무너지는 것이냐!”
“대장님, 진정하셔야 합니다.”
충혈된 눈으로 분통을 터뜨리면서 치니코프 성을 노려보는 이는 사자기사단의 단장 레온이었다. 그는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최선두에 서서 알르드를 상대로 용맹하게 전투를 벌였고, 상대의 라이온레인을 파괴하는 성과를 거두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치니코프 성은 멀쩡했고, 사자기사단의 부단장이자 그의 연인은 레이자는 아직까지도 생사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바라테이온의 마장기를 모두 움직여 적의 성벽을 무너뜨려야 했다. 그리고 끔찍한 병기인 이제르론까지 무력화시킨다면 치니코프 성은 함락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패왕의 명령에 따라 성을 향해 진군하는 것은 전력에 큰 보탬이 되지 않는 병사들뿐이었고, 진정한 전력인 마장기는 소수만 출진하다가 적들의 완강한 방어에 박살이 나기 일쑤였다.
그리고 레온은 이런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폐하께서는.”
“단장님, 말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부하의 말에 조용한 침묵이 레온을 포함한 주위를 맴돌았다. 방금 전까지 레온이 입에 올리려고 했던 말은 해서는 안 되는 금기와도 같은 말이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침묵에서 벗어난 레온이 입을 열었다.
“실수했군.”
“단장님의 심정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폐하와 참모부도 분명 무슨 생각이 있을 겁니다.”
“후우. 기사단의 피해는 어떻지?”
“남은 마장기는 총 14기입니다. 이 중 세 기는 수리가 필요합니다. 명령이 떨어진다면 어떻게든 움직일 수는 있지만, 제 효율을 내지 못할 겁니다.”
“다른 기사단들은?”
“하이에나와 티거기사단의 피해도 만만치 않다고 들었습니다. 그나마 대머리기사단이…….”
보고를 듣던 레온은 양손을 얼굴을 감싸 쥐었다. 바라테이온이 자랑하는 마장기사단들이 영지 하나를 점령하지 못하고 무너지고 있었다.
물론, 상대는 바라테이온도 쉽사리 생각할 수 있는 적이 아니었다. 하지만 바라테이온이 골든 크로우와 함께 인간들의 왕국 중 최강이라고 생각하며, 다른 세력들도 무시할 수 없을 군사 강국이라고 믿고 있던 레온에게 지금의 공방전과 그 결과는 꽤나 큰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게 바라테이온의 맹공을 치니코프 영지가 버텨내고 있을 무렵, 블루 스케일의 수도인 스완에서도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겠습니다.”
스퀴드 수운다 후작이 주위의 귀족들을 바라보다가 여왕 세이라 클리퍼드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올린 후 입을 열었다.
“현재 알르드의 패자 윤 호가 직접 치니코프에서 바라테이온의 병사들을 막아내고 있고, 벌써 몇 번이나 승리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바라테이온이 700만을 동원했다는 말이 사실이오?”
“마장기만 해도 몇백 기가 된다고 하던데…….”
질문을 하는 귀족들의 음성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해상 전력이야 높은 평가를 받는다지만, 변변치 못한 육상 전력을 보유한 그들에게 있어 바라테이온의 공격은 천재지변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귀족들을 보는 스퀴드 수운다의 입술이 씰룩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현이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알르드의 군대는 그런 바라테이온을 상대로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바라테이온을 막아내면서 지키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이 블루 스케일이라는 점입니다.”
블루 스케일의 충신이 엷게 냉소하며 말했다. 블루 스케일을 차지하고 지키기 위해 서로 다른 두 세력이 전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른 귀족들도 그런 사실을 느끼고 있는 모양인지 다들 어깨를 움츠려 보였다. 그리고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세이라 클리퍼드가 입을 열었다.
“알르드에서 지원을 요청해 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도베르만 제독의 함대를 이용해 란틴강의 끝자락까지 이동, 모에드 왕국을 거쳐 바라테이온의 후방을 공격해 달라는 요구입니다.”
“후방 공격이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수운다 후작? 우리에게 그럴 만한 여력이 있습니까?”
“저는…….”
스퀴드 수운다는 잠시 말을 흐렸다. 블루 스케일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마장기 스무 기를 포함해 지상군 오십만 정도가 전부였다.
도베르만 후작의 해상 함대를 개조한다면 운용할 수 있는 병력이 조금 더 늘어나기는 하겠지만, 크게 차이는 나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이 병력으로 바라테이온을 공격한다는 것은 멍청한 짓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바라테이온이 정상적인 상태일 때의 이야기였다. 게다가 바라테이온의 위협에 신음하고 있는 세력은 블루 스케일 혼자가 아니었다.
“모에드 왕국의 왕인 칼스 모에드와 힘을 합치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스퀴드 수운다 후작의 말을 끝나기가 무섭게 회의실의 분위기가 시시각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쟁을 반대하는 이들은 없었다. 아니, 있다고 해도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이미 블루 스케일은 적국에게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세이라 클리퍼드는 중앙군을 포함해 귀족들에게도 총동원령을 내렸다. 도베르만 후작의 함대 역시 정비에 들어갔다. 호의 말대로 모에드 왕국을 통해서 바라테이온의 후방을 기습할 생각이었다.
“패트릭 바라테이온에게 한 방 먹이자고? 그거 끌리는 이야기로군.”
블루 스케일에서 찾아온 사신 스퀴드 수운다 후작의 말에 칼스 모에드는 큰 흥미를 보였다.
“폐하!”
모에드의 몇몇 귀족들이 칼스 모에드의 생각을 가로막았지만, 모에드 왕국의 왕은 이미 자신의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동맹국임에도 불구하고 신성 왕국 및 천족과의 전쟁에서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다가 오히려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동맹국을 공격하는 바라테이온의 비겁한 행동에는 그 역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블루 스케일은 우리와 함께 손을 잡고 천족을 물리쳤던 동맹국. 그들의 위기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지. 길은 언제든지 빌려주겠네. 덤으로 우리의 병사들도 그대와 함께했으면 하네.”
그리고 칼스 모에드는 이번 전쟁을 통해 부유한 바라테이온의 영지를 손에 넣어 왕국의 위기를 돌파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도베르만 후작이 이끄는 블루 스케일의 군대가 모에드 왕국의 영토에 상륙하기 시작했고, 모에드 왕국의 장군인 힐몽거와 합류해 바라테이온의 국경을 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