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0
리그너스 대륙전기 310
둥! 둥! 둥!
치니코프 영지가 포위된 지 이틀 뒤, 커다란 북소리와 함께 바라테이온의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예상했던 상황인지라 영지의 분위기는 굉장히 차분했다. 치니코프 영지에 주둔하고 있는 알르드의 병사는 약 삼십 만. 수백만에 달하는 바라테이온의 병력과 비교한다면 볼품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머릿수로만 하는 게 아니었다.
다른 이들의 생각은 모르겠지만, 치니코프 성의 경계탑 가장 높은 곳에서 바라테이온의 병사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호만큼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일반 병사들은 크게 신경 쓸 필요 없어. 마장기 편대부터 처리하자.”
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성으로 몰려오는 적들을 바라봤다.
바라테이온의 주력은 S랭크의 병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실버 문이나 브뤼헤아 비쉬와 같은 아군의 병사들과 비교하면 무게감이 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마장기는 달랐다. 리그너스 대륙의 최강 병기라 불리는 마장기들은 등급에 관계없이 위협적인 병기였다.
“알겠습니다. 멍멍!”
그런 호의 명령에 옆에 서있던 로우덴이 자신의 외알 안경을 슥 고쳐 올리며 빠르게 대답했다. 이미 그는 자신의 스킬인 신산귀모를 통해 적들의 계획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제르론 준비!!”
명령과 함께 두 기의 이제르론에 마력이 충전되기 시작했다. 성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마장기는 열기 가량으로 세 개 편대에 불과했다.
굳이 네 기의 이제르론을 전부 사용하지 않아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상대 마장기의 구성도 골드 이글과 자넷급 정도로 전부 C등급에 불과했다. 대장기로 보이는 마장기의 색상이 조금 다르기는 했지만, 그래봤자 베이스가 C등급 마장기에 불과했다.
그렇게 이제르론의 마력이 충전되는 동안 호의 눈에 특이한 모습이 포착되었다.
“……방패?”
치니코프 성을 향해 진격해오고 있던 바라테이온의 마장기들이 이제르론의 움직임을 확인하더니만 뒤에서 두꺼운 원형 강철판을 꺼내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특이한 형태의 마장기라면 불가능한 행동이겠지만, 인간형태의 마장기인 자넷이나 골드 이글의 움직임으로는 충분히 가능한 행동이었다.
“멍멍. 아무래도 이제르론을 막기 위해 바라테이온이 준비한 방법인 모양입니다.”
“어떻게든 피해를 줄이기 위해 머리를 쓴 모양이네.”
그렇게 말을 하면서 호를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런 강철판으로 막아낼 수 있는 방어시설이었으면 이제르론이 리그너스 대륙의 최강병기라는 거창한 수식어로 불릴 이유가 없었다.
“출력 90! 100! 충전이 완료되었습니다!!”
“좋아! 발사!”
한 번 사용하면 최소 여섯 시간에서 반나절 정도까지 정비가 필요한 이제르론이었지만, 충전이 완료되었다는 보고에 호는 망설임 없이 발사 명령을 내렸다.
콰아아아앙!
그리고 두 기의 이제르론에서 시작된 마력의 물줄기가 마장기들을 덮쳤다.
상대의 방어시설을 막아낼 수 있다는 믿음과 함께 강철 방패를 들고 있던 마장기와 그 안에 탑승한 바라테이온의 마장기사들이 마력의 에너지에 그대로 빨려 들어가며 빛과 열의 늪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콰아앙! 쾅쾅!!
그리고 이어지는 연쇄적인 폭발에 근처에 있던 병사들이 휩쓸리면서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무시무시한 위력이군.”
멀리서 상대의 공격에 의해 죽어나가는 병사들의 모습에 사자기사단의 단장 레온이 분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확실히 상대는 쉽게 여길 수 있는 녀석이 아니었다. 이제르론이라는 강력한 방어 병기를 네 기나 보유하고 있었고, 그 위력은 눈앞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마장기 편대를 모조리 날려버릴 정도로 엄청났다.
A등급 마장기인 라이온레인이라 할지라도 이제르론을 정면으로 얻어맞는다면 무사할 것 같지는 않았다.
“마장기 편대가 전멸했어요. 두 기가 살아남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제정신은 아니겠죠. 지금이라도 후퇴해야 하지 않을까요?”
“후퇴?”
레이자의 말에 레온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화살 한 번 날리지 못한 채 적들의 방어 시설에 엄청난 피해를 입고 후퇴를 한다고?”
“하지만 레온. 이대로 공격을 했다가는 오히려 병사들의 희생만 늘릴 뿐이에요.”
“아니. 앞으로 두 기의 이제르론은 최소 여섯 시간에서 반나절 정도 무력화된다. 후퇴는 그들의 희생을 헛되이 만들 뿐이야.”
레온이 자신의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방금 전에 산화한 마장기 편대는 치니코프의 강력한 방어시설인 이제르론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희생양이었을 뿐이었다.
마장기들이 전부 C등급으로 이루어진 것만 봐도 그랬다. 그것도 연식이 오래되어 박물관이나 폐기처분을 해야 할 기체였고, 탑승하고 있던 마장기사들 역시 실력이 떨어지거나 마장기를 수여받지 못한 견습 정도에 불과했다.
“게다가 후퇴 명령은 내가 내리는 게 아니야.”
그리고 이어지는 은근하고 낮은 목소리에 레이자는 고개를 숙였다. 오늘의 공성전은 패왕 패트릭 바라테이온이 지휘하고 있었다.
“이제르론 두 기가 사용되었군. 다른 마장기 편대를 움직인다.”
세 개의 마장기 편대가 산화하는 모습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전황을 지켜보고 있던 패트릭 바라테이온이 선언하듯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명령을 받은 마장기들이 좀 전과 마찬가지로 오와 열을 이뤄 치니코프 성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비교적으로 가벼운 무장을 하고 있었고, 이동 역시 굉장히 빠르게 하고 있었다. 민첩성으로 이제르론을 피하려는 의도로 보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콰아아아아아!
작열하는 빛줄기가 강철의 병기를 갈갈이 찢어 놓기 시작했다.
움직이는 마장기들을 그대로 명중시키는, 정밀도와 정확성에 있어서는 완벽에 가까운 포격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폭발은 전황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의 망막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리고 잠잠해지는 전황을 보며 바라테이온의 영웅들은 모두가 신음을 내뱉었다.
치니코프 요새를 향해 공격을 시작한 지 불과 30분도 되지 않아 스무기에 달하는 마장기를 잃은 것이다. 비록 고철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마장기는 마장기였다.
게다가 병사들의 사기 역시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모두가 이제르론의 위력에 짓눌린 것은 아니었다. 본진에서 공격 명령이 떨어지자 레온이 빠르게 자신의 라이온레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자기사단! 출진한다!!”
“가장 먼저 성벽 위로 올라서는 자에게 백만 리스를 하사하겠다!!”
그리고 바라테이온의 마장기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은 치니코프 성의 경계탑에 있는 호의 눈에도 톡톡히 들어오고 있었다.
“좋아! 우리도 움직인다! 로우덴! 병사들의 지휘를 부탁한다.”
“멍멍!!”
상대의 움직임은 이미 예상범주 내에 있던 바. 자신의 마장기인 라이온레인–플레임을 향해 달리면서 호가 외치듯 말했다.
* * *
치니코프 공방전에 참여한 바라테이온의 병력은 약 121만 명으로 바라테이온의 모든 병력이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수백만에 달하는 병사들이 움직이기에는 치니코프 성은 너무나도 작았다. 그에 반해 치니코프 성에 주둔하고 있는 알르드의 병사들은 30 만 명으로 병력의 수만 따지면 네 배가량이나 차이가 났다.
마장기의 숫자를 비교하면 그 차이는 더더욱 커졌다.
그러나 알르드는 실버 문, 브뤼헤아 비쉬등의 SSS랭크급 병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게다가 보유한 마장기들 역시 대다수가 엄청난 위력을 자랑하는 A등급 마장기들이었다.
보급선이 끊기기는 했지만, 이미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준비를 한 덕분인지 치니코프 성내에 보관되어 있는 전쟁 물자는 바라테이온의 예상 이상으로 많았다.
결국 여러 상황들을 고려한다면 서로간의 우열을 따지기란 쉽지 않았다.
띵동.
-<전장의 노래> S랭크가 발동되었습니다.
-<팔진도> SS랭크가 발동되었습니다.
-<약자멸시>가 발동되었습니다. 작전 지휘관보다 통솔, 무력이 낮은 영웅들이 일정확률로 혼란에 빠지고 사기가 빠르게 감소합니다.
-한시진이 검의 길을 발동했습니다. 그녀의 공격은 앞으로 5분간 상대의 방어력을 무시합니다.
사방에서 스킬들이 사용되었고, 그 효과들이 흩뿌려지며 빛의 그림들을 만들어내었다.
수십, 수백에 달하는 방어시설들이 불을 내뿜었고, 그 못지않은 마장기의 마력포가 성벽 위를 강타했다.
“이 정도 죽었으면 그냥 물러나야 되는 거 아니야?!”
요란한 폭발과 함께 자신이 사용한 마력폭탄에 의해 수백의 병사들이 산화하는 모습을 보며 호가 푸념하듯 말했다.
이제르론이 무력화된 사이에 어떻게든 치니코프 성을 점령하려는 의도일까? 적들의 수는 개전 초와 비교해 크게 줄어들지 않은 모습이었다.
“멍멍! 개미떼도 이런 개미떼가 따로 없습니다!”
“귀찮은 녀석들!!”
통신구를 통해 전투를 벌이고 있는 마장기사들의 목소리가 하나둘씩 들려왔다. 그래도 한마디씩 하는 것을 보니 아직까지는 다들 살만한 듯 보였다.
호는 빠르게 전투 상황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로우덴의 적절한 지휘 때문일까? 방어선에 크게 문제가 있어 보이는 곳은 없어 보였다. 이렇게 조금만 더 버티면 이제르론의 정비가 끝날 테고, 다시 적들에게 이제르론의 무서움을 각인시킬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호의 생각은 너무나도 느슨했다. 호의 휘하에 뛰어난 영웅들이 있는 것처럼 바라테이온에도 유능한 영웅들이 존재했다. 바로 바라테이온이 자랑하는 사자기사단이었다.
“어, 어어어?!”
자신의 모든 화력을 동원해 적들을 무찌르고 있던 라쿤이 어느새 자신을 포위하고 있는 두 대의 라이온레인을 보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어떻게 올라왔지?!’
라이온레인은 아군 주력의 기체였다. 하지만 상대는 아군이 아니었다. 당황한 라쿤의 눈에 살짝 무너져 있는 성벽이 들어왔다.
‘저건?!’
마장기의 포격에 의해 무너진 잔해였다. 아무리 치니코프의 성벽이 강력한 마나 보호막이 있는 단단한 성벽이라 해도 마력포의 계속된 공격에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리 큰 부위는 아니었지만, 뛰어난 마장기사라면 무너진 잔해를 밟고 성벽 위로 올라올 수 있는 디딤돌 정도로는 되어 보였다.
“큭!”
하지만 라쿤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두 기의 라이온레인이 라쿤의 프랭스를 향해 마나 소드를 휘둘렀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라쿤의 프랭스! 적들의 라이온레인에게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지원을 요청합니다!”
동체를 뒤로 빼며 상대가 휘두르는 검을 가까스로 피한 라쿤은 빠르게 지원을 요청하는 통신을 넣었다. 상대의 기세가 만만치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라쿤은 자신이 마장기를 상대로 한 실전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라쿤의 판단은 굉장히 정확했다. 상대 마장기의 공격은 라쿤이 반격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매서웠다.
“헛?! 마지노 라인!”
프랭스의 목을 향해 날아오는 마나 소드를 보며 라쿤이 위기감과 공포로 가득 찬 목소리로 외쳤다. 이어서 프랭스의 가슴 부위에서 튀어나온 다섯 개의 원반이 사각뿔 모양으로 펼쳐지더니 라쿤의 프랭스를 중심으로 마력의 방어막을 만들어내었다.
카아앙!
그리고 방어막은 혼신의 힘을 다한 레온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정도로 단단했다.
“크윽! 무슨 놈의 마장기가!”
이제껏 보지 못한 상대 마장기의 움직임과 능력에 레온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과 레이자의 능력이라면 순식간에 눈앞의 특이한 마장기를 제압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실제로 상대 마장기사의 능력은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상대 마장기의 성능은 자신들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고 있었다.
“수인족의 전설급에 속하는 녀석이에요!”
“어떻게 해야 하지?!”
“마력 폭탄을 사용하겠어요!”
레이자의 외침에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프랭스를 향해 마나 소드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레이자가 마력 폭탄을 사용하던 동안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레온!!”
그리고 통신구를 통해 들려오는 연인의 경고성에 레온은 빠르게 마장기를 뒤로 움직였다. 이어서 터져 나오는 빛 무리의 소용돌이가 그의 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레이자가 사용한 마력 폭탄이 상대의 괴물 같은 기체에 제대로 명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