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8
리그너스 대륙전기 308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냐, 윤호.”
계속해서 들어오는 첩자들의 보고를 확인하며 빅터는 인상을 찌푸렸다.
갑작스러운 선제공격으로 모두를 긴장시키게 만들었던 알르드의 군주 윤호는 자신이 점령한 치니코프 영지에 틀어박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치니코프 주위에 있는 영지를 두어 번 습격한 게 전부였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치니코프 영지를 전진기지 삼아 보급로를 확보하는 한 편, 자신들의 거점을 만들고 있는 게 분명했다.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게 세워진 성벽과 우후죽순으로 세워지고 있는 방어 시설만 봐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알르드의 패자인 윤호가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바라테이온도 멍청하게 있지는 않았다.
수십 개의 군단이 모든 편성을 마치고 국경 도시로 이동할 수 있었고, 후방 도시에서는 마장기를 비롯한 군사 물자의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외교적으로도 귀찮은 여러 문제들을 빠르게 처리하기까지 했다.
결국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시간문제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전쟁이 벌어지면 바라테이온은 알르드를 짓밟는 것과 동시에 블루 스케일도 함께 손에 넣을 생각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별다른 전력 보강이 없단 말이지. 알르드의 주인은 블루 스케일을 포기할 생각인가?”
“최근 라이온레인으로 추정되는 기체로 이루어진 마장기 편대와 십만 정도의 병력이 더 합류했다고 합니다.”
“십만이라……. 고작 그 정도의 병력만으로 우리를 막아낼 수 있다고?”
부하의 보고에 빅터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적은 숫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국경에 배치되어 있는 바라테이온의 병사는 수백만이 넘었다.
알르드의 병사들이 SSS 랭크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것도 압도적인 수 앞에서는 당해낼 수 없을 터였다. 마장기의 숫자도 차이가 컸다.
당장이라도 명령이 떨어지면 바라테이온의 용맹무쌍한 병사들은 순식간에 윤호의 군대를 전멸시키고 치니코프 영지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릴 터였다.
하지만 빅터는 섣불리 군대를 움직일 수 없었다. 패왕 패트릭 바라테이온의 명령이 떨어지지 않은 것도 있지만, 영지에 틀어박혀 있는 알르드의 꿍꿍이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무시하기에는 감이 좋지 않았다.
‘엘프 왕국, 수인 왕국 그리고 쉐르난비체…….’
하나하나가 바라테이온 이상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강력한 세력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조차도 알르드를 공격했다가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물러나고야 말았다. 심지어 수인 왕국은 전 영토의 30%가량을 빼앗기까지 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빅터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도중 그의 보좌관이 조심스럽게 빅터에게 귀엣말을 건넸다.
“레온이?”
“네. 사자기사단 모두가 도착했습니다.”
보좌관의 말을 들은 빅터에 눈에 이채가 스쳤다.
사자기사단의 레온은 최근 있었던 라우드 성 공방전에서 알르드의 마장기사들과 전투를 펼친 경험이 있었다. 바라테이온의 뛰어난 기사인 그를 통해 알르드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리로 불러 오도록.”
빅터의 지시에 보좌관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자리를 물러났다. 그리고 잠시 후, 붉은 머리카락의 용맹하게 생긴 남자와 가냘프지만 외모와는 달리 단단한 느낌을 주는 여성이 회의실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다만, 남자의 몸에는 하얀색의 붕대가 칭칭 감겨져 있었다. 팔에 부목을 대고 있는 것을 보니 뼈가 부러졌거나 금이 간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왕자님.”
“빅터! 이거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데? 한 삼 년 정도 되었나?”
레이자의 인사에 이어 빅터를 발견한 레온이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손을 흔들었다. 기사학교 시절부터 동갑내기 친구로 지냈던 둘은 성인이 되고 바라테이온을 이끄는 기둥이 되어서도 서로의 굳건한 우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지. 뭐, 네 녀석의 소식은 보고를 통해 계속해서 듣고 있었다. 그런데 그 부상은 어떻게 된 거지, 레온?”
빅터의 눈동자가 레온의 팔 부위로 향했다.
“알르드의 에이스에게 제대로 당했어. 무시무시한 녀석이더군.”
“무시무시한 녀석이라면……? 브로리나 한시진, 그 둘 중 하나가 나타났나보군.”
“호오.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네?”
“그렇지. 정보부 애들이라고 매번 놀고먹는 녀석들은 아니잖아? 그런데 대체 누구지? 니 팔을 부러뜨린 마장기사는?”
“최강로리 브로리.”
빅터와 레온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의자에 앉았다. 레이자도 조심스럽게 레온의 곁에 자리했다.
“SS등급으로 추정되는 괴물을 만났군. 힘들었겠어.”
“실력이 엄청나더군. 문제는 그게 아니야. 그 녀석이 조종하는 마장기의 정체, 알고 있었어?”
“원인족의 전설급 마장기인 코우랄라?”
곧바로 대답을 하는 빅터의 모습에 레온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자신이 전방에서 멍청하게 있는 동안 이들은 이미 모든 정보를 파악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런 레온의 생각을 눈치 챈 빅터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우리 쪽에서도 파악한지 얼마 되지 않은 정보다. 코우랄라 말고도 피닉스, 프랭스, 시바가 치니코프 영지에 주둔하고 있지. 알르드도 제법 정예군을 보내왔어.”
그리고 레온이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휘유. 알르드와 블루 스케일의 관계가 상당히 돈독한가 보군. 혈연관계로 맺어진 골든 크로우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마당에 말이야…….”
말을 끝내고 싱거운 미소를 지어보인 레온이 빅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미소와는 달리 그의 눈동자는 알 수 없는 감정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폐하께서는?”
“전쟁은 분명 일어난다. 하지만 우리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상대의 전력을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어.”
“그러니까 어떻게 말이지?”
“하루살이들을 이용할 생각이다.”
빅터의 말을 이해 못한 레온이 자신의 눈을 깜박거렸다. 그리고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레이자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왕자님께서는 블루스케일의 귀족들을 이용하실 생각이시군요.”
토르니 공작을 필두로 한 블루 스케일의 망명 귀족들은 곧 전쟁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에 하루가 멀다 하고 빅터를 찾아오고 있었다. 어떻게든 전쟁에 끼어들어 공을 세우려는 목적이었다. 그래야 훗날 목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 자신들의 역량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주제에 공에 눈이 먼 녀석들이지.”
그리고 빅터는 이들을 희생양 삼아 치니코프에 주둔하고 있는 알르드의 전력을 확인할 생각이었다.
‘그 녀석들이 운 좋게 치니코프를 점령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극히 희박한 가능성에 빅터는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친 뻐근한 모양인지 자신의 팔을 살짝 들어 올렸다가 내린 레온이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치니코프 영지를 점령할 때 나도 참가했으면 해.”
“……복수 때문인가?”
빅터의 눈동자가 레온에게로 향했다. 알르드와의 교전으로 사자기사단 몇이 죽었다는 보고는 이미 받은 바 있었다.
“그래. 윤호라는 녀석을 없애야 비명에 죽은 동료들의 한을 풀어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는 레온이 자신의 부하들을 굉장히 아낀다는 사실도 익히 알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빅터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알겠네. 본격적으로 치니코프 영지를 공격할 때 사자기사단이 가장 선두에 설 수 있도록 해주지.”
아무래도 자신의 친구는 지금의 내용을 요구하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모양이었다.
* * *
“이거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거 아닌 가……?”
치니코프 영지를 방문한 디아린 상단의 상단주, 디아린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림드 산맥이 자랑하는 요새 도시인 에스트라다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수의 방어시설들이 치니코프 영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저 비싼 이제르론이 대체 하나, 둘, 셋, 넷. 미치겠네.”
손가락을 들어 완공된 방어시설의 수를 세던 디아린이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바라테이온과의 전쟁을 대비한 거점 도시 및 전진 기지라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도시이기는 했지만, 아무리 봐도 과한 느낌이었다. 최근 림드 산맥의 군주인 아스트리드 벨이 그녀에게 하소연을 했을 정도로 많은 자금과 자재들이 치니코프 영지에 투자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디아린을 향해 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 기로는 부족해. 이제르론은 최소한 열 기 까지 건설할 생각이야.”
“어디 드래곤 무리라도 쳐들어오나요? 이제르론을 하나 건설하는데 얼마의 자금이 들어가는지는 알고 있으세요? 무려 7억 리스가 넘는다고요. C등급 마장기 여섯 대가 넘는 가격이에요.”
“그래도 그 정도의 가치는 하잖아? 어차피 나중을 대비한 포석이라고.”
디아린의 말에 호가 딱 잘라 대답했다. 치니코프 아니, 치니코프 영지가 속해 있는 영토인 란틴 산맥은 대륙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요충지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대륙의 동쪽에 자리를 잡은 천족들이 세력을 뻗치기 위해서는 란틴 산맥을 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현재로써는 란틴 산맥을 노리는 천족의 세력은 없다 봐도 무방했다. 바다를 통한 길도 있는데다가 골든 크로우를 공격하는 게 산맥을 넘는 것보다 훨씬 간단하고 쉽게 때문이었다.
‘하지만 라헬이 등장하면 얘기가 달라지지.’
천족들의 영토에서 발호한 라헬의 추종자들은 오호 신장과 막대한 병력을 앞세워 수많은 공격 루트를 이용해 유저를 압박했고, 그 중 하나가 바로 란틴 산맥이었다. 산맥 주위에 있는 넓은 평야와 목초지 때문에 대규모 병력들이 손쉽게 이동하고 자리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영토에 속한 영지에서 생산되는 특산품들의 희귀도도 높은 편인지라 수익을 내기도 쉬웠다.
“나중을 대비한 포석? 설마, 바라테이온을 점령할 생각이에요? 하아. 호 님이 무모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정말 심각한데…….”
하지만 디아린은 그런 호의 말에 상당한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호는 그런 디아린의 오해를 풀어줄 생각이 없었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까앙! 깡!! 까아앙!!
그렇게 둘이 대화는 나누는 동안에도 공사는 여전히 진행되고 있었다.
“멍멍멍! 왈왈왈!! 크르르르릉!”
심시티를 이끄는 로우덴의 지시에 따라 영웅들이 한 몸처럼 움직였고, 인부들 역시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스피드로 공사를 진행해나가고 있었다. 그런 움직임만큼이나 작업에 참여하는 인부들의 피로도도 빠르게 쌓여나갔지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영지에 주둔하고 있는 병사들의 수는 굉장히 많았다.
그리고 그 때였다.
“어……?”
뽀얀 흙먼지와 함께 한 무리의 병사들이 치니코프 영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정찰을 나갔던 윙드 훗사르들이었다.
“어째 달려오는 느낌이 좋지 않은데……. 설마 바라테이온이 움직이기 시작한 걸까요?”
“뭐, 그럴 때가 되긴 했지.”
디아린의 물음에 가볍게 대답을 한 호는 빠르게 성문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저, 적들이 진군해오고 있습니다! 그, 그런데…….”
디아린의 예상대로 적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윙드 훗사르의 보고를 계속해서 들은 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블루 스케일의 깃발이라고?”
“그렇습니다. 블루 스케일의 문장과 함께 여러 문장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바라테이온으로 망명한 귀족들의 문장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병사들의 선두에서 말을 타고 이동하는 모제스 클리퍼드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바라테이온의 병사들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무슨 생각일까요?”
호와 함께 달려온 디아린이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고는 입을 열었다.
“글쎄? 그냥 희생양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이상한데? 자기네들이 명분으로 삼고 있는 모제스 클리퍼드까지 전쟁터로 보낼 필요는 없잖아.”
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뭐, 이유야 어찌되었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적들이 당장 치니코프를 향해 공격해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호가 고개를 돌리며 주위의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적들이 쳐들어오고 있다! 지금 당장 전투 준비를 하도록! 마장기사들에게 연락을 하고 이제르론의 충전에 들어간다!”
“네!”
“전쟁이다!!”
적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에도 불구하고 모두의 얼굴에는 아무런 긴장감도 없었다. 그만큼 치니코프 영지에 주둔한 전력이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네 기나 완성이 되어 있는 이제르론의 위용은 신의 철퇴와도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